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 블러디 메리
* * *
"이제야 각자 맞는 상대가 생긴 것 같군요."
게비디가 그런 소리를 했다.
"미쳤어? 내가 이 꼬마랑 동급이라고 생각해?"
성질을 제대로 긁힌 엔시온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나름 성신이면 훌륭한 상대 아닙니까?"
엔시온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야, 그렇댄다. 어떻게 생각해?"
이제 체면이나 품위같은건 아예 내던진 그녀가 베르가모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상관 없어. 오늘 그 창을 받아갈 수 있겠네."
"100만년은 이르다고 말한지 얼마나 지났더라?"
"아 거 시끄럽네. 아가리로 싸워? 지랄 말고 창들어."
"그래, 아직 못 배운게 많이 있다는걸 알려 줄게."
게비디가 그 둘을 바라보면 엔시온이 말했다.
"이 싹바가지 없는 아이는 내 제자라고. 스승이 제자한테 질 리가 없지."
그렇게 말하며 매끄럽게 창을 돌려 모든 공격을 막아낸 엔시온은
차분하게 허점을 노려 꾸준히 피로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그건 또 몰랐던 사실이군요."
베르가모트는 성질이 오르는 것 같이 매섭게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내가 누차 말했을텐데. 창은 휘두르는 무기가 아니라고.
리치가 길다고 해서 위력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단조로운 무기가 아니야.
그러려면 도끼를 쓰라고. 아니면, 나처럼!"
휙 하고 뛰어오른 엔시온은 베르가모트의 뒤를 노리며 십자창을 휘둘렀다.
창은 베르가모트의 창을 막으며 동시의 창을 들고있던 어깨를 찍는다.
"미늘창을 쓰던지."
"아악!"
확연한 차이.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성신의 공격이 단조로워지는 유일한 상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단조로워진 공격은 절대 엔시온에게 닿지 않는다.
"멍청이도 아니고, 진짜 고작 두 명이서 미리타엔을 엎어 보겠다고 찾아온건가?
진짜 너무 실망스러운데? 난 적어도 유레크로스 정도는 구워삶아서
설욕전이라도 하겠다고 우르르 몰려오게 만들 줄 알았지."
엔시온은 그렇게 말하고 창을 돌린다.
피터는 눈빛으로 엔시온을 지긋이 바라보고 말한다.
"그건 제 판단입니다. 둘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지간히 만만해보였나봐?"
"어차피 승산이 없다면 죽을 인원을 최소화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호오? 이길 생각도 없는데 무작정 들어오셨다?"
창을 길게 늘어뜨린 엔시온이 피터를 향해 창날을 향하려고 하면
즉시 같은 보폭으로 달려들어 그 창을 막아낸 베르가모트는 엔시온에게 지지 않으려는 것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습관은 하나도 못 고쳐놓고 이제와서 내게 이겨보겠다는건가?
내가 맨 처음 가르칠 때도 지적했던 부분인데.
머리로 피가 몰리면 공격이 단조로워진다고.
창은 절대로 잘 싸우는 이를 위한 무기가 아니다."
"지겨울 정도로 들었거든. 거리를 계산해라, 상대의 공격을 흘리고 공격할 수를 찾아라.
빠르게 공수를 전환하고 긴 리치를 십분 활용해라. 귀에 딱지앉겠다고."
"지겹게 말해주면 뭐하나? 알아들은 티가 안나는데."
쾅 소리가 난다.
어느새 변한 엔시온의 무기가 베르가모트의 창안쪽으로 파고들어
베르가모트의 어깨를 찔렀다.
베르가모트가 늦게 반응해보지만, 이미 늦은 방어는 어깨에 찍힌 창을 밖으로 쳐낸 수준이었고
덕분에 소리가 화려한 데 비해서 움직임이 커 후속타를 허용했다.
꾸드득 소리가 이어 난다.
억지로 창을 붙들어 잡아당기고 있었다.
"엔시온... 그래서 니 시나리오에 이것도 있었냐?"
어깨에서 그대로 팔까지 박힌 채로 찢긴 창을 잡고 몸쪽으로 당기는 베르가모트의 얼굴은
잔뜩 독기가 올라 있었다.
엔시온은 늘 수비적인 싸움을 해 왔다.
자신에게 피해가 없는 방향을 유도하며 상대에게 치명상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다치지 않을 방식을 택했다.
그를 위해서 언제나 최강의 무기와 최고의 갑옷을 챙겨 전장에 나섰고,
늘 비장의 수단은 남겨뒀었다.
하지만, 그 수를 아는 상대가 나타났다.
실력적으로는 압도적인 우위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이 직접 전장에 서지 않는 엔시온의 근력은
스스로 전장을 찾아다닌 베르가모트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꺄악..!"
결국 그 창에 쓸려 손에서 멀어지는 창을 엔시온은 가까스로 끌어잡았다.
손바닥이 쓸렸다.
억지로 팔과 허리에 힘을 주고 창을 돌려 휘두른다.
물론 그걸로 공격할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 팔이 모두 묶인 상황은 위험했다.
"게비디! 도와줄 수 있어?!"
"조금만 기다릴 수 있나? 난 어려울 것 같은데."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고..!"
게비디 역시 고전중인 것은 같았다.
나이차와 종족차의 한계는 뛰어넘을 수 없어 피터가 게비디에게 밀리는 것은 있었지만
게비디는 진심으로 이 남자가 전성기였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같은 분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닥쳐라! 더러운 악마놈!"
대화가 유지되지 않는다.
팔에 힘을 주고 억지로 앞으로 발을 딛어 밀기 시작한 게비디는
조금씩 상대를 압도해나갔다.
무거운 체중으로 밀어나간 끝에 겨우 피터의 등이 벽에 닿았다.
"잡았다..!"
게비디가 신장차를 이용해 그대로 거리를 좁히며 위에서 아래로 찍어누를 작정으로
그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노인의 신장은 150정도로 보였다.
2m가 훌쩍 넘는 자신이라면 이점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옷을 찢고 싶지는 않았는데..."
뿌드득 소리. 그 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제라도 팔을 놓으려고 한 게비디의 손이 꽉 붙들려 풀리지 않았고
노인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말려있던 허리와 접혀있던 흉근이 펴지며 팔에 잔뜩 선 핏줄은 경이로웠다.
"대체 그 연세에 어떻게..."
192cm. 방금 전까지 한없이 낮았던 노인의 키는 그렇게 성장해 있었다.
흰 머리로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난다. 주름에 덮혔지만 분명히 증오에 덮인 눈.
게비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벅차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런 경우는 없었을텐데도.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누구도 나를 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꾸득. 꾸드득. 몇 번인가 근육이 꿈틀대면서 나는 소리가 이어진다.
순간순간 노인의 몸이 점점 풀리는 것 같이 강해지고 있었다.
게비디는 이제껏 수많은 사람의 끝을 봐 왔다.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약물로 추구하는 근육의 끝에서 종종 발견했던 모습.
뒷 일은 고려하지 않고 사력을 짜내는 모습이었다.
"죽어야 한다. 너희는 신벌을 받아야 한다!
내가 그 심판을 대리하겠다!"
"그 신이 땅을 내려다보기는 하시오?"
게비디의 질문에 피터는 단언한다.
"그분이 내려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올려다보고 추앙하는 것이지!
이 더러운 것을 그분이 신경쓰시는 것이 아니라! 이 더러운 곳에서마저 우리가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푹.
노인의 다리에 힘이 풀린다.
주르륵 미끄러지듯 그가 주저앉는다.
그 뒤로 검붉은 피가 흐른다.
바닥을 적시는 피는 명백히 노인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단검을 받아넣은 킬레리가 있었다.
"정말 신이 모두를 구하는 선인이었다면 킬레리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겠죠.
당신이든, 신 자신이든. 어느쪽이든 신이 우리에게 웃어주는 일은 없겠지만."
노인은 그럼에도 눈을 치켜뜨고 힘을 밀어올렸다.
"이런 더러운 자들이...!!"
피터는 게비디를 억지로 밀어내고 팔을 위로 꺾어올렸다.
"킬레리, 처리해라."
킬레리가 단검을 들고 피터에게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화려하게 울려퍼지는 총성과 함께 바닥에 초라하게 쓰러진 킬레리는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참 선생님 그렇게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라니까요."
"하여튼 말도 어지간히 안듣는구나..."
"애들 보라고 해놓고선 언제 또 그렇게 혼자 가셨습니까?"
"끄응..."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네요. 그렇게 힘든 상대입니까?"
"보고 있지말고 너도 도와라! 신께 대적하는 존재들이 이 거리에는 너무나 많다!"
"스승님, 시대가 변했다니까요. 아직도 이단에 집착하시면 안되는 겁니다."
"제자라고 하나 있는 녀석이 스승한테 대들기나 하고 말이야..."
"하기사, 저 아니면 누가 도와드리겠습니까?"
제임스는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까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게비디를 바라보며 묻는다.
"이 여자분께는 죄송합니다만,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요.
저한테는 아버지 같은 분이시거든요."
"그런가. 그럼 아버지께 빨리 이 땅에서 나가자고 대신 말씀드릴 수 있겠나?"
"그건 또 어렵습니다. 저희가 괜히 여기까지 넘어온게 아니라서요."
"골치아프게 됐군."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면 열불이 터지는건 엔시온과 베르가모트 뿐이었다.
"싸우다말고 뭘 정답게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게비디!!"
"아가리로 싸우는 새끼들만 한바닥이네!"
게비디와 피터가 서로 쾅 하고 맞부딫히고 뒤로 물러난다.
거리는 약 2m정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다가 게비디가 말했다.
"그래서 고작 세 명으로 이 나라를 전복시키겠다는 말인가?"
"세명이라뇨? 다른데요. 제가 늦은게 그냥 놀다 온건 아니라서요."
게비디는 흠칫 놀라며 무전기를 들었다.
그제서야 쓰러진 킬레리가 눈에 들어온다. 깔끔하게 머리에 바람구멍이 난 상태.
하지만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었다.
이자리에 온 킬레리가 고작 하나라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킬레리들, 현상 보고하도록."
"연구소 앞에 교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수행사제들과 광신도들이 연이어 습격중입니다.
블러드 엘프들이 버티고 있지만 수가 물밀듯이 끊이지 않습니다.
거리에 있는 노예들중 상당수가 그 무리에 합류중입니다."
"이길 수 있나?"
"현재 상황으로 승률은 30% 미만입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현상대로라면 2시간이 최대일 것으로 보입니다."
"알겠다."
게비디는 무전을 끊고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유능하군."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며 제임스는 탄창을 꺼내 총알을 새로 재워넣었다.
그리고 입 안에 있는 사탕을 까드득 깨물어 부수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덕분에 머리가 아프네. 이쪽은 지금 수비적인 입장밖에 선택지가 없거든."
"저도 사실은 이런 곳까지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쩌겠습니까.
교인인지라 상부에서 까라면 까야 하거든요."
"그 말은 아직 여지가 있다는 말이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명분만 없애 주십쇼. 그럼 손 털고 돌아가겠습니다."
"거기 널브러진 내 부하 건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간단히 조사는 끝낸 상태입니다.
킬레리라고 하셨죠? 추후에 적당한 값으로 보상하겠습니다."
"교인이라는 자가 그렇게 말해도 되나?"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이죠. 저 킬레리는 수명이 반나절도 안 남지 않았습니까?
제가 아니었더라도 3시간 정도가 한계였겠죠."
"눈치가 빠르군?"
"여기서는 서로 체면을 살리는 쪽으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자네들은 어디로 갈 생각이지?"
"사실상 여기서 두분의 발은 묶었으니 이제 본대로 합류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순순히는 못 보내주겠군."
"선생님대신 제가 상대해도 괜찮겠습니까?"
"상관 없네."
승낙이 떨어지자 마자 제임스는 곧장 면전에 총을 쏴버린다.
게비디는 양 팔로 얼굴을 막았지만, 총알이 팔에 박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총알을 막아내고 접근해서 그 복부에 주먹을 박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주먹은 배에 닿지 않는다.
제임스는 생각보다 너무 날렵했다.
분명 힘은 저 피터가 훨씬 강할 터였다.
하지만 이 기동성은 무시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둘이 그렇게 치고받는 와중에도 엔시온과 베르가모트는 싸우고 있었다.
엔시온의 창은 빼앗겨 베르가모트가 들고 있었고,
반쯤 잘려나가 길이가 짧은 창을 어떻게든 들고 버티고 있는 엔시온의 싸움은
둘의 실력차로 인해 어떻게든 반반을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그마저도 베르가모트가 창의 위력을 다 끌어내지 못하는 탓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마 확실히 질 것을 두 명 다 알고 있었다.
"이쪽에도 전력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2대 3은 불공평하잖아?"
엔시온이 그렇게 말하며 창을 쳐내면 게비디 역시 피흘리는 팔로 총을 막아내며 말했다.
"일단 이쪽보다 상대의 무기가 훨씬 좋은 것도 감안해서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전투복이라도 입고 올 걸 그랬군. 고작 둘이라고 방심했더니."
그 말에 제임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 능청스레 말했다.
"봐주세요. 이쪽도 전투복 같은건 없잖습니까."
"그것도 그렇구만. 멋이 없는 말을 했어."
다만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베르가모트가 질색하며 말했다.
"병신들. 저러다 사이좋게 골로 가지 뭐."
"우리쪽에서는 더 부를 사람 없나? 이대로라면 질게 분명한데...!"
"여기서 죽어 엔시온!!"
대공들이 그렇게 근소한 차이로 밀리고, 결국 엔시온의 창이 한번 더 잘려나가며
단검 정도의 크기가 되어버렸을 때, 엔시온은 결국 거리를 벌리다 갑옷에 창을 맞고
뒤로 굴렀다.
그녀가 결국 무릎을 꿇은 그 순간에 상황을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야옹"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