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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72화 (272/303)

〈 272화 〉 블러디 메리

* * *

온 몸이 비틀리고 꺾여 숨이 멎었고, 원통함에 눈을 감지 못했다.

의지할 곳을 잃은 자는 안식을 택하지 않는다.

이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보았다.

존재해서는 안되는 망령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원망은 절실하게 내려앉았다.

요르 디프리온의 죽음은 구제받지 못했다.

요르디프가 죽은 직후, 아직 다르말록이 봉인당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죽은 영혼에게 다르말록이 물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네가 할 일이 아직 많다.

날 위해 어디까지 바칠 수 있겠느냐."

"모든 것. 작은 것이라면 모래알 하나까지도, 큰 것이라면 죽음까지도 바치겠습니다."

"그게 네 딸이라도 말이냐?"

"메리...말입니까..."

"그래."

무거운 고개를 마침내 끄덕이고 나면 눈 앞이 환해진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것들이 얼굴을 쓰리게 때려댔다.

"눈..."

"네, 그렇습니다 교황님.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이곳에 정말 나라를 세우실 겁니까?"

요르 디프리온은 어느새 딸의 명을 이어받아 있었다.

"그래, 이곳으로 합시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요르 디프리온이라는 이름보다 메리 디프리온이라는 이름으로 더 오래 살았다.

그녀의 손에는 이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사람들과 안목이 있었다.

교황은 신성을 증명하는 자여야 했다.

그게 메리가 교황으로 장기간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신성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변명으로 그녀는 오랜 시간 교국의 꼭대기에서

그 시선을 오만하게 한껏 아래로 내리깔고 타인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의 과제와도 같았다.

왜 자신이 교황으로서 존재해야 하는지 증명해야 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아르간티아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인간의 삶에 신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살았던 남자였고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그녀는 아르간티아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절망은 빠르게 실망으로 변했다.

그런 그녀의 안에서 개화한 것이 아주 오래 전 다르말록이 심어두었던

광신과 이단의 싹이었다.

다르말록이 패배한 이후에도 그녀는 다르말록을 놓지 못했다.

아르간티아의 이름을 내세우고 다르말록의 교리를 퍼뜨렸다.

아르간티아의 인간론을 주제로 하며 인간이 아닌 자들을 배척했고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른 종교를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성물과 성지를 함락시켰다.

복속된 것을 아르간티아의 명성에 팔아 다르말록의 이념을 세웠다.

언젠가 그 대사사 혹독하게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경고한 이들에게

도리어 비웃음을 선물해주었던 것이다.

메리의 믿음은 결국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아르간티아에게 패배하여 봉인당했던 다르말록의 목숨을

미약하게 이어오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아르간티아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가운데,

그녀와 일부 교인들만이 진상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마침내 그 모든 일들을 영광으로 탈바꿈하여 그에게 기도한 순간,

다르말록은 그곳에 눈을 떴다.

이후로는 더욱 체계적이고 심도깊은 세뇌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세뇌는 또 다른 광신도를 낳았다.

자신의 행동이 아르간티아를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 이들.

교황은 이들을 2세대 신자들이라고 불렀다.

2세대 신자들은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들 중 한명이 바로 헤븐타임즈의 성을 가진 것이다.

그들만의 새로운 교리를 세우고 새로운 종파를 나누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뿌리는 교황이 원한 그대로였다.

언젠가 이 모든 공을 다르말록에게 돌리는 것으로 완벽해질 수 있었다.

이름을 빌린 것일 뿐이니까. 인간의 이름을 빌린다고 신의 공이 인간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니까.

다르말록은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었다.

자신이 손에서 쥐고 놓지 않았던 신격을 나누기로 한 것이었다.

미비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변화를 불러왔다.

다르말록이 가지고 있었던 기록으로 그녀에게 저주를 걸었던 것이다.

그것은 늙지 않는 것이었다. 노화를 지워버린 교황은 자연적으로 죽을 일이 없게 되었다.

"요르 디프리온이여, 내 마지막 종은 역시 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벅찬 감격과 환의에 젖은 교황은 그 뒤로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마저도. 마녀가 교국을 흔들고 교회로 향하는 순간 마저도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다르말록을 향했다.

"내 딸아, 아직도 그리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다르말록이시여... 이제 교국은 어찌해야 합니까."

"걱정 말아라. 다 내게 방법이 있으니."

"방법...이라하심은..."

"진정으로 신을 원하는 자들을 굴종시키는 법이 어찌 신앙뿐이겠느냐."

교황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말씀하시지요."

"제물이다. 6명의 제물과 66명의 환희와 666명의 절망, 그리고 6666명의 공포로

나는 다시 이곳에 서리라."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겠지."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겠습니다. 해 보이고 말겠습니다."

"그래..."

다르말록의 봉인된 목소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메리는 곧장 제물을 찾기 시작했다.

마지막 하나는 자신의 목숨으로 하더라도 다섯이 모자랐다.

그녀는 그 즉시 성물로 추앙받는 물건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희와 절망, 그리고 공포를 선사하기 위해서라면

인지도가 높은 이를 죽여야 했다.

무엇보다도 저 마녀가 자신에게 다가오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는 것이 주요했다.

그래서 교황은 즉시 후문으로 교회를 빠져나갔다.

성물은 하나하나가 귀중한 아티팩트였다.

선포의 눈이라고 하는 낡은 추 하나로 그녀는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추는 체스 말 처럼 생긴 작은 조각이었다.

효과는 단순했다. 1초를 10초로 사용하는 능력. 남들보다 10배의 시간을 가지며

10배로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괴의 무너져내린 몸에 남은 꼬리뼈를 깎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추였다.

이 추가 본디 사용되는 목적은 이단자들에게 고문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 추가 영향을 주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에리아의 TAG14호였다.

효과는 검증된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교국의 성을 찾았다.

교황이 찾았다는 말에 왕은 기뻐 달려나왔다.

"교황님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신 게지요?"

그렇게 환호하는 이에게 웃으며 그렇다고 말하고 그녀는 왕에게 독약을 먹었다.

머지 않아 죽으리라 확신하고 그 자리를 떴다.

그 다음으로 향한 것은 남서부 지역이었다.

교회의 눈엣가시였던 이들이 모여사는 구역에서 그녀가 찾은 것은 샤인이었다.

"샤인 머스캣. 찾고 있었습니다."

"교황께서 직접... 저를 말입니까?"

"네, 당신뿐입니다. 이런걸 부탁할 사람은.

지금 상황은 심각합니다. 오랜 균열끝에 기어이 일이 생겼고,

알고 있겠지만 교국의 위기입니다. 마녀를 막아주세요."

"저로서는 역부족일겁니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는 것은 사성으로서 옳지 않은 태도 아닙니까?

교국을 위해서 힘을 내 줄 사람은 당신 뿐입니다."

"하아... 그럼 일단 노력은 해 보죠."

그렇게 말하고 교황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아, 질 것 같으면 이걸 드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또 한번 독약을 내밀었다.

흔히 교회에서 순교를 목적으로 할 때 사용되는 것이었다.

샤인은 의심 없이 이것을 받아들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교황은 대주교와 추기경 그리고 교인들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고

결국 자신을 포함해 고작 다섯 명의 목숨만을 확보했다.

그마저도 교국 출신의 유명인을 겨우 짜 맞춘 것에 불과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왔단 말인가..."

그런 그녀의 눈에 든 것이 있었다..

마치 어딘가를 두리번 거리며 눈으로 쫒는 듯한 그녀의 시선끝을 보면

그곳에 보이는 것은 한 소녀였다.

"저건..."

확신할 수 없었던 그 소녀의 팔을 본 순간 눈이 번뜩이며 교황은 그 소녀를 향해 달렸다.

교회에서 챙겨나온 성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눈 앞에 보이는 성자 첼세이라를 마주했다.

"드디어 만났습니다 첼세이라."

첼세이라의 얼굴은 미동도 없었다. 그저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진빠지는 목소리로 답했다.

"너도 아직 살아있었구나."

교황은 가지고나온 성물을 내밀었다.

"보이나? 너희 마녀들의 뼈로 만든 검이다.

어떤 마법도 깨버린다고 들었다."

"내 가족들의 유해로 이젠 내 목숨을 노리는건가...

알고 있다. 마력에 간섭하는 도구가 아니라, 마력회로에 간섭하는 도구지.

마력 회로를 엉망으로 꼬아 분해해버리는 도구이니만큼, 부서지고 나서

마력들이 이리저리 엉킨다는게 거슬려서 말이야.

그래서, 날 다시 찾아왔다는 건 뭐 그거겠지?"

"어차피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목숨들인데 아쉬워하지 말라는 의미지.

이미 몇 번이고 죽어 놓고 말이야.

난 정말 아쉬워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거든.

화재 현장에서 불타서 죽어버린 줄 알고. 그런데 역시 성물은 성물이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과거의 미련을 끌어안고 있으니."

"아까울게 없기는 했어... 나도 내 몸은 알아.

본체는 이미 죽고 없는 것을 억지로 영혼을 마력으로 붙들어놓은 형태니까.

내 몸이 목적인가?"

"그 몸도, 순도높은 마력도 제물로는 좋겠지."

"마음대로 해. 어차피 이 몸으로 오래 움직일 수도 없고. 여기서 널 꼭 죽이고 싶었다.

보르드예프의 오랜 핍박의 원흉을 마주하고도 차분할수는 없으니까."

마력으로 억지로 묶어둔 잔념과 같았던 첼세이라의 몸은 그저 마력덩어리에 불과했다.

에리아보다도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그녀로서는 성수와 성물로 무장한 교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죽어라!"

교황이 빠르게 안쪽으로 달려드는 순간 당황한 첼세이라가 뒤로 주춤했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스쳐버린 왼쪽 다리가 그대로 마력을 분해하며 사라져버렸다.

마력이 분해되고 그 주변은 연한 푸른 빛으로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일렁였고

한쪽 다리로 주저앉은채로 첼세이라는 그저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당당하게 말한 것 치고는 약한데 첼세이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칼은 마력회로를 망가뜨리는게 아니야.

모든것의 본질을 보여주는 칼이지. 원초의 형태로 되돌리는 것.

그게 이 칼의 효과라고.

물론 이 칼만으로 널 쓰러뜨린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며 교황은 목에 걸린 추와 자신의 허리에 찬 벨트, 그리고

장비한 성물을 내비춰보였다.

"하아... 너 성물이 하나가 아니었구나."

"그럼 교황인데 설마 하나만 썼으려고? 재미도 없네. 죽어."

푹 하고 박힌 검 사이로 붉은 피가 번져 떨어진다.

"이런..."

첼세이라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원념일 뿐이었다.

당연하지만, 마력이 분해될 뿐, 피는 흘리지 않아야 했다.

"하아... 잊고 살면 섭하거든. 여기서 반가운 얼굴이 보여서 말이야."

"너...너는..."

교황이 당황해 말을 더듬는 순간에도 그 눈은 교황을 향하지 않는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는 그저 첼세이라에게 시선을 고정해두었다.

억지로 끌어낸 미소에는 고통의 흔적같은건 보이지도 않았다.

"오랜만이다. 얘야."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긴장이 풀린건지, 아니면 반가움의 표시인지, 첼세이라는 말을 절었다.

그리고 그 눈에 가득 고인 눈물만이 일렁거렸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은 눈물 떄문에

앞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얼굴은 분명 자신에게 소중했던 몇 안되는 얼굴이었다.

눈물때문에 일렁이는 건지, 아니면 그 얼굴의 골격자체가 변하는 것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앞에 선 얼굴은 분명히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래, 체헤게 아저씨야. 한번은 잃어도, 두번은 잃지 않는단다.

팔이... 그래, 나중에 꼭 이야기해줘. 그때 듣는 걸로 할테니까.

아저씨가 꼭 그렇게 만들게. 뒤에 꼭 붙어있으렴."

첼세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령이 또 하나 늘었구나... 이젠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 시대에 존재해선 안되는 이단들만이...

이렇게 내 앞을 가로막고 신의 의지를 꺾으려 하는가!!"

"그렇게 따지면, 아줌마도 이단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체헤게는 자신의 복부를 찌른 검을 양 손으로 움켜잡았다.

"오랜만에 움직이려니까 힘들구만. 배도... 뻑뻑하고.... 하아..."

"내...내 제물을... 의식을 방해하지 마라!!"

교황 메리 디프리온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체헤게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늙은이들 싸움은 늙은이들끼리 해야지 않겠어?"

"건방진..."

교황은 칼에 묻은 체헤게의 피를 벨트에 발랐다.

벨트는 피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꽉 조여들어 교황을 묶는다.

"순례자의 최후는 언제나 고통 속에서 미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신실함. 그것이 너희 이단자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체헤게는 벨트를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허리를 파고들어 그 안으로 들어간 벨트는 결국 꾸물거리며 몸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여리여리하던 그 교황의 골격이, 마치 자신과 비슷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마른 침을 넘겼다.

그러면서도 체헤게는 애써 침착하며 한숨을 푹 내쉬고 첼세이라에게 말했다.

"걱정마. 지켜줄테니까. 목숨을 걸어서라도."

"왜... 그렇게까지 해주는거에요?"

그녀가 물었다.

"넌 행복할 자격이 있으니까."

"행복할 자격?"

"그래. 누가 그러더라고. 난 불행할 권리를 쟁취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남은 행복은 너한테 줄게.

꼭 행복하렴."

그렇게 말하고 그는 교황에게 달려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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