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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55화 (255/303)

〈 255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 플뤼네의 중재자

* * *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말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저 정신을 차려보면 테이블 위에는 부러진 담배와 재만 희뿌옇게 남았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에스테릭스."

"뭔가?"

나를 돌아본 그의 표정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할 일은 마쳐야겠지.

"그럼 자네는 수입은 어떻게 충당하고 있는가?"

그렇게 물으면 그는 대답을 망설이다 말했다.

"뭐 있나? 그냥 뭐 땅을 담보로 세금을 걷는다네."

"그걸로 달에 수입이 충당이 된단 말인가?"

"그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집무실에서 회계 장부라도 가지고 올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걸 마냥 기다릴 여유도 이유도 없었기에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곧장 편지따위를 모은 선반을 뒤졌다.

찾은 것은 왕의 친서였다.

나는 그것을 품에 숨길 생각이었다.

이대로 반출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그걸 집어들려고 한 순간에 들린 발소리.

인기척에 빠르게 편지를 제자리로 돌려두고 태연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아, 기다렸나? 다녀왔다네. 확인하게. 이게 이번 분기에 걷은 세금을 일자별로 정리한 것일세."

그는 자료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다.

케이 겔데어스보다 어쩌면 더 장사꾼에 맞을는지도.

일을 마무리한 나는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네. 벌써 3시 50분이군."

"아, 벌써 그렇게 된건가?"

"그렇게 된거네. 하아... 정신이 하나도 없군."

"그래, 슬슬 나도 일어나 봐야겠군,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 말이야.

혹시 그 자네는... 아니, 아니네."

나는 그의 집을 나왔다.

로라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 쥐 죽은 듯 잠만 잤다.

아무에게도 들어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해두었었기 때문에

피로했다는 이유는 충분히 다른 이들을 억제하는 벽이었다.

충격적이었다.

가족의 의미가 그리고 내가 배신하려고 했던 그 남자의 어깨가 그렇게 초라해보일줄 몰랐다.

대체 가족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와중에 내 머리를 까맣게 채운 것은 나 역시도 머지 않아 버려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버려질 것인지, 혹은 그 자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을 것인지.

아주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높았던 쪽에 걸어보기로 하고 나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독을... 섞기로.

우연인지, 어쩌면 필연인지, 날이 흐렸다.

그리고 우중충한 날씨는 금새 비구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흐린 구름이 비를 떨어뜨리기 시작했을 때,

엠페레스의 시내에서도 찬 비가 내렸다.

얼마나 잔건지 모를 쯤, 하녀 하나가 내가 미리 지시했던 대로 날 깨우면

그제서야 나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서일어났다.

짧은 심호흡 후에 나는 옷을 차려입고 운전대를 잡았다.

어떻게 일이 진행된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설탕을 받아들고 그걸 설탕이 든 단지에 섞었을 뿐이다.

회의 기간중에 왕은 몇 번인가 설탕을 탄 커피를 마셨지만

독이 섞인 설탕을 먹지는 않은 건지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회의가 마무리 되고 나서 에네도르가 말했다.

"그래 뭐 아직 살아있는 것도 좋아. 누가 감히 왕의 설탕을 건드리겠어?

누군가 대신 먹고 죽는다면 그게 팔자인거야. 그렇게 될 일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정말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그냥 포기해야지.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거니까."

그리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왕은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던 와중에 장미 꽃밭 한가운데서 사망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계획대로 왕을 승계받은 왕자, 그리고 어딘가 탐탁치 않은 듯 웃어보이는 에네도르.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우리는 계획대로 일정을 늦췄고 수사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대로 현장을 조작했다.

증거, 상황, 증언. 모든 것들이 변해갔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에스테릭스 공작의 부인, 에드먼드 브리깃의 모친이 사망하고

그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왕이 승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급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그 누구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던 시점에 기폭제의 역할을 한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다시 그의 집에 향하게 되었다.

그의 집은 이전보다 훨씬 분주해 보였는데, 그 사이에서 못 보던 그림이 하나 있었다.

그 그림은 여성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장례의 초상으로 활용하고 무덤에 함께 묻겠다는 말에

나는 머리가 핑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 짧은 찰나에 난 미칠 것 같은 두통과 동시에 묘한 감각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이전에 찾아낸 친서를 그림 뒤의 판에 끼웠다.

그림과 코르크 목판 사이의 공간은 안성맞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적합한 장소였다.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모든 사건이 마치 날 위해서 흐르는 듯 했다.

조사받는 입장에서 뭐라고 반박조차하지 못한 에스테릭스의 집에

아주 빠른 속도로 조사반과 6귀족의 중역들로부터 파견한 이들이 섞였다.

친서는 흔적도 없이 행방을 모르게 되었고, 브리깃은 그럴 리 없다고 몇 번인가 외쳤으나

허탈하게 그 자리에서 실권을 경험해야 했다. 그가 제 자리에 무릎을 꿇고 굳은 표정으로 눈물을 쏟아도

변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저 바라보며 그ㅘ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다만 그가 내게 전한 금액에서 내 몫을 일정 부분 덜어내고 그의 아들에게 전하는 일만을

꾸준히 해 오고 있었다. 이제 나는 시류에 몸을 맡기고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분명 그래야 했을 터인데.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는 명백하게 느꼈다.

하지만 이미 알아차렸을 때는 늦어 있었다.문제는 그 이후였다.

"발을 뗄 생각은 없나 그래?"

우연히 마주친 에그니아가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늘 타인에게 그다지 감정을 싣지 않았던 에네도르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겼으므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지표를 제공한 것은 에그니아, 그 대머리였다.

명백한 혐오의 표현과 그 대상이 자신이 되었다는 것에

나는 당황했다.

이제 왕이 죽고 브리깃을 쳐낸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6귀족의 반응은 빠르게 변했다.

나를 필요없는 인물로, 그리고 틀에박혀 고지식한 왕 살인범으로 말이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에스테릭스로 몰아가기로 입을 맞췄고 또 그렇게 했으므로

내게 대놓고 물어오지는 않았지만 분명 섞이는 눈빛은 그런 의미였다.

에스테릭스 공작이 본격적으로 정권에서 멀어지고 난 이후에는 5귀족 체제로 돌아갔기 때문에

왕의 뒤를 이은 페테이어 국왕을 합하면 나는 과반수로부터 혐오의 대상으로서 눈초리를 받았다.

그리고 그 행위는 아마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과시하고 타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아주 천천히 야금야금 경쟁자를 밀어내기 위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선왕이 사라지고 나서 노예 해방에 관한 법률건은 흐지부지 되어버렸고

체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변한건 6귀족 사이에서의 미묘한 서열과 분위기 뿐이었다.

"시그릿, 처신은 잘 하는게 좋다. 언제라도 우리가 널 끝장낼 수 있음을 잊지 않도록.

너는 왕을 죽인 자이니 말이다. 반역, 배신? 그런 배신이 또 없지 않겠나?"

그들은 갈수록 나를 더 무시했고, 이 구도는 굳어져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은 단순한 모멸감과 비하, 그정도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점차 심해지는 차별대우는 내가 그들 중 밑바닥이라고 느껴지게 했다.

코탈은 점차 소속 귀족을 넓혔고 나는 반 강제로 코탈의 활동 자금을 지원하게 되었다.

몇 년인가가 흘렀다.

에스테릭스 브리깃을 세상을 떴고, 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그렇게 되리라고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불쾌했다.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시그릿, 제대로 서라. 우리 노예들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약속한 일자에 맞춰서 돈을 준비하지 않으면 이 인원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생각이지?"

"에그니아, 진정하게. 분명 내 갚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진정하고 내 말을 좀 들어보겠나?"

"필요 없어. 넌 씨발 이전부터 그랬지. 기껏 공은 다 너에게 돌렸는데도 병신처럼 멍하니 서서 사람을 좆같게 만든다고."

"그런 말은..."

저택에 종종 찾아오는 에그니아 그리고 에네도르. 그리고 나와의 대화를 바라보던 하인들.

노엘과 헤이나, 그리고 로라를 포함해서 점차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인으로서 품위를 보이지 못하는 이를 굳이 따라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헤이나 하녀장은 일을 그만두었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제 노쇠했다는 말로 이유를 대체했다.

그리고 그녀는 케이 겔데어스의 상단 회계 관리인으로 취직했다.

그녀를 따르던 상당수의 하녀들 역시 일을 그만두었다.

그 중에는 트리아나라는 하녀 역시 있었는데, 알고보니 헤이나 전 하녀장의 며느리였다고 한다.

업무 효율과 관계 없이 그저 취직시킬 아량으로 데리고 있었다는 것 같다.

후회같은건 하지 않앗다. 그들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아마 감정적인 문제도 물론 있었겠지만 주된 이유는 아마 내가 자금을 착취당해 그들에게 줄 돈이 얼마 없어서였겠지.

그들이 나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나서서라도 잘라야 했을 판이었다.

그럼에도 로라는 나가지 않았다.

나는 로라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로라, 결혼은 했나?"

"아닙니다."

"연애는 하고 있나?"

"아닙니다."

"일에 보람은 느끼나?"

"그렇습니다."

그녀는 틀에 박힌 것 같은 대답을 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그녀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그녀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말해주게. 왜 아직도 이 저택을 떠나지 않는지."

"이 일이 마음에 들어서 입니다."

"자네는 내가 우습지 않나?"

"이미 많은 광경들을 바라보았습니다만, 그것이 우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감히 비웃을 정도로 잘난 인생을 살아오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괜히 그녀의 앞에서 웃어보이고 책상에서 담배를 꺼냈다.

오래 전에 구입했던, 이제는 한 개비 밖에 남지 않은 no.9의 돛대였다.

"불을 붙여주게."

그녀는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자네는 말이야. 이제 해고야."

나는 그녀를 해고해버렸다.

"네?"

"이건 내 차 열쇠네. 이제 자네가 몰게.

그리고 섭섭지 않게 넣은 퇴직금일세. 못해도 어디 가서 넉 달은 족히 먹고살 수 있을 테지."

"갑자기 이런걸 제게 주시는 이유가 뭔지요?"

"난 말이야, 피가 한 방울도 이어지지 않은 사람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믿지 않네.

하지만, 그럼에도 말이야 자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그냥 가족이 뭔지 궁금해졌을 뿐이야."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있으실 것 아닙니까?"

나는 그녀에게 작은 편지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뭔지 아나?"

"모릅니다."

"얼마 뒤의 버크레이엄 궁에서 6귀족의 복귀를 기념하며 연회가 열린다더군.

난 거기서 속죄를 할 생각이네."

"속죄 말입니까?"

"일이 터지면 늦네. 그 전에 이 나라를 떠나게. 어디든 먼 곳으로 그리고... 평화로운 곳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보다 물었다.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해고당한 자네는 알 일이 아니네."

"하지만 전..."

"자네는 가정부야 맞지? 내 하인이 아니네. 이제 해고도 당했으니 말이야."

"하아.... 알겠습니다. 이 나라를 떠나라는 말씀이시죠?"

"그렇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도 괜찮습니까?"

"뭘 말이지?"

"왜 하필 제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그건... 알 것 없네."

나는 그저 한마디를 머금었다.

네가 날 변하게 했거든.

내게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들게 만들었거든.

그리고 아마 처음일 이상한 감정을 느낀 것 같으니까.

그리고 나는 총을 한자루 챙겼다.

살상력은 확실한 작은 친구였다.

왠지 모두가 나를 무시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이제는 알 것 같다.

난 배신자일 뿐이었다. 속죄는 자기 만족에 불과하고

사실 제일 용서받지 못할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뒤는 나도 이성이 끊어진 것 같이 드문드문 기억이 빗겨 떠오를 뿐이다.

연회에서 빈 틈을 노려 에그니아를 준비한 총으로 쏴 죽이고 에네도르를 죽이려고 했을 때,

몸이 붕 떠올랐고, 갑옷을 입은 무장기사들이 날 깔아뭉개고 있었다.

손에서 무력하게 총을 빼앗기고 역으로 몸에 바람구멍이 나 버렸다.

들은 기억이 있다. 엠페레스의 적록 기사단.

나는 그제서야 내 앞에 앉은 에네도르, 아니 페트리나 여왕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속고 있었을 뿐이라고, 그때 느꼈다.

저 여자를 쏴 죽여야 했는데.

그래야 에스테릭스에게 조금이나마 면목이 생길 것 같은데. 저 년. 저 년을...

아... 짓밟히는 머리에 생각이 비워져간다.

그저 오래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던 것 같은 아련함만 남는다.

그때 그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을까, 에스테릭스를 만났을 때 생각을 바꿔야 했을까.

아니, 난 왕을... 정말 죽여도 되는 거였을까.

이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

그리고 엠페레스에서 유레크로스 북부 콜린으로 떠나는 배에 탄 로라는 멍하니 시그릿을 생각하며 앉아있었다.

"좋은 사람이었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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