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블러디 메리
* * *
버르너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제인지 주교인지 모를 이들을 떨쳐내고 흙 골렘을 위로 높이 올렸다.
그리고 별 수 없이 인식저하 마법을 걸어야 했다.
나와 버르너에게까지 마법을 다 걸고 나서 몰래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골렘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으니 아마 내가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질 때 까지는
그 자리에서 계속 사제들을 유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이에 우리는 조금 더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교국의 방식에 곧이곧대로 맞춰줄 수는 없었다.
내게 제약을 걸 수 있는 몇 안되는 방식으로 나를 구속할 생각인 것 같은데,
이쪽도 속이는 방식을 택해야 했다.
"그... 혹시... 저... 지금 짐덩이인가요...?"
버르너가 그렇게 물었다.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일단 스스로도 인지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이제 좀 날 따라줄래요?"
"네..."
"긍정적인 건 좋아요. 하지만 상대는 이쪽을 믿을 생각이 없다고요."
"네..."
나는 그를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한층 더 충격적인 장면을 발견했다.
마을에 있는 여성들이 하나같이 금발이었던 것이다.
"버르너, 원래 이 마을에 금발이 있나요?"
"있기는 해도 이정도는 아니에요..."
모종의 마법이거나, 금발을 다른 구역에서 강제로 끌어왔다고 생각이 들었다.
치밀한 수였다.
아직 우리가 골렘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아래에서 함정을 하나 더 늘린 모양이다.
나는 괜히 버르너를 돌아보고 물었다.
"버르너, 물어보고싶은게 있어요."
"네?"
"교회에 속한 이유가 뭐에요?"
"그게 무슨 의미죠?"
"교회에서는 당신을 버림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분명 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디가드가요?"
"네..."
"그렇게 따지면 교회에서는 당신의 가치조차 제대로 책정하지 못했다는 말 아닌가요?"
"...."
"기분나빠도 어쩔 수 없어요. 잘 새겨들어요.
그렇게 듣기 좋은 말로 당신을 이용했을 뿐이니까.
그 결과로 여기 떠밀려서 죽을 뻔 했죠.
잘 생각해요 정말 저 사람들이 당신의 가치를 제대로 봐 주고 있는지.
그게 정말 행복하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정말 원하는게 그게 아니라면,
지금 말해요. 지금 정도라면 내가 한 명 정도는 더 구제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교회는 제게 모든 것이었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교국에서..."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당신 스스로가 이 상황에 만족하고 있느냐는 거지."
"절 인정해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런 건..."
"그런건?"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해요..."
"현실을 직시해. 교회에서도 당신을 인정해주지 않아요.
내가 적어도 몇갑절은 더 교회에 얽혀본 사람으로서, 교국은 이미 교리가 어긋나 있어."
"어긋났다고요?"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들이 늘어가고, 결국 중심을 잃어버린 겁니다.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뭐죠?"
"....."
"모르는 것 같으니까 말해드리죠. 사람들이 의지할 곳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있나요?"
"....."
툭 하고 바닥에 눈물이 떨어졌다.
"정말 교회가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행복인가요?"
"아...아니요.... 저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절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있었는걸요...
사랑받기 위해서는 이래야 했어요... 모두 희생을 아름다운 거라고 했어요...
왜 그 숭고한 걸 이해하지 못하냐고 말했어요...
무서웠어요..."
가스라이팅이다.
어린 아이에게 반복적으로 세뇌에 가까운 가스라이팅을 지속적으로 가해서
스스로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든 셈이다.
"그럼 뭘 하고 싶어요?"
"여행을... 가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마을을 벗어나서 생각해보죠."
"네..."
그제서야 그는 내게 제대로 길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는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정말 오랜 시간 세뇌를 당한 어른은 그 사실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아도
스스로 진실을 깨닫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알아온 모든 사회가 잘못된다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 되면, 자신이 이제껏 해온 일들을 모조리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더 희망을 걸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혹시 다른 이야기는 들은 것 없나요?"
"없어요... 저 그냥 보디가드 역할만 충실히 해내면 된다고... 자질이 있다는 소리만 들어서..."
"그렇군요. 그럼 역시 그 이크사르토스가 지시한건가요?"
"네..."
나는 차분하게 거리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우선은 요즘 제일 시끄러운 연구소를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았다.
분명 교국의 연구소는 실마리가 될 테니까.
"그럼 혹시 교국에 있다는 병원은 어디 있나요?"
"병원이요...?"
"네. 얼마전에 불탔다고 들었는데요."
"아니에요! 불탄건 연구소라고요. 병원은 없어요."
그 순간 빛이 보였다.
내게 던져준 이 짐덩이는 사실 이 상황을 뚫을 돌파구였다.
너무 순수한 방해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이런 쪽으로 내게 입을 열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리라.
"거기로 가죠."
"아, 거기라면 저쪽이에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쁜 것 아니셨나요?"
"그렇다고 뛰어버리면 더 티가 날 거에요. 이제 슬슬 골렘도 무너졌을 거고요."
"골렘이라면 아까 그 괴물인가요?"
"네. 그런거죠."
"그런데 그 연구소는 왜 가려고 하시는거죠?"
"그냥 개인적으로 알아볼게 있어서요. 그런데 연구소를 잘 아나봐요?"
"저희 형이 거기서 일하고 있거든요! 멋진 형이에요! 비록 아버지께 인정받지는 못했지만요!"
"형...?"
"네! 저희 형이요!"
마카 다미아가 한번도 자신을 장녀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차녀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분명 그 남자가 장남일것이다.
연구소에서 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형이라면 첫째를 말하는 거겠죠?"
"네! 자랑스런 형이에요! 큐로드 다미아라고 해요! 제국 과학을 10년치 진보시켰다고 했어요!"
"제국의 과학이 10년치 진보... 과학이... 진보..."
이유는 몰랐다.
"그럼 형님은 교회 소속은 아니었다는 건가요...?"
이상하다. 교회에서 연구소를 책임진다는 점도, 그리고 과학이라는 주제도.
나는 말을 삼키고 우선 그가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이미 주변은 통제되고 있었고, 사람들이 함부로 안쪽을 바라보지 못하게
바리게이트가 두둑하게 쳐져 있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는건 어려울 거에요."
"그렇겠네요."
"왜 들어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런 것도 제대로 안내받지 않고 제 보디가드를 자처했군요."
"죄송합니다..."
"교국을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ㄴ...네에...붑!"
나는 그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소리가 커요."
"하지만 이미 불타버린 연구소에서 대체 뭘 찾으시려고요?
이 안에 들어가는 것 부터가 고비잖아요.."
"그건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일단은 주변에서 단서를 더 찾아볼 생각이에요.
그러고 난 다음엔 분ㅁ..."
말이 끝나기 전에 북서쪽에서 쾅 소리가 나며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섞였다.
"잡아! 에스트로다!"
"도망쳐! 시발 잡히면 다 죽어!"
"팔라딘들 앞으로! 전열을 갖춰라! 밀리지 마!"
에스트로? 그 이름이 들렸다.
그리고 곧 우왕좌왕하던 인파가 벌어지며 사람들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다.
연구소 앞을 지키던 인원은 상부에서 명령이라도 받은 것인지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노려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떠난 이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그 앞에 거대한 벽을 치고 이곳에 들어가 틀어박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 위치를 에스트로에게 알려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 사이에 강철로 세워둔 벽 사이로 내부로 진입했다.
아무리 인식 저해를 걸어둔다고 해도 주변에서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발견하더라도 그게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가방에서 발화부를 꺼내 외벽 곳곳에 붙였다.
이거라면 나라고 의심받을지도 모르지만 확증은 남지 않는다.
발화부는 불에 타서 제일 먼저 사라져 없어질 테니까.
그리고 그 불이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우그러뜨린 철벽을 다시 닫는다.
에스트로의 소동, 그리고 내가 만든 화재. 분명 시야를 돌리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아마 그게 내 짓이라는 건 금방 발각되겠지만.
나는 일부러 연구소 안쪽으로 발을 뻗었다.
완전히 소실된 것 같은 방들 사이로 연구소의 잔해가 보였다.
부서진 실험기구, 망가진 기계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것들은 전부 불타 검댕이 묻어있었다.
"이렇게 다 망가져있으면 뭘 알아보기도 힘들겠어요.
분명 형이 하고 있는 연구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는데,
아이들은 무사할지 모르겠네요."
"아이들?"
나는 그 말에 바로 마력을 둘러 주변을 조사했다.
분명 생명의 흔적이 미미하게라도 남아있을테니까.
확실한 것은 없었다. 살아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뼈나 시체도 없었다.
하지만 생명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바닥에... 뭔가 있어..."
거의 다 타서 잔해와 잿더미 속에 깔린 것.
뼈도 아니었고, 물건도 아닌 것 같은 마치 말린 고목과도 같은 것이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치 아직 자신이 이곳에 남아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이.
"그거... 화분이네요."
"화분...?"
"연구소에 꽂혀있던 걸 봤어요. 어릴때 형이 견학시켜준 연구소의 화분이에요.
둥근 유리통 안에 들어있어서 매번 자동으로 물도 주고, 호스로 이어서 영양제 같은 것도
주입하는 모양이에요."
나는 그 나뭇자기와 같은 것을 들었다.
끝에서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불에 타 오그라들어 말렸다.
마치 고사리와 같은 느낌이었다.
딱딱하고 말라서, 푸석푸석한 질감마저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느껴지는 것은 왠지 모르게 이것에서 익숙한 느낌이 난다는 것이었다.
익숙함. 어디서 느꼈던 걸까.
자신도 모르게 거기 불어넣은 생명의 마력.
주변을 조사할 목적이었지만 멋대로 스며든 그 마력에서 느껴지는
어딘지 모를 느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방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삐삐...?"
"삐삐꺼!"
가방 문이 열리고 삐삐가 쏙 튀어나왔다.
한쪽 손을 위로 쭉 뻗고 마치 영웅이 출현하는 것 처럼 폴짝 뛰어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죠!"
"달라고? 이걸?"
"응!"
"먹으면 안돼."
"아라떠!"
"부러뜨려도 안돼."
"아라떠!"
"불태워도 안돼."
"아라따이깐!"
나는 몇 번이나 주의시키고 삐삐에게 그걸 내밀었다.
삐삐는 그것을 받아들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닥에 콕 꽂았다.
"삐삐야! 그걸 그렇게 하면 어떡해!"
"아냐. 이케 해달래."
"뭐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삐삐는 가만히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비늘을 세우더니 순수한 마력을 뽑아내서 거기 뿌렸다.
마력이 물과 같은 형태로 비처럼 뿌려지는 광경에 나는 멍하니 그걸 볼 수밖에 없었다.
"다대따!"
삐삐가 그렇게 말하고 꺄르륵 웃는걸 보고 나는 이게 뭔가 싶긴 했지만
결국 더 조사할게 남았다고 생각하고 삐삐를 안아든 후에
그 고목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고목은 뽑히지 않았다.
뿌리를 단단히 내려박은 나무처럼 그 자리에 박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삐삐야... 너 뭐했어...?"
"자래찌?"
"...."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순간 그 나무와도 같았던 것은 조금씩 부풀어오르더니 점점 팔과 같은 형태가 되어갔다.
살이 오르고, 그 끝에 검은 비늘같은 것이 솟아오르더니 그 위를 다시 인간의 피부같은 것이 덮었다.
"이게 대체...?"
그러더니 바닥을 꾸득꾸드득 소리를 내며 파내고 기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 팔의 주인이 아래에서 기어오르는 소리였다.
잠시 뒤에 그 팔에 이어진 채로 땅 속에서 기어올라온 것은 검은 머리를 한
아주 작고 칙칙한 소녀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아이였다.
"여기는...?"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분명 저는... 제 마지막은.... 몬갈리오... 어...?"
그녀였다.
마녀로 몰려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했던 이름없는 소녀.
그리고 체헤게가 지키지 못한 소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