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두 경찰
* * *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있어."
제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 모건은 말 대신 마시던 물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험 요소를 남겨놓는 것 같아서 말이야.
목숨을 걸고서라도 날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해줘."
"목숨을 걸고서? 생각보다 상당히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제인이 문을 열면 그곳에는 차를 마시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앉아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남자였는데,
살짝 뒤로 묶은 노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소개할게. 아간틴이야. 찾아내느라고 고생 좀 했지.
정보상단의 인력을 동원해서 데려왔어."
"반갑습니다. 모건입니다."
모건이 손을 내밀면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했다.
"편한대로 불러 주십시오."
제인은 둘의 인사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간틴, 부탁할게. 이 건방진 남자에게 걸맞는 욕망을 담을 수 있는 계약을 준비해줘."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제인이 그렇게 말하면 아간틴은 후후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눈빛으로 모건을 돌아보았다.
그 눈은 분명 모건에게 '당신은 그런 계약으로 침묵하지 않겠지만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간틴이라고 소개받은 남자는 잔을 천천히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약이 준비되면 다시 오지요."
그 남자가 밖으로 걸어나갔을 뿐인데도 제인은 상당히 기뻐했다.
마치 거기에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처럼.
모건은 단지 거기에 순응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둘의 복수마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흐려질 쯤이었을까.
버크레이엄 궁의 비극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6귀족의 복귀를 명분으로 하는 연회의 중심에는 국왕이 있었다.
페테이어 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던 왕의 이면에는 어디까지나 잔혹했던 여왕이 앉아있었다는 것을
이때의 모건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적기가 무르익어갔다.
빠르게 흐르는 세월은 연도를 바꿔가도 이들은 별다른 감흥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미 그들의 복수는 시작되었고 법으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미련이었기 때문이다.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던 모건의 노트에 잉크가 번지고 피로함에 눈을 비비기도 오래 되었던 날이었다.
오랜 기간 커넥션을 쌓아왔던 에스테릭스 공작의 아들 에드먼드는 여전히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자였고
어느 순간 그에게 미묘한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지 그를 찾는 자신을 보았다.
언젠가는 이 순진한 자에게도 알려야겠다고 여기고 있었다.
에스테릭스 공작이 사랑했던 아들임에도 여전히 그를 불신하는 이 건방진 머저리는
아직도 자신이 옳다는 생각속에 빠져서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아버지가 이룬 모든 것들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함이 오히려 모건을 짜증나게 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이 계획에 주요한 인물이었고, 어쩌면 진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자였다.
모건은 나름의 추리를 짜맞추며 결과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국가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묶여있는 사건에서 자신이 아는 것이 극히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사실들이 기존의 상식을 부정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시그릿플뤼네. 그리고 에스테릭스의 몰락으로 이익을 취하는 자는 필시 현 국왕 페테이어.
두 명의 결탁관계가 증명이 됨에도 믿지 못했던 것.
그 위화감은 반 가문에 있던 것이었다.
사건이 끝나고 나서 조사를 원치 않는다고 느낀 자가 하나가 아니기에
반이 자신을 찾았으리라. 그럼에도 반은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그건 분명 왕의 뜻에 반하는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적어도 왕과 시그릿이 반에게 위협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대체 왜인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모건이 이를 깨달은 순간은 다름아닌 에드먼드와의 대면이었다.
"그래. 왕이 내쳤기에 오히려 감시가 붙었지. 쿠데타의 방지와 역모의 사전차단등의 명목으로. 아니 애초에 역모혐의로 인해 물러난 거였지 에스트릭스 공작은?"
분명 그를 속이기 위해 도발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 동시에 느꼈다.
역모. 필시 시그릿 한명으로 주장하지 못하는 일이다.
반은 제외하고 나면 그 당시 역모론을 제시하고 귀족들을 대거 재조사한 사건이 있었다.
에그니아와 에네도르가 이 사건을 담당했었다.
당시에는 큰 이상함을 느낄 수 없었지만 문득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이 둘이 당시에 솎아낸 귀족들이, 그 밑을 책임지는 길닦기였다면?
단기적으로는 눈치채기 어려울지 몰라도 실제로 코탈은 성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시그릿은 이 계획에 연루되어있다는 것이 확실함에도 그런 가시적인 변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용당한건가?'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증거가 없어 확신하지 못하는 생각이지만 이미 의문은 머리속에 자리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마 그건 헤럴드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두 남자는 알게 모르게 그 에드먼드의 주변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 중 조금 더 과격하고 치밀했던 것은 헤럴드였다.
이미 모든 것을 놓아버린 남자는 독자적으로 조사한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비가 내리던 날에 브리깃의 저택을 굳이 찾은 것 역시도 그 계획의 일부였다.
어디까지나 어리숙하게 보여야한다는 생각.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은밀하게 침투하기를 원한 헤럴드는 신중했다.
"오랜만이야 에드먼드. 얼마나 지났지?"
"대략 5일 정도 지났을 거라고 생각해. 헤럴드. 요즘은 어떻게 지내?"
"저 도시는 평화로운 편이야. 가끔 도둑들이 좀 있지만."
"가끔?"
"그래. 가끔."
"거짓말은 좋지 않아 헤럴드. 악의는 없겠지만."
"하하, 티 많이 났어?"
"지쳐보이니까말야."
이 눈치 없는 젊은 남자에게도 자신의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 않는 다는 것에 헤럴드는 안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집 전체에 옅게 깔린 향수냄새와 불쾌한 마약냄새.
이 멍청한 남자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깔린 냄새는 분명 모건이 다녀갔음을 말하고 있었다.
시덥잖은 이야기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기할 뻔한 복수는 이제껏 헤럴드를 지치게 하고 있었다.
겨우 끊기지 않고 이어온 오랜 집착을 그는 조용히 되새기고 있었다.
"그저 종치는 자들이 말없이 선 묘지에는 빛 하나도 없는 밤을 그저 비추는 그들의 종소리, 그리고 광인들의 눈물만이 어울릴 뿐이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책.
분명 엘리마네의 책이다.
경황이 없어 찾지도 못한 금서.
그게 에드먼드의 손에 들렸다.
"그들의 종에는문드러진 사자의 비명소리와 헤메는 자의 신음소리와교회의 찬가가 있을지니."
문드러진 사자의 비명소리. 헤메는 자의 신음소리. 그리고 마침내 교회의 찬가.
헤럴드는 절대 이어지지 않는 이 셋을 연결짓는 것이 분명 자신이 하려는 일임을 확신했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돌아가면 헤럴드는 그에게 별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에드먼드가 흔쾌히 승낙하면 헤럴드는 집주인이 욕실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곧장 집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단 한번도 손댈 수 없던 것을 훔치기 위해서.
멀지 않았다.
그 푸른 반지는 집무실의 책상 서랍 안에 들어있었다.
사슴이 그려진 반지. 브리깃의 문양이 담긴 반지였다.
긴장한 얼굴로 침을 넘기며 헤럴드는 그걸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표정을 정리하고 심호흡을 마친다.
헤럴드의 손이 살짝 떨렸지만 금새 시가를 꺼내 무는 것으로 진정시켰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지만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암시를 걸면서 숨을 뱉는다.
목표는 달성했다.
너무나 길었다.
모건과는 달랐다.
그렇게 아무에게나 정을 남기고 인연을 맺을 정도로 헤럴드는 여유롭지 않았다.
그런 실없는 일을 할 만큼 너그러울수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정신은 또렷했다.
몸은 이미 상당히 망가져 있었지만 말이다.
연기.
모조리 연기.
에드먼드에게 친해지기 위해서 선물도 했었고, 일부러 가끔은 어리숙한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에드먼드와 같은 인간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그저 철저하게 이용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친구같은것도 없었다.
그를 처음 찾았을 때부터, 그가 자신의 멘탈을 케어하겠다고 경찰서로 왔을 때도,
헤럴드의 눈에 비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이제 브리깃의 가주가 바뀐다. 그리고 그 가주는 너무나 여리고 순수했고
자신의 손안에 들어올 것 같았다.
그 작은 실마리에서 이어지는 틈은 분명 자신이 모든것을 내던져 부딫히면
뚫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말을 걸어오는 에드먼드와 대화를 하면서도
헤럴드의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너 이 망원경 안쓸거면 나나줘라."
"가져가려면 가져가든가. 근데, 어떻게 가져가게?"
못해도 2M 40이상의 높이인 거대한 기구였다. 무게도 필시 그에 필적하게 중량이겠지.
"모르겠다."
"나도 주려면 주겠는데 말이다. 이거 바닥에 고정된거다. 박혀있어."
"그러냐."
괜히 주제를 돌린다. 별을 보는건 헤럴드에게 있어서 참 좋아하는 일이다.
그걸 왜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별이라는게 말이지. 멀리서보면 참 예쁜데, 반짝반짝하니 예쁜데 말이야, 꼭 가까이서 보면 그냥 둥그런것들이 구멍 숭숭난 그런것들이란 말이지."
"그렇지. 아무래도."
"그런데도 내가 별을 보는 이유는 그거야.내가 거기 있는게 아니거든."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것. 그리고 진실을 알고 나면 한없이 추해보이는 것.
그럼에도 닿지 못하는 자신을 후회하게 만드는 것.
그에게 별은 미련일 뿐이었다.
미련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늘 한날 한시도 잊지 못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건 또 무슨소리야?"
그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헤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두운 모습을 적어도 이 모자란 도련님께는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다고.
"맨날 붓이나 붙들고 있으니 모를법도 하지. 그러니까말야. 나는 저 별을 모르잖아.
멀리 떨어져있으니까. 그러니까 호기심이 생기는거고 그러면서 애정이 생기는거고.
결국엔 뭐, 정드는거지. 한번 그러고 나면 신경쓰여서 또 찾아보고.
내가 저 별의 입장이 아니고, 또 저 별이 손에 잡히는 구슬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거지. 이 낭만을 니가 알아?"
말을 하다보니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순간속의 인연들이 자신을 웃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나는 그냥 모르고 살련다."
"그래. 이 별같은 새끼야."
담배연기는 짙게 흩어진다.
"선택이 문제가 아니야. 생존이 문제지."
"어느것도 각오하지 못한거지. 더 깊이 말하면 너는 그것들보다도 너 자신이 두려운거야. 너도 모르는 너 자신이."
"그럴리가? 아니. 너는 에드먼드로 끝나게 되어있다. 네가 6귀족의 명예와 긍지높은 브리깃이든 그냥 멍청한 화가든 너는 결국 에드먼드 브리깃으로 끝난다. 너의 아버지도 그랬듯이."
모든 문장이 스스로에게 뱉는 말이었다.
헤럴드는 결국 헤럴드일 수밖에 없다.
상황을 바꿀 수 없었고 후회할 뿐이며 결국 그마저도 두려워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남자들이 성으로 모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헤럴드는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으로 발송된 초대장을 훔쳐 시내로 떠났다.
경찰서에는 출근하지 않았다. 더는 갈 이유도 없었다.
모든걸 스스로 버렸다.
소중한 것은 스스로 죽였다.
그래서 그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명의 남자가 있었다.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었다.
알리고 싶었던 것을 알리지 못했고
결국 현실에 타협해버렸으며
이제는 스스로마저 망가뜨렸다.
그래서 그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둘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버크레이엄 궁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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