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 제국 방어전
* * *
미리타엔에서 결국 교국의 신부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대공들이 다시 한자리로 모일 무렵이었다.
애니가 발목을 묶어두었던 그림자를 거두면 그 안에 작살을 정통으로 맞고
기절한 베르가 모트가 보였다.
"이런걸 맞고도 살아있단 말이야?"
"확실히 괴물은 괴물이군."
그런 목소리들이 중간에 퍼졌다.
이제부터 다시 정비를 마치고 대열을 꾸려 전면적으로 교국을 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밑준비를 하고 있던 이들에게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이렇게 다들 모였을 줄은 몰랐는데."
고개를 돌린 그들의 앞에 선 것은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머리는 온통 하얗게 새 버리고 여전히 말라있는 자.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돌아온 거냐 젤렌지."
그 앞을 막아선 데레코즈가 그렇게 말하면 젤렌지도 지지 않았다.
"내 집에 돌아온 것 뿐이다."
"무슨 속셈이냐."
젤렌지의 손에 들린 검은 칼은 기이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엇도 요구할 생각이 없다. 나는 그저 강탈할 뿐이다.
미리타엔은 그런 국가 아니었나? 약자가 수탈당하는 것이 당연한 국가였다.
그걸 너희가, 아니... 네가 바꿨다 에반제인 플로라."
"미쳤군."
"미쳤지. 그렇고말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리 곳곳에 죽어있는 교국의 사제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거리에 널브러져 숨이 끊어진 노예와 숨어든 노예들을 비교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검은 연기와도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와서는
젤렌지의 검에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변한 것은 없다. 이곳은 날 따뜻하게 환영해주고 있다.
오히려 이 땅을 어지럽힌 불청객은 너희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웃으면 그 뒤로 한무리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여운에 취해있는 이들의 정신을 치는 듯한 모습들.
시도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안돼... 안된다...."
"쳐라."
그 말 한마디에 두 군대가 다시 맞붙었다.
일부러 이 시기를 골라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체리메티..."
"오이아르!!!"
두 엘프의 무리를 이끄는 이들이 맞부딫힌다.
불길한 검은 머리칼이 휘날리고 그 앞으로 피처럼 붉은 창이 날았다.
"네가 이럴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체리메티!
기어이 동족들에게 칼을 겨누겠다는 거냐!"
"동족? 누가 말이냐? 잘 봐라. 지금 너와 내가 같은 부분이 있는지를.
더러운 배신자 놈들. 이번기회에 너희를 찢어 죽이고 말겠다."
블러드엘프들은 자신들의 피를 무기로 적들을 상대했다.
전장에서 흐르는 피가 늘어날수록 그들은 더 많은 창과 검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창검에 쓰러지는 이들이 생길 때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와 함께
쓰러진 이들이 썩어갔다.
그러나 전쟁이 블러드 엘프의 일방적인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썩어가는 시체 위로 마력의 편린같은 것이 올라올 때마다 검은 눈을 하고
죽은 이들을 뜯어먹는 엘프들의 모습은 가히 생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저런 더러운 방식으로 마력을..."
"누가 더 더럽다고 말할 수 있나?"
수많은 엘프들은 피흘리는 전쟁을 이어가야했고
마땅한 승리는 없이 그저 소모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무기를 내린 것은 어느 한 쪽이 승리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패배했거나, 더는 싸울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 전장 한가운데서 나이든 마운틴 엘프 하나가 그들의 발을 막고 있었다.
"그만...그만두거라..."
강한 마력도 아니다. 이제 다 늙어버린 그녀에게는 그럴 마력도 없었고,
겨우 부서진 마력회로를 억지로 혹사시켜가며 선봉에 선 엘프들에게
그저 잠깐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었다.
그 찰나의 마법 만으로도 시도라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코에서 피가 흐르고, 쿨럭이는 기침에서는 철맛이 난다.
얼굴도 창백해져 서있는게 고작인 것 같은 그 나이든 엘프가
겨우 바들대는 다리로 걸어간 곳에는 체리메티라고 불렸던 오염된 엘프 하나가 서 있었다.
"비키시죠. 다칩니다."
"벨 테면 베거라."
"우리가 언제까지 당신을 따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죠.
우리가 어떤 각오를 하고 나왔는지 당신은 몰라!"
쿨럭이던 시도라가 바닥에 주저앉는다.
주르륵 미끄러진 것처럼 쓰러진 그녀의 팔을 체리메티가 부여잡고 일으켜 세운다.
"언제부터였느냐. 대체 언제부터 너희가 이렇게..."
"제발 그 착해빠진 척 좀 그만 하십시오 장로님.
아직도 우리를 챙기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제 씨발 현실을 좀 직시할 때도 됐잖아요! 우리는 약한게 싫다고요!
평화를 고수하면서 당하고 죽기만 하던 마운틴 엘프는 이제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욕망을 따릅니다!"
"돌아오세요 장로님! 그놈들에게 묶여서는 안됩니다!"
두 엘프들의 목소리가 겹치는 가운데 시도라는 겨우 자리를 잡고 서서 말했다.
"조금 변했다고 해서, 자기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부모는 없다...
조금 말썽을 부린다고 해서 자기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없단 말이다...
신이 다 무슨 소용이냐... 미안하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싸우지 말거라.
너희가 싸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으냐..."
엘프들의 전의가 하나씩 꺾여가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면서 시도라는
플로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제께서 이 늙은이의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뭔데. 들어는 볼게..."
"아이들을 용서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저 다 같은... 피해자입니다..."
"하아... 이럴 때마다 머리가 아프단 말이야..."
시도라는 그 인파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죽은 엘프들의 눈을 하나하나 손으로 감겨주면서
그 위로 떠오르는 엘프의 구슬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블러드 엘프의 붉게 물들어버린 구슬과 타락한 엘프들의 검은 구슬을
그녀는 하나 하나 주웠다.
그리고는 하나씩 바닥에 내려놓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고 했고, 누구도 다치지 않겠다고 했던 너희의 욕심이
동료들을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이었느냐.
나는..."
시도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만 그대로 피를 토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노쇠한 몸은 이미 너무나 많은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등에는 이미 한번 터져버렸던 흔적이 남은,
겨우 아물어 있는 큰 흉터가 있었고, 거기에서 피가 번지고 있었다.
그대로 쓰러져버린 시도라를 바라보며 그들이 침묵하고 있으면
숙연해진 분위기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시도라의 팔이 유난히 수척했다.
이제는 남지 않는 잿빛 마력이 몸 주위에서 스멀대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젤렌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난 치라고 말했다. 망설이지 마라. 죽여."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이들 사이로 검은 메이스 하나가 내리꽂힌다.
시도라의 몸 위로 푹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렸고,
나이들 엘프의 몸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블러드엘프들은 금방이라도 죽일 기세로 마력을 끌어모아댔고,
피범벅이 된 주위에서 마치 비라도 내리는 것 처럼 붉은 구슬들이 모여들었다.
"정지."
플로라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모든 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너희는 시도라가 아니라 내게 충성했다.
명령이다. 싸움은 금한다."
"하지만 황제시여!"
"불만이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러나 명백히 억울해보이는 그 얼굴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복합적으로 섞여있었다.
"시도라는 저들을 용서하라고 말했다.
나는 저 자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엘프는 공격하지 않도록."
"황제시여!"
"닥쳐라. 저 젤렌지의 목을 베고 나서. 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
플로라가 그렇게 말하면 금새 다른 목소리가 섞인다.
"접근 못한다."
아직도 끼어들 인원이 남아있었다는 말에 대공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데레코즈는 유독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그리고 왜인지 모를 익숙한 얼굴.
미리타엔이라는 국가에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클론을 제공했을 정도로 유약했던 제롬의 얼굴이
이제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있었다.
"제롬, 너 변했구나."
데레코즈가 그렇게 말하면 제롬은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 들고 서서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대치할 뿐.
누구도 먼저 달려들지 않았다.
"젤렌지, 목적이 뭐냐. 다시 묻겠다."
플로라의 말에 젤렌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 미리타엔 제국을 다시 과거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그게 말처럼 쉬울 거라고 생각하나?"
"황제와 삼대공만 아니라면."
"개소리는 교국을 무너뜨린 후에 들어주지. 길을 터라 젤렌지."
플로라가 마력을 담아 명령하면 젤렌지의 앞을 가리던 군사들이 좌우로 길을 터낸다.
그러면 젤렌지는 비웃으며 플로라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한다.
"너야말로 내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을 터라. 애새끼에게 맡기려고 키운 공간이 아니다."
팽팽하던 대치전 사이에 플로라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젤렌지는 한숨을 뱉고 말했다.
"강경돌파하지."
그 앞으로 나선 것은 데레코즈였다.
그리고는 그 역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나서 말했다.
"집사?"
그 말에 염소의 머리를 한 남자가 하나 그의 뒤에 있던 허공에서 걸어나왔다.
"론 체르모니아 마벨디르, 부르셨습니까."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에 책임을 지게."
"제가 만들어낸 결과 말입니까?"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무능한 집사는 싫어하네."
"무능... 무능이라. 그 말을 함부로 악마에게 꺼내시면 안됩니다.
본심을 낼 필요는 있겠군요."
마벨디르가 제롬을 바라보면 제롬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염소."
"당신도 기껏 도망친 줄 알았더니 살아있었군요.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
둘을 뒤로 밀어놓고 나면 엔시온이 말했다.
"어지간히 다 쉬었으면 너도 일어나라. 못다한거 해야지?"
"씨발 아줌마 아니랄까봐 눈치는 더럽게 빨라요.
또 줘털리고 창 뺏기면 다음은 없어."
바닥에 누워있던 베르가모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었던 엘프 하나를 잡아 팔로 그의 목을 꺾더니 바닥에 내팽겨쳤다.
그리고 나서 젤렌지를 뚫어져라 째려보면 그제서야 젤렌지도 죽은 엘프에게서
척추로 만든 것 같은 창을 뽑아올렸다.
엘프의 구슬과 척추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창은 검은 연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그 창을 뺏겠다 엔시온."
그리고 게비디는 몸을 풀어 팔에서 뚜둑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오랜만이구만."
그렇게 말하면 그의 뒤로 자동차 한대가 달려오더니 거기서 킬레리가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목제 상자가 있었다.
게비디는 그걸 맨손으로 뜯어 하나하나 꺼냈다.
두꺼운 강철제 건틀릿. 그리고 견장. 그게 전부였다.
그는 그걸 하나하나 직접 착용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고 게비디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흡...!"
그가 입고있는 흙먼지 탄 수트를 꾸득꾸득 찢어내고 나서
그는 킬레리들이 가져다주는 흰 정장을 차려입었다.
흰 정장에 깔끔한 붉은 넥타이. 바지는 여전히 흙이 묻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까와는 다른 확연한 힘의 차이가 느껴지고 있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이들은 몰랐으나,
블러드엘프들과 플로라에게는 확실히 보였다.
게비디가 전신에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단순한 오크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현상.
그건 게비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마력이었고
그의 어머니였던 엘프가 그에게 남겨둔 마력이었다.
"킬레리 23명, 엘릭서 한병, 콜로세움 운영 금지 기간 13일, 그리고 내 짜증까지.
갚아 주셔야겠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곧장 눈으로 쫒기도 어려운 속도로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쾅소리가 나고 그가 바닥을 내리찍은 주변으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주변으로 휘말린 병사들은 이미 쓰러진 채로 뒷걸음질만 겨우 하고 있었다.
완전히 부러져버린, 아니, 부숴져 버린 칼날들이 바닥에 남았다.
"오빠한테는 못가."
그 앞을 막은 것은 자신도 기세에 눌려 나아오지 못하면서 어떻게든 발목을 붙든 젤라토였다.
"비켜라. 죽는다."
휘리릭 소리를 내면서 휘두른 그녀의 사복단검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막혔다.
건틀릿에 휘감겨 자잘한 흠집만 내고 있는 단검을 게비디가 끌어당기면
오히려 힘없이 거기 딸려가며 바닥에 굴러 긁힌 젤라토는 그의 앞에 서서 말했다.
"넘어가 보시지."
"각오는 했나?"
"그래."
게비디는 곧장 그녀에게 걸어가 한손으로 들어올리고는 곧장 바닥에 내던졌다.
뻐억 하고 울리는 소리는 아마 뼈가 부러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임신이군. 앞에서 설치지 말고 쉬어라. 조절은 해뒀다."
단번에 정신을 잃은 젤라토를 이단자들이 데리고 사라진다.
"나와라 젤렌지."
그제서야 젤렌지는 천천히 걸어 그의 앞으로 나타났다.
"누구 아이냐?"
게비디는 한 마디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아이다."
젤렌지가 대답하자 게비디는 곧장 그 역시 한손으로 들어 바닥에 메다 꽂아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검은 갑옷이 찌그러진다.
젤렌지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게 게비디는 곧장 그 쓰러진 다리를 붙잡아
바닥에 내리친다. 또 한번 쾅 소리가 난다.
갑옷을 구겨버릴 기세로 바닥에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손을 그야말로 공포와도 같았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들고 게비디는 플로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께서는 해야 하는 일을 하시지요."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정리할 수 있겠어?"
"조금 쉬기야 했지만 이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그 말에 플로라는 애니를 안은채로 주변을 슥 둘러보고 적진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누구도 플로라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도리어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이들은 바닥에 늘어진 그림자 밑으로 빠져 사라졌다.
대공들과 군대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은 후에 플로라가 말했다.
"내가 할 일은 교국을 무너뜨리는 일이야. 그걸 바라셨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교국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무기가 있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