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 블러디 메리
* * *
미리타엔의 피해는 심각했다.
무엇보다도 본대를 보내지 못한다는 것이 큰 피해였다.
연구소와 왕성 근처를 억지로 막아내고 있었으나
에리아의 신호탄에 이들 역시도 반격을 시작했다.
"이제 우리 차례다."
플로라의 지시를 필두로 연구소 앞에서 난전중이던 존재들을 하나씩 물리기 시작했다.
블러드 엘프들은 피의 마력으로 만들어낸 마탄과 창을 자유자재로 날렸다.
시야가 없는 곳에서 날아드는 창은 누군가의 손도 닿지 않은 채로 교인들의 심장을 찔렀다.
"신을 찌르는 롱기누스의 창이다!"
"천신마저도 져버린 우리가 이제와서 인간의 신에게 진다니 어불성설이다!"
이들은 서서히 구역을 수복하기 시작했고, 연구소 근방의 영역을 확보한 이후
본격적으로 도시에 개조 폭탄병을 투하했다.
무차별적으로 투하되는 노예들은 교국에서 온 늑대들과 교인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들었고
자신들이 폭탄인지도 모른 채로 그들을 도와 제국에 반기를 들다가
버건디빛이 짙은 강력한 충격이 실린 마력파에 맞아 그대로 폭사했다.
제국에서는 노예들을 자신이 실험체인지도 모르게 했고 상황에 따라
통제되었던 그들이 수감된 감옥 문을 열었을 뿐이다.
차례대로 열리는 문에 자유를 외치며 뛰어나온 노예들이 제국에 반기를 드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규모에 휘말리는 교인들이 주춤하면 다시 블러드엘프들이 원거리 포격을 시작했다.
장대비처럼 내리는 신살창은 죽은 노예들의 피로 몇 개고 재생산되었다.
지휘관의 부재 탓인지 교인들은 우왕좌왕하기를 반복하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본디 그들의 지휘권은 베르가 모트에게 있었다.
그러나 베르가 모트는 게비디와 대공들에게 발목을 잡혀 그 자리를 뜨기 어려웠고
이들을 통솔하러 갈 수 없었다.
소규모 접전에서는 비등비등한 실적을 내고 있었지만,
그 탓에 교국의 군대는 수많은 인적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마저도 플로라의 고양이, 애니가 이곳으로 참전하며 열세가 되었다.
모든 총알과 공격이 어디선가 뻗어나오는 그림자에 삼켜져버리고 만다.
오히려 높은 기동성이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결국 제임스는 지쳐있었고, 베르가 모트는 애니가 만들어낸 그림자 속 공간에 갇혀있었다.
다만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 허공에 창을 찔러대는 베르가의 손에서
튕겨지듯 나온 붉은 창을 엔시온이 다시 탈환하고는 창을 작살포로 바꾸고는
그림자 속에 들이밀고 무심하게 연달아 세발을 쏘아버렸다.
쾅 쾅 쾅 하는 소리 세 번이 울리고는 안쪽에서 난동을 부리던 것은
축 늘어져 조용해졌다.
게비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임스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그쪽은 지휘관으로서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 본국으로 돌아가 정비를 하는 것은 어떤가?
킬레리들에게 연락을 받았네. 교국에서 온 본대는 이미 패퇴했다고 말이야."
"확실히 지휘권자가 그 현장에 없다는 것은 실책이 크군요.
하지만 저는 교국의 지휘권자가 아닙니다. 전장을 이탈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잘 생각하게. 자네는 교국 소속이 아니라 유레크로스 소속이잖은가.
지금 자네가 돌봐야 할 사람은 누군가? 누구에게 재정비가 필요할 것 같은가?"
그제서야 제임스는 자신의 스승을 돌아보았다.
그런 제임스에게 게비디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나는 상황이 종료되면 유레크로스를 침공할 각오가 있지.
그 교회에 지켜야 할 사람은 없나? 미리 준비를 해두는게 어떤가?"
제임스는 게비디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그는 조용히 스승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한가지 거래를 하시죠."
"거래? 자네가 내게? 음... 그래, 들어나 보지."
"더이상 교회가 그 누구도 침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주십시오.
그리고 교회가, 테르도어 대성당이 누구에게도 습격받지 않도록 막아주십시오."
"자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제임스는 웃어보였다.
사실상 신부가 해서는 안되는 말.
그건 다시말해서, 듣기 좋은 절대선으로 포장한 배신 선언이었다.
교국을 멸망시켜 달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본 교회를 없애달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제임스는 자신의 발언을 넌지시 제시하고는 모르쇠로 일관한 것이다.
얼핏 보면 평화협상이었던 그 말의 진의에 담긴 다른 의미는
즉, 미리타엔에 모든 책임을 넘긴다는 말이기도 했다.
게비디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자네, 머리가 좋군. 아주 교활해. 자네같은 신부는 처음이다.
좋다. 받아주지. 그리고 아마 그렇게 되어가고 있을거네."
그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숙이고 스승을 부축해서 돌아갔다.
"제임스, 저 말을 믿는거냐?"
"선생님. 전 알수 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어요.
그리고 분명 모든 진실이 곧 밝혀질 겁니다."
"그걸 어찌 장담한단 말이야..."
"그렇게 해 주겠다고 말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여자가... 확실히 사람을 홀리는 마녀이긴 했던 모양이다..."
"이제와서 뭔들 어떻습니까?"
"네 말이 맞다."
그들은 그렇게 돌아갔다.
베르가 모트는 그런 그들의 대화조차도, 바깥의 상황도 알 수 없었다.
미리타엔은 그렇게 상황을 종결시켜버리고 말았다.
교황은 체헤게의 공격따위는 맞지 않았다.
성물로 무장한 교황에게는 너무나 정직한 공격 뿐이었고
조금씩 그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별반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부터 점점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체헤게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실혈로 인해 계속 그는 둔해지고 있었고 피로는 축적되어갔다.
'에리아를 떠나지 않았다면 지킬 수 있었을까?
내가 인간이 아니라 기계였다면,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도 않아서
널 지킬 수 있었다면 뭔가 조금은 달랐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억지로 힘이 풀린 다리를 일으켜세웠다.
이미 그러는 순간에도 몸에는 군데군데 칼자국이 나 있었고
이제는 움직임을 쫒기도 힘들 정도로 지친 몸은 후들거리기를 반복했다.
"왜 그러나? 멋진 말로 갖은 폼은 다 잡더니 결국 보여준게 없군?"
메리의 손에 들린 칼은 이미 피로 붉어보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참하게 당해 결국 일어서지조차 못하게 된 체헤게는
겨우 그 몸으로 첼세이라에게 향하는 칼을 맞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이제 그만하세요 아저씨...!"
첼세이라가 몇 번이나 말해도 그 무자비한 칼은 몇 번이고 체헤게의 몸에 틀어박혔다.
그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기적과도 같았던 일이었다.
"질기구나. 그 명을 다른 곳에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 로드원은 늘 그랬다.
어리석고, 스스로 희생하기를 자처하지.
결국 그 선택이 무엇을 바꾸었는가에는 답조차 하지 못하면서
끝까지 자신은 옳았다고 말하고 현실을 피해 도망친다.
뭐가 변했지? 왜 나는 건재하고 너는 바닥의 흙먼지를 마시며
고개를 쳐박고 있는 거냐."
"그만해... 아저씨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첼세이라는 말라가는 팔로 겨우 체헤게를 끌어안고 무의미하게 마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소용 없다. 그정도 출혈이면 죽을 수밖에 없어.
네가 하는 일은 그저 그를 괴롭게 붙들어두는 것이다.
너 떄문이다 첼세이라. 네가 도망치게 한 마녀들이.
네가 매 순간 실수했던 그 선택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궁지에 몰려서도 교국은, 나는 이겨냈다!
너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저 시간을 조금 번게 전부이지 않으냐!"
그렇게 말하며 미친듯이 웃는 교황 메리의 뒤로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면 충분한거 아니냐? 시간은 벌었다.
그럼 적어도 네 발이 묶인 동안 네 적이 이곳으로 모인다는 이야기잖아?"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기어이 이곳에 모여서는 안되는 이들이 모였군. 또 너냐.
나를 늘 방해하는구나 에스트로...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 에스트로!!!"
"그만 불러. 딱지 앉을라. 다른건 없고,
나도 저기 있는 첼세이라를 무사히 데려오라는 이야기를 받아서 말이야.
어차피 가만히 놔둬도 오래 살지도 못해. 알잖아? 이미 공기중으로 마력이 퍼지는걸."
에스트로는 그렇게 말하고 소매를 걷어올렸다.
노골적인 도발에 메리는 마녀의 칼을 들고 곧장 에스트로를 찔렀다.
바닥으로는 피가 두어방울 떨어질 뿐, 변한 것은 없었다.
"아, 이걸로 또 한명분 빠졌어."
그 말의 의미는 모두 알 수 있었다.
에스트로가 흡수한 피의 생명 하나가 방금 교황의 손에 꺼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빨아들인 피의 생명력만큼을 모두 소진하지 않는다면,
눈 앞의 괴물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어떻게 이걸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거냐... 분명 뱀파이어는 피로 이루어진 마물...
이제껏 네가 집어삼킨 목숨이 수천, 수만을 넘는 것을 내가 똑똑히 보았단 말이다!
마녀의 칼에 찔렸는데도! 왜 어째서 너는 사라지지 않지!"
"질문하는 자세 좋아. 머리가 나쁘면 자주 물어보고 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에스트로는 손에 끼운 반짝이는 흑요석 반지를 내비춘다.
그리고는 교황에게 비웃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네놈... 교회의 보물을... 그렇게...!"
"이거 너 주면 쓸 수나 있고? 교회 사람들은 피곤해서 어떻게 사나 몰라."
에스트로의 손이 천천히 호를 그리면 바닥에 툭 툭 떨어진 핏방울이
하나씩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그것들 하나하나가 파리로 변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간악한 술수를...!"
"싸우는데 간악하고 말고 할게 어디있어?"
파리들은 교황에게 날아들었고, 파리가 들러붙자 그 부위가 천천히 썩어갔다.
메리는 곧장 성물을 사용해 파리를 하나하나 베어갔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에서 성수를 꺼내 벌컥벌컥 목으로 넘겨댔다.
파리가 붙었던 썩은 부분을 칼로 도려내며 다시 그 자리에 섰다.
"너를 교회에서 벌써 150년이 넘는 시간동안 추적했다.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능력이 많은 것 같구나 에스트로."
에스트로는 몇 번인가 피로 만들어진 와이어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와이어가 팔을 휘감아 메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왔지만
결국 그 피가 메리의 팔을 절단하는 일은 없었다.
"성물이 고작 그런 정도에 당할 성 싶었더냐!
교국은, 무적이다. 내가 이곳에 서 있는 한 지지 않는다!"
에스트로도 그 모습을 보고는 그런 방법으로는 안될 것이라 판단한 것 같았다.
거리를 벌리며 원거리에서 마법을 주로 사용해 공격하던 전술을 취하던 그가
한숨을 푹 내뱉고 천천히 메리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가간다는 행동 뿐이었음에도 그곳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 주변의 허공에서 마치 총알과도 같이 한방울의 피가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발사된 피는 교황의 몸을 뚫지 못하고 붉게 흔적만을 남겼다.
"지금의 나는 여린 메리가 아니다.신께서 점지하신 마땅한 지배의 근거란 말이다!
이건 절대 패배하지 않는 약속이다!"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고? 별거 없네. 절대 죽지 않는 여자랑 만나봤어?"
에스트로는 아까보다 한결 빨라진 속도로 그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빠른 속도로 머리, 이마와 뺨, 목까지 안면 전반부를 강타하는 주먹에도
메리는 표정을 구길 뿐 별다른 피해가 없어보였다.
결국 에스트로 역시 살짝 지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멱살을 붙든다.
"절대 안죽는 여자가 훨씬 강하더라고. 패배의 경험이 있거든."
쾅 하고 부딫히는 에스트로와 메리는 말 그대로 개싸움을 시작했다.
성물을 무더기로 사용해 스스로도 제어가 되지 않는 몸으로
무자비한 주먹을 꽂아대는 자에게 달라붙어 몸에서 피를 뽑아내는 상황.
마운팅을 당한 에스트로가 바닥에 쓰러지면 그 위로 공격을 가해보지만
메리의 칼은 맨바닥만 찌를 뿐이다.
"물리적인 공격은 마음만 먹으면 피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난 것으로 보이는 메리가 결국 그 순간을 틈타 방향을 홱 돌렸고
체헤게에게 붙어있는 첼세이라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길게 뻗은 붉은 창과 같은 형태로 메리의 뒤에서 심장을 찌른
피의 기둥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떻게...!"
"이거, 네 피거든. 흡수하지 않고 다루려니까 고생 좀 했지.
성물도 본인이 자해하는 건 못 막나봐?"
순간적으로 녹아내리듯 창은 사라져 없어져버렸다.
그리고 철퍼덕 하고 메리가 엎어진다.
메리의 등에서 가슴까지 뚫린 커다란 구멍.
그리고 겨우 그 몸을 지지하던 혁대가 타들어가듯 사라지는 모습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 기이함을 주고 있었다.
"끝났어 첼세이ㄹ..."
에스트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 방심하지 않았다고 여겼는데도
첼세이라의 목에는 어느새 교황이 가지고 있던 칼이 꽂혀 있었고
첼세이라는 겨우 우는 얼굴로 눈물 한방울과 말라 비틀어진 고목같은 팔만 남기고
그대로 분해되는 것 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고목과도 같은 마른 팔 역시도 마력이 사그라져 형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썩어서 무너지듯 가루로 흩날려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에리아를 볼 낯이 없네."
그리고 에스트로는 철퍽 주저앉았다.
죽지 않았다지만 그 역시 상처는 심각했다.
모든 공격을 막아내던 상대였으니 만큼 여러 방면에서 방법을 찾아야 했고
마지막 일격을 위해서 체내에서도 상당량의 피를 뽑아내야 했다.
"일단 좀 쉬고싶군... 나머지는 그 다음에..."
그가 그렇게 말하고 눈을 붙이려고 하면 그 즉시 진동하기 시작하는 땅.
그리고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은 감각으로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제물과 공포, 신앙심과 나를 거부하던 자들이 울며 나를 인정하는 그 모습들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불렀노라."
"이런 씨발... 다르말록..."
다르말록의 봉인이 이전보다 약해져 있었다.
완벽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도 선수를 빼앗긴 것 같아 분한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이제 더는 너희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기록을 초월하고 나는 더 새로운 신이 된다!
영생을 꿈꾸던 순간, 나 다르말록의 아래에 인간이, 문명이 존재하고
내 위로 오직 빛과 기억뿐이던 그곳으로 내가 돌아간다!
내 그릇은 너다. 내 완벽한 그릇이다..."
그렇게 말하며 다르말록이 선택한 것은 체헤게였다.
쓰러져 겨우 숨만 내뱉던 그 가느다란, 끊어질 것 같았던 생명이 이어진다.
다르말록의 봉인을 풀 그릇으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 몸의 주인은 도서관을 통해 넘어온 다른 차원의 것이었고,
그 영혼은 죽음과 환생을 반복한 탈주자의 것이었으니
더할나위 없는 그릇이었다.
"숨이... 이어진다... 이어졌노라..."
에스트로는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이건... 좋지 않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