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블러디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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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국으로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건 말이야...
정식으로 국경이 개방되기만 한다면 그녀에게 거리낄 것이 없다는 이야기라고.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대책없이 국경을 열어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대책 없는 계획이라면 난 빠지고 싶은데."
"하지만 샤인, 잘 생각해보세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동시에 기회라고요.
우리가 그 무령님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미리타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이익을
거기서 뽑아낼 수 있는 거라고요."
"진정해 마카. 흥분해서 머리에 피가 몰렸잖아."
두 명의 여성이 그렇게 대화하는 와중에 문이 열리고 노인이 하나 들어왔다.
노인은 들어오자마자 책상 위에 두꺼운 서류를 차례로 올리며 말했다.
"기어이 그 마녀가 2주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국경을 열어젖히고 말았습니다.
교국으로서는 유래없는 큰 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국의 근간은 신성력이고 신과 이어져있다는 정통성에서 오는 것인데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성수 제조공정을 포함해서 우리가 이제껏 교국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발각될 겁니다.
이 경우에 우리가 신성의 이름을 빌려 해왔던 모든 일들의 명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실 썩 내키지는 않아. 그런 턱도 없는 계획을 돕는다는건.
알다시피 나는 돈 때문에 하는 거니까. 도끼는 나 말고 다른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거고.
사실 돈이 아니면 성희라는 자리에 그다지 미련이 남는 것도 아니니까.
누구 좋으라고 교국 소속도 아닌데 내가 여기 끌려와서 이러고 있는지."
그 말에 노인은 움찔 손을 떨고 말했다.
"그 발언, 분명 파장을 몰고 올 겁니다."
"여기 보는 눈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솔직히 일이니까 하고는 있지만 나도 교국이라고 하면 쌓인게 많으니까."
노인은 조용히 손가락을 하나 치켜들었다.
"그럼 이번 건이 무사히 끝나게 되면 사성의 처우에 대해 재고해보는 안건을 올려보지요.
아마 그렇게 되면 교황께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실지 모르잖습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성희께서 그만한 성과를 올려주셔야겠지만요."
샤인은 말 대신 귀고리만 만지작거리며 살짝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했다.
"그래서, 우리쪽 계획은 어떻게 되는데? 우리 지금 베르가모트도 전선 이탈중인거 알지?
사실상 젤라토도 연락이 안되고 있고. 지금 전력으로는 미리타엔과 전면전은 불가능해."
"전면전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선은 사태를 수습하면서 교황님의 명을 기다리는 거죠."
"이 나라는 왕이 장식이네. 찬밥신세도 이것보단 뜨끈하겠어. 이것도 교황, 저것도 교황.
그렇게 죄다 교황만 찾으니까 일이 이 모양이 돼도 수습이 안되잖아.
교회에 모든 권력이 너무 집중되어있다는 생각을 한번도 안한거야?"
"그만하시죠. 신성 모독입니다."
둘의 앞으로 둥글게 떠오른 마력의 구슬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손가락을 그에 맞춰 돌리고 있는 마카가 둘 사이를 말렸다.
"그만, 둘 다 우리끼리 싸워서 좋을 게 없어요.
지금은 앞으로의 계획을 먼저 찾아야 하는거 아니었어요?"
잠시 침묵하던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연구소를 포함해서 각종 교회와 관련 시설들을 커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워커 제라드. 그 자가 다 망쳐놓고 있습니다. 두 분이시라면 어떤 이야기인지 아시겠지요.
그 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데 주력하고 있어요.
교회에서는 그를 막아내기 위해서 따로 인력을 파견했지만,
사건은 또 다른 사건으로 덮어야 하는데, 그럴 사건을 매번 터뜨리기도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에 차라리 국경을 개방함으로서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자 한 겁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지만 말해. 짜증나니까."
샤인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건 없습니다. 그저, 마녀와 싸우게 되면 다시 연락을 드리지요.
그 전까지는 사실 도끼로 해결할만한 일은 없으니까요.
영기술은 필요할지 모르지만요."
"그래? 그럼 알아서들 잘 해봐. 그리고 다음부터는 시킬 일이 있을 때만 불러.
매번 사성이라고 싸잡아서 집합시켜놓고 사람 병풍 세우는 것도 아니고 뭐야 이게."
"참고하겠습니다."
샤인은 그렇게 방을 나갔고 노인은 조용히 옆에 있던 잔에 차를 따라 마시면서
마카를 바라보았다.
"그럼 성연께는 미리 사전에 연락드렸던 대로 성수의 부재를 충당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신성을 가장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영기술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체가 어렵습니다."
"신성 가장은 알겠는데 어디서 하라고요?"
노인은 가져온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그 리스트입니다. 장소와 용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일처리를 해야 할지도 적혀 있죠.
우선 성제와 성신을 운용하지 못하는 지금은 내실을 다지고 피해를 수복하는데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기야 하겠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않아요?"
"중요한게 아니다?"
"미리타엔에서 공식적으로 무령이 넘어와 버렸다고요.
지금 국가의 상황을 어떻게 통제할 생각이에요?"
"그건 분명 난처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나름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마녀를 막을 수 없다면 마녀가 이곳으로 올 여유를 주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여유를 주지 않는다고?"
"지금 마녀가 없는 미리타엔의 연구소는 가동에 분명 한계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연구소를 치는 겁니다.
이럴 줄 알고 사전에 미리 노예와 섞어 교국의 훌륭한 모험가들을 미리타엔에 잠입시켜 뒀습니다.
그 연구소를 탈추하고 물약을 시중에 유통하게 되면 통제가 되지 않는 연구소로 인해
미리타엔은 혼란에 빠질 겁니다. 더불어 그곳에서 마녀의 연구 성과를 훔쳐올 수도 있겠죠.
어디까지나 운이 좋다면 말이지만요. 하지만 신성력은 결국 선의와 이어지는 것.
신의 자비를 명목으로 내세우고 행해지는 선행에 그들은 신성력이 부족하더라도
결국 신에게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늑대를 풀자는 건가요?"
"풀자는게 아닙니다. 이미 풀린 거죠.
미리타엔은 그 내부에서 흔들어야 합니다.
그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선동하는 겁니다.
과거 미리타엔에서 있었던 유성혁명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교국은 이를 주시했습니다.
콜로세움. 그곳에 갇힌 노예들을 해방할 수 있다면 이는 곧 폭동을 가속화시킬 겁니다."
"그럼 그들은 어쩧게 컨트롤 할 생각이죠?"
"그러기 위해서 엠페레스에서 지속적으로 마약의 유통을 담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엠페레스에서 미리타엔까지 해로를 이용하는 늑대들이 과정 중에 미리타엔의 마약을
모두 가져다 나르게 될 겁니다."
"마약으로 조종하겠다고?"
"중독성이 높고 의존성이 높으면서 소량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제공하는 물품은
금전보다 우월한 효과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약에도 한계가 있ㄴ... 설마..."
"네, 바로 그 설마입니다. 페마르처럼, 교국의 마약은 마력을 가진 성수를 원재로 합니다.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맛을 들이면 빠져나오지 못하죠."
"하아.... 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는 침묵했다.
미리타엔에서 마약이 불법이었다면 연구실에서도 마약이 반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콜로세움의 비윤리적 사상을 허가하기 위해서 미리타엔에서는 이를 국가가 나서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영향권에 노예는 없으리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양심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소수가 정의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마약의 구매에 필요한 금액을 충족시키지 못할 하위 계층의 인간은
유통이 아무리 원활하더라도 마약을 구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디서 이런 계획을 가져온거에요?"
"에그니아라고 아십니까?"
"엠페레스의?"
"그 남자의 유효한 장사 수단입니다.
정확하게는 코탈이었죠. 에그니아는 미리타엔에서 분화되었기 때문에
불법적인 요소를 잘 알고 다루는데 정평이 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제껏 왜 우리는 시도하지 않은거죠?"
"간단합니다. 이미지 장사라는게 그런거죠.
솔직히 말하면 이번 마약 관련 사건에도 우리는 끼지 않아요.
모든 책임은 늑대들이 집니다.
우리가 보낸 모험가이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통제하고 있지만
사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험가는 길드 소속이니까..."
그 말뜻에는 분명히 '사성을 포함해서'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카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으니,
이미 제국에서 마약은 너무나도 상용화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에리아와 플로라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에라옥신이 미리타엔 전역에 퍼져 있었고
플로라는 이미 이들이 제시한 안건으로 제국 내의 노예를 통제하고 있었다.
게다가 원초적인 문제점이라면 마약 외에도 기계 개조 및 유전자 조합을 통해서
제국의 노예들은 이중, 삼중으로 통제되고 있었던 점이었다.
제국의 외통수를 짐작하고 있던 교황은 그들에게 무엇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앞으로 당당히 찾아온 여자를 마주보았다.
"기어이 이곳을 찾으셨군 마녀."
"꼭 부숴주고 싶은게 있어서 말입니다."
"담이 상당히 좋군? 그런 일을 당하고도 다시 내 앞에 고개를 치켜들고 올 거라고는
차마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어떻게든 도망다녔던 모양인데,
그래 그것도 몇년 전까지의 이야기였나?
지그은 다시 내 앞에 섰으니 말이지. 미리타엔이 언제까지 널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날 아는 것처럼 말하는데, 만난 적이 있었나?
허세가 상당한데 교황. 그 낯짝에 웃음기를 쫙 빼내줄게.
지금 교국에 과연 날 이길 정도로 힘이 남았을까?
지금은 인사차 방문한거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웃으려나?"
"넌 아무것도 모르는군. 말해줄 의리는 없겠지."
그렇게 말하고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걸음씩 에리아의 앞으로 걸어온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얼어붙는 다리를 보면서
에리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메리..."
블러디 메리. 교황 메리의 별칭이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머리 속에서 피어나는 감각이 불쾌하게 에리아의 머리를 때린다.
어린 아이였던 에리아를 속박하고 고문을 자행했던 그 당시의 교회에서
단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 괴이하고 불쾌한 웃음을 한가득 품은 채로
메리는 그녀를 마주했다.
에리아의 손이 멋대로 떨렸다.
"그래, 잘도 우리 사업을 방해해 주셨다고.
미리타엔에서 바로 출발한 행동력도 그렇고, 엠페레스에 침투해서
우리 국경을 2주도 되지 않는 시간에 열어젖힌 것도 그렇고.
여러 모로 예상을 뛰어넘는 괴물이라 다행이야.
공공의 적은 그런 괴물이 좋으니까."
"사업? 정신 차리시지."
"사절로 이 나라에 발을 들인 이상 허가하지 않은 곳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너에게 휘둘릴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겠지.
어디까지나 귀빈 대접을 받고, '사절'이라는 입장에서 내게 인사까지 온 마당에
뭘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는 좋은 방을 내주는 것 외에 무엇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다.
국경은 개방했지만 국가 요소 하나하나까지 개방하지는 않았으니까."
"뭐..."
"아, 나도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약속할 수 있다.
이쪽도 나름 신을 믿는 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지.
3주다. 딱 3주간 밖으로 출입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시설을 개방하겠다."
"시설을...?"
"그 전까지는 외지인은 물론이고 자국민의 접근까지 제한하면 그만이다.
국가 기밀을 그리 간단히 들킬 수야 없지.
신망이 떨어지고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져도 국가의 존속이 먼저인게 당연하다."
까득 이가 갈린다.
"그럼 하나만 묻자."
"무엇이든."
"넌 어떻게 살아있는거냐? 불로불사인 인간은 아르간티아 뿐일텐데."
"그것이 신성이다."
에리아의 손이 떨렸다.
"신성... 대체 이 국가는 누구를 신봉하면서 신성을 논하는거야...
아르간티아의 신성은 여기 없어!"
"좋을대로 생각하도록. 질문은 하나만 묻는다고 했다.
네 스스로 말한 일이다. 대답은 없을 것이다. 방은 내 주지.
추기경을 따라 나가도록. 숙소를 일러줄 것이다."
그리고 연락을 취하러 간 건지 사람 하나가 달려나가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천천히 등장했다. 노인이었다.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노인의 옆으로는 마카 다미아가 있었다.
"이거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추기경 이크사르토스라고 합니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에리아를 향해 비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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