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블러디 메리
* * *
"빛...이다..."
누군가가 처음 말했는지도 모를 그 한마디에 군중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환호했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그저 주저앉아 기도를 시작했으며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 도망쳤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든 생각은 하나였다.
신이, 저곳에 있다는 것.
에리아는 막힘없이 밀고 나갔다.
교국의 궁까지 거슬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그 앞을 막을 수 있는 사람같은건 없었으니까.
사람은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 앞에서는 전의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아슬아슬하게라도 '이길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행동한다.
그것이 눈 앞에서 부정당했을때, 그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신 뿐이었다.
한평생 교국은 신의 비호 아래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곧 새로운 위협에 사그라진다.
눈 앞에 있는 저것이 신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저건 신을 등진 자이며, 신에게 버림받았던 마녀라고.
아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가 만들기 시작한 작은 괴리감.
인지부조화의 작은 틈새는 어느새 신념을 흔든다.
"막아라! 팔라딘은 무얼 하고있나!"
이크사르토스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 손에 들고 있는 성서가 애처롭게 떨렸다.
그러나 팔라딘은 이미 그 상대가 되지 않았다.
늘 교황의 옆에 앉아 사성을 만나기에 급급했던 그는 이미 교회의 병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다.
"메리께 다가가지 못하게 해라!"
쾅 하고 발을 구르는 이크사르토스의 주변으로 옅은 마력이 흩어졌다.
채 완성되지도 못한 마력이 강대한 마력에 부서지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우왕좌왕하는 팔라딘이 소리칠 때 그가 말했다.
"...강신... 강신을 준비해라!"
교국으로서는 끝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함부로 그 이름을 꺼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군의 사기를 단번에 끌어올리고, 간악한 마력으로 교국을 위협하는
마녀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눈 앞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크사르토스는 긴장하고 있었다.
메리. 교황이 순순히 강신을 준비할지도 의문이었고, 강신을 성공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물론 메리 교황의 신성력은 가히 놀라웠다.
그것은 신앙이기 이전에 하나의 광기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런 맹목적인 신앙이라면 필시 무력한 인간마저도 신으로 만들 것 같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그것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달랐다.
일순에 조용해진 이들 사이로 목소리는 울리고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강신을 준비한단 말인가?"
그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울렸다.
교국의 모두가 순간적으로 정지한 이유는 그 탓이었다.
"들어라. 우리는 지금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교국이 이런 위기를 헤쳐나가지 못할 정도로 의지가 나약한가?
그대들의 신앙이 고작 이런 마녀에게 짓밟히고 유린당해도
우리는 무엇조차 하지 못하고 굴복하며 순순히 믿음의 증거를 드러내야 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신께 바쳐진 자로서 저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
신께서 우리를 내려봐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 앞에 증명할 뿐이다. 신은 증명하지 않으신다.
주사위를 던지지도 않으신다. 그저 확신하실 뿐이고, 우리는 다만 이를 증명할 뿐이다.
일어서라.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똑바로 보아라.
굴복할 것 같은가? 패배할 것 같은가?
그 수많은 패배 속에서도 교국은 건재했고, 신앙은 이어져왔다.
이제 그 신앙을 저들에게 보여줄 때다. 그대들의 눈은 하늘로 이어져있다.
그 길을 믿고 나아가면 된다."
조용한 말이었으나 사람들은 변하고 있었다.
하나씩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팔라딘과 농기구를 비롯해 첨단이 있는 물건을 들기 시작한 이들.
이제 본격적으로 에리아에게 저항하려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또 나쁜 쪽이 나인가? 재미 좋네."
교황 메리의 위치는 확실치 않았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광역으로 사람들을 고무한 것은 역시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 탓에 에리아는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어버렸다.
망치를 든 자들은 마녀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두꺼운 철덩이가 안면을 가격하기 직전에 멈춘다.
휘두른 망치는 벽에 가로막힌듯 나아가지 못한다.
마녀가 뻗은 손에 망치는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으며
그들이 손에서 놓친 망치를 다시 줍는 일은 없었다.
짧은 웃음.
그리고 그 순간 보인 공포.
자신이 놓친 것이 철덩이가 아니라 인간의 썩어가는 살점이 겨우 들러붙은
팔뚝이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
그 끝에 득실대며 붙어 기어다니는 구더기와 지네 따위의 독충이 보였고
자신의 팔에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벌레가 살을 파고들고 그 안쪽으로 기어들어간다.
"으아....으아아아악!!"
그들은 자신의 팔을 털어내기 시작해서, 곧이어 자리에서 미친듯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급기야 가지고 있던 단도를 이용해 벌레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던 교인들에게도 공포는 번져갔다.
그들이 든 검은 뱀의 꼬리로 뒤바뀌었고, 뱀은 언제라도 자신을 물 듯 혀를 날름거렸으며
입은 갑옷 사이로 꿈틀대며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갑옷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몸에 붙은 뱀을 벤다.
메이스를 든 자들의 둔기는 곧 공포스러운 나뭇가지가 되었다.
가시가 잔뜩 돋힌 나뭇가지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미비한 마비감.
그것은 자신들이 방금 전까지 믿고 의지했던 무기가, 스스로를 위협으로 몰아넣는 독으로 느껴지게 했다.
잘라내고 내던지는 과정은 그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삶을 버리고 싶지 않은 이들이 목전에 둔 죽음을 바라보며 이크사르토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눈에 보인 진실은 그저 마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무기를 내던지고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팔다리의 살점을 뜯어내는 광경이었다.
"뱀...! 뱀이다!!"
"이쪽으로 던지지 마!"
"내가... 내가 뭘... 우욱...! 우웨에엑!!"
"벌레가...! 으악!! 떨어져...!'
"귀 속에 바퀴벌레가 들어있다!! 여러분! 제 귀에는 지금 바퀴벌레가 들어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어딘가 동떨어진 것 같은 공포심에 가득 차 있었다.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울부짖는 얼굴들은 지옥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환각...이 정도 수준이라니..."
이크사르토스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팔라딘들도, 병사들도 모두 마녀의 농간에 빠져 놀아나고 있었다.
무엇도 하지 못한채로 손 놓고 당하는 것 만이 전부였다.
"어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왜, 이러면 안될 것 같아?"
그 목소리가 마치 맹수를 눈 앞에 둔 것 처럼 울렸다.
이크사르토스는 자신이 챙겨두었던 성수를 꺼내 들고 말했다.
"하...하하... 네 간악한 환각은 소용 없다!
나는 이미 성수를 가지고...
뭐냐... 그 눈은.... 마치..."
"...."
에리아는 그런 그를 그저 지나쳤다.
지나쳐간다는 사실이 그에게 굴욕감을 심어주기도 전에
그는 지릿한 냄새를 느꼈다.
축축함. 그리고 이유모를 뜨끈함.
단지 침묵한 여성에게 공포를 느꼈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
그는 말 대신 자신의 초라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단 말이다..."
그가 애써 발버둥치는 사이, 무언가가 물큰하게 다가와 그의 등에 겹쳐졌다.
"아아... 이건 분명 교황께서....
아니... 넌...! 첼세이라...! 분명 그 팔은..."
그의 희망에 물들었던 얼굴이 다시 천천히 어두워진다.
그리고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툭 쓰러지는 목.
그 뒤에는 아무런 웃음기 없는 슬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다.
첼세이라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어느새 다시 고목처럼 말라버린 팔을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가 싶더니 말랐던 팔이 다시 조금 살집이 붙었다.
아직 한없이 말라 뼈가 드러나보이는 그 여린 팔을 말 없이 쓸어내리고는
한숨을 내뱉고 첼세이라는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은 누구에게도 목격당하지 않았어야 했고 또 그럴 뻔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 이는 있었다.
존재만으로 희망을 얻은 순간이었다.
교회의 병력은 조금씩 줄어갔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마녀 에리아는 교회의 중추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교회 앞에서 그녀는 또 한명의 존재를 마주했다.
"제 동생 어디있죠?"
"결국 내 앞을 막아서는구나."
"이렇게 될거라고 생각 못하셨나요?"
"너무 잘 알고 있었지. 그 앞을 비켜.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그럴 수는 없어요. 위대한 마법사였던 선조님부터 가문 대대로 내려온
다미아 가문의 차남, 마카는 교국에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이 나라의 흥망에 함께하기로 했어요."
"차남...? 아 맞다... 남자였구나."
"하하.. 마지막으로 나눈 농담이 그런 거라니 실없네요.
다시 묻겠습니다. 제 동생은 어디있죠?"
"아마 안전한 곳에 있을거야. 지켜달라고 했으니까."
"배려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서로 할 일을 해야겠네요."
"그렇겠지."
"돌아가라 마녀. 이 앞에 널 위한 공간은 없으니까."
"내가 준 큐브로 나를 상대하겠다? 오만해."
빠지직 소리가 나고 마카의 큐브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날아든다.
에리아는 빠르게 그 화살을 피해내고 마력으로 장벽을 만들었다.
전방위를 방어하기 위한 둥근 돔 형태로 만들어진 역장은 그냥 보기에도
상당히 단단해 보였고, 쉽사리 깰 수 없을 것 같았다.
"실버 스탈리온!"
마카의 마력이 하늘에서 말의 형상을 그렸다.
달려나갈 것 같은 말의 모양을 한 마력이 그대로 스며든다.
한층 더 빨라진 것 같은 도약이 역장에 부딫혔고
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는 마구 회전하는 큐브에서 마력탄이 산개된다.
하늘에서 뿌려지는 것 같은 무수한 탄들이 에리아의 머리위로 떨어졌고
흙먼지가 일었다.
어느 새 주변이 정리되고, 사람들은 자연히 그들로부터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경기장과 같은 원형 공간에서 마카의 마력은 한계를 모르고 쏟아진다.
마력량 하나만큼은 밀리지 않은 덕분에 잠깐의 공백도 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에리아는 여유롭게 방어막 하나로 버텨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에리아가 손을 튕기고 나면 방어벽이 사라진다.
그 판단에 당황한 마카가 공격을 멈추면 에리아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쳐 봐."
도발이었다.
마카는 전력을 들이부을 생각으로 마력을 모았고,
이제껏 조절해 본 적없던 크기의 마력덩어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손바닥 위 작은 공의 크기로 시작한 것은 점차 모양을 갖춰가며
삼각모양의 날카로운 모양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점차 살이 불어나듯 부풀어오르며
그 마력을 한점으로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크기는 점차 커져 건물의 크기를 아득히 상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런 마력을 보고 성연의 힘을 짐작하며 피신하고 있었고,
일각에서는 마력을 모으는 동안 성연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여론은 '제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저런 걸 맞고 멀쩡할 리가 없다' 였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마력이라는 것 자체가 검과 총보다 뛰어난 무기로 분류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크기의 무기를 처음 봤으니까. 무기로 인식되는 마력이 그렇게 거대하게
자신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한 가지를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신성한 은의 마력을 한가득 담은 성검의 형태로 더 날카롭게, 더 예리하게 벼려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 에리아의 머리 위에서 그 거대한 것을 떨어뜨렸다.
"전력으로 여기서 너를 쓰러뜨리고 교국을 지키겠다 마녀!"
에리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서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 검이 떨어지고, 성연의 큐브에 금이 갔다.
탁 하고 깨지는 큐브가 점차 부서지기 시작했지만 성연 마카는 마력의 조절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쾅 하는 소리가 나고 마치 크레이터처럼 주변으로 움푹 파인 구덩이가 생겼으며
그 가운데로 흙먼지가 어지럽게 널렸다.
절대 살아나올 수 없다.
죽지 않는다고해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멀쩡 할 수 없다.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숨죽이고 구덩이를 지켜본다.
마침내 누군가 한명이 픽 웃었다.
웃음은 점차 승리의 확신으로 변해 퍼져갔다.
"푸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웃는 미소들 사이 입술을 질끈 깨문 마카가 말했다.
"아냐..."
그리고 흙먼지가 걷힌 사이에서 그들이 본 것은 반으로 조각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선 마녀였다.
단 한번. 박수를 짝 하고 쳤을 뿐인데, 마치 원래부터 다치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회복해버리고 마는 모습은 모두에게 보여져 버렸다.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생명의 마력. 그들이 간과한 단 하나의 사실은
간단한 것이었다.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전쟁의 효시가 되었던 그 빛의 기둥을 마주하고도
그것이 공격이 아니었다는 사실 만으로 그녀를 과소평가했던 것.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그들의 앞에 돌아온 것이었다.
"더 할래?"
그 한마디에 마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한다고 하지 마. 가만히 놔둬도 이미 서 있기도 힘들잖아."
"...."
테트라 큐브가 부서지고, 초과한 마력량의 조절에 미숙했기 때문에
마카는 마력회로가 망가져버렸다.
그걸 에리아는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마력. 그리고 조절능력의 미숙으로 모든 연산을 도구에 의존한 순간부터
이길 수 없는 구도였다는 것을 깨달은 마카는 그대로 철퍼덕 쓰러졌다.
등은 이미 핏줄이며 근육이 모두 터져 찢겨 있었다.
"죽게 놔둘 거 아니면 옮겨."
에리아가 주변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던진 말에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에리아는 다시 교회로 발을 옮길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