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블러디 메리
* * *
"당신은... 누구죠?"
소녀가 처음으로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멍하니 소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에리아. 내 이름은 에리아에요."
"에리아... 난... 난 누구... 어...?"
퍼즐이 들어맞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도 몰랐던 사람,
그리고 알수 없는 병으로 죽으면서까지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이유.
처음에는 그냥 소녀라고 생각해 나서지 않았다.
내 신변에 위협이 될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적이 변했고, 상황이 변했다.
"왜 여기 있는거죠?"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저는 분명 몬갈리오와 함께..."
"몬갈리오는 없어요. 죽었습니다. 체헤게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그럴리가 없어요..."
"글쎄요. 이게 현실인데요."
"거짓말... 거짓말이야... 나를 여기로 납치해서 대체 뭘 할 생각이에요!
당신이 날 납치한거죠?!"
"그런 짓을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진전없는 대화에 그녀가 짜증이 난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럼 왜 내가 여기 있는거죠?!"
마침내 화가 난 것같은 소녀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제일 밝은 아이였다.
"앨리쑤가 해떠!"
"엥...?"
소녀가 멍하니 김 빠진 목소리로 삐삐를 내려다보았다.
삐삐는 뿌듯한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도와달라구 해서 도와준거야! 이제 칭구!"
"아니...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칭구!"
"어...?"
"칭구 안해?"
삐삐는 서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소녀를 바라보았고
소녀는 잠시 멍하니 나와 삐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어... 그래... 친구... 하자..."
"칭구해!"
삐삐는 신이나서 양 팔을 들고 연구소 부지를 뽈뽈대며 뛰어다녔다.
그제서야 그 소녀는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일단 그럼 듣고 싶은게 있는데요. 왜 당신들은 이곳에 있죠?
여긴 어딘가요?"
"여긴 교국이에요. 교국의 연구실이고, 이곳에서 성수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마 교국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을 겁니다."
"교국... 뭔가 불쾌한 느낌이 드네요."
'그리고 아마 제 추측으로는 그 성수를 만드는데 드는 마력을 당신에게서 뽑아냈을 것 같아요."
"마력을... 뽑아낸다?"
"용의 후손이 가지는 마력을 사후에 뽑아낸 거겠죠.
분명 자연적으로 인간에게 마력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력을 추출해서 가공한 겁니다."
"그런 짓을 어떻게..."
"분명 아까 제가 본 건 팔이었으니까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알거든요.
마력이 기억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걸요.
임의로 마력과 기억을 덜어내 다른 곳으로 옮긴 경험이 있어요.
아마 당신도 마력을 추출당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었다고 보는게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그런... 나는 그럼 누구죠...?"
"아마, 지금 시대에서는 존재하면 안되는 사람일 겁니다."
"역시.... 그런가요... 확실히 제가 기억하는건 몬갈리오 뿐이에요.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것과는 너무 많은 차이가 있어서, 머리가 좀 아프네요."
이 소녀에 대해서 이제 알아내야 한다는 새로운 미션이 부여된 것 같았다.
왜 제대로 체헤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지 후회하면서도
나는 그 역시도 아마 나에게 말해준 것이 전부였을 거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스스로 알지 못해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익숙한 느낌.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아마 혼란스럽겠지.
그녀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내가 도와줄테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대체 날 왜 도와주려고 하는거죠?"
"어쩌면 우리 둘다 피해자니까요."
그 눈에 나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기색의 빛이 보였다.
삐삐가 내게로 붙어 묻는다.
"마마."
"응?"
"이상하다? 아까 삐삐한테는 이름 말해줬는데.
왜 반짝반짝하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삐삐에게 거짓말을 할수는 없다.
그러니 분명 자신의 정체를 몰라야 한다는 건데,
삐삐에게는 이름을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마 말라 비틀어져 팔만 남은 상태에서 땅에 박힌채로.
"삐삐, 저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첸쎄라!"
"첸쎄라...?"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만 갸우뚱하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첸세라가 당신의 이름인가요?"
"아니...에요... 그 꼬마는 뭐죠?"
"제 딸이에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 아이는 뭔가 달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삐삐를 경계하고 있었다.
"앨리쑤야! 앨리쑤는 칭구!"
"친구..."
그녀는 잠시 친구라는 말을 되뇌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직 머리가 혼란스러운 탓이리라 생각했다.
삐삐는 작은 마력 구슬을 만들더니 아장아장이라는 말이 꼭 어울리게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머리에 쏘옥 밀어넣어주었다.
"칭구는 도와주는거야!"
그녀는 바르르 떨며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 기억은... 나...? 내가 아니에요... 이건....
내가 하지 않았어... 아냐... 아니라고..."
억지로 부들거리는 다리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는 그대로 서서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힘이 들어 보였지만 먼저 건드리지는 않았다. 아마 삐삐가 뭘 한건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
내가 받은 시련처럼 그녀 스스로가 이겨내야 할 시련일 것이다.
잠시 기다리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렇게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녀는 뭔가가 떠오른 것 처럼 머리를 감싸안고 주저앉았다.
"꺄아아아아악!!!!"
나는 차마 손을 대지도 못했다.
버르너가 즉시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지만 일어나자마자 그녀는 버르너를 밀쳐내고
괴성을 지르며 도망쳐버렸다.
물론 나와 일행도 즉시 연구소를 나와 그녀의 흔적을 쫒으려 했지만
그녀는 어디로 증발이라도 한 것마냥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느새 막아두었던 철벽마저 기이한 힘으로 비틀려 찢겨 있었고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연구소 안쪽에서 나온 내게 시선을 모으고 있다.
이렇게나 주목을 끌어버리면 인식저해도 효과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모두에게 주목받은 사이에 깔끔하게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의 주목은 점차 목소리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마녀...다...."
"마녀가 병원에서 나오고 있어..."
"남자아이를 데리고 있다..."
"여자아이도 있어...!"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나서 내가 움직일수 없게 된 상황에
내 앞으로 휙 하고 검은 천조각이 날아왔다.
검은 천조각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 그 위로 또 하나의 천조각이 날아왔고
잠시 뒤에는 수백, 수천장의 천들이 날아와 내 앞에서 회오리처럼 말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중심에서 에스트로가 나타나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늦지 않았지?"
"늦었어."
"그럼 일단 상황부터 정리할까?"
"플로라는? 미리타엔에 피해가 가는거 아니었어?"
내가 되물으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세요. 명분은 3가지나 챙겼으니까요.."
"세...가지...?"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반네리 이모!"
삐삐가 제일 먼저 달려나가 발레리아에게 안겼다.
에스트로는 나를 보고 웃어보이며 말했다.
"원래는 두가지였는데. 네가 잘 해줘서 세 가지로 늘었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우선 첫째로, 교국쪽에서는 유레크로스와 합심해서 미리타엔을 쳤어.
그 증거도 이미 확보해둔 상태고. 발레리아가 상당히 고생했지만."
"두번째는 뭔데?"
"이미 이 국가의 부실한 요소를 대강 다 수집했어.
성수의 제조 공정부터 해서, 비리라고 할 법한 것들 말이지.
사실 두번째만 가지고는 약간 모자라다고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중요한건 셋째야."
"그게 뭔데...?"
"네가 이 폐허에서 찾아낸 여자아이 말이지."
"첸세라?"
"아니, 첼세이라야. 정확히는 보르드예프의 성자님이시지.
성녀님이 맞으려나?"
"보르드예프?"
"교국은 북쪽 국경과 맞닿은 보르드예프와 7년째 전쟁중이야.
보르드예프 측에서는 교국의 꼬투리를 잡는 순간 바로 물리전으로 진입하기로 했고.
이제까지는 물밑전을 추구하고 있었지. 하지만, 몇 백년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보르드예프의 성자.
첼세이라의 기도하는 팔이라는 유물이 사라졌어.
그리고 동시에 교국에서 마력을 고순도로 담아낸 성수를 찍어내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떤 천사 하나가 그 팔을 되살려버린거야."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닌데..."
"보르드예프는 태초의 키메라라고 전해지는 종족이야.
수인들과 반수종들이 모여사는 지역이지.
초기의 마녀들이 마녀사냥을 피해 정착한 구역이거든.
그곳에서 만들어진 후계들이라고."
"그렇다는건..."
"그래, 네가 되살린 소녀는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당시에 마녀들을 규합해서
보르드예프에서 성자로서 존재했어.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약 260년 정도를.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어. 오히려 교회가 그녀를 추격하지도 않는 삶이었지.
그러다 결국 마녀사냥이 종국에 이르고, 이변이 일어나고 말았던거야.
교회가 확보하고 있던 마녀 하나가 도망쳤어. 오랜 시간 고문을 받던 마녀였지.
이제껏 죽지도 않고 교회의 성수를 만드는데 필요한 마력을 공급하던 중요 동력원이었지.
교회에서는 초조해져서 가까운 보르드예프에서 260년을 산 성녀가 있다는 소식에
그녀를 잡기로 했어.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로 한거야.
성녀는 빠르게 발각되었어. 그녀가 보르드에프로 돌아간다면 분명 보르드예프에 숨은
마녀들 역시 말려들게 뻔해보였겠지. 그래서 교국에게 쫒겨 유레크로스로 흘러들어간거야.
이미 도망치는 과정중에 체내의 마력 대부분을 사용했던 거겠지. 얼마 못가 죽을 운명이었어.
그리고 한 사냥꾼무리에 섞여들고, 거기서 삶을 마감한거야.
그런데 마침 그 뼈를 교회에서 찾아낸 거고."
"그럼 그 뼈를 도난당했다는걸 보르드예프가..."
"7년 전에 알았지."
모든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지금 내게 한다는 건..."
"그래, 정식으로 보르드예프에게 협상을 제안한거야.
발레리아의 공이 컸지. 보르드예프는 우리 제안을 받아들였어.
이제 그쪽에서도 교국을 향해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고.
우리는 그 전쟁에 편승하기로 한거야.
이제부터는 우리쪽에서도 양동으로 날뛸 수 있게 된거고."
"그래서 너도 도심에서 그렇게 사고를 낸 거였어?"
"이제 본진만 잡아내면 되는 문제라는거지.
그리고 그 시작은 너한테 달렸어."
"나한테...?"
"미리타엔의 수비전도, 보르드예프의 공성전도, 모두 네가 신호하는 걸로 시작해.
넌 이 작전의 핵심 인물이니까. 무령이잖아?"
"무령이 뭐라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발레리아가 웃었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이랍니다.
미리타엔에 기사단장이 있는 것 보셨나요?"
그러고 보니 없었다.
"미리타엔에 기사단장이 없는 이유, 제국군은 있지만 통수권자가 없는 이유.
그건, 무령이 그 직책을 겸하기 때문이에요. 아시겠지만,
무령의 정식 명칭은 '워로드'잖아요?"
주먹을 꽉 쥐었다.
"에스트로, 첼세이라를 데려와줄 수 있어?"
"네 부탁이라면 뭐든지."
"발레리아. 여기 있는 버르너를 지키면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줘."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오랜만에 몸 전체에 마력을 휘감았다.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로 손을 높이 뻗고 눈을 감았다.
"가짜 신을 섬기는 이들을 몰아낼 시간이야."
그리고 그 순간, 미리타엔의 하늘에서도, 보르드예프의 하늘에서도,
엠페레스와 유레크로스의 하늘에서도.
그 모든 곳을 자애롭게 내비치는 것 같은 황금빛의 따스한 마력의 기둥이
선명하게 뻗어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빛은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화려해서
모두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버림받았던 천사가 다시 날아오르려 한다는 것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