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놓아버리다.
* * *
미리타엔에서는 여전히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교전은 점차 양측을 피폐하게 했다.
먼저 검을 휘두른 것은 류해백이었다.
그 검이 마벨디르에게 닿는 일은 없었으나 분명히 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제롬이 가지고 있었던 그 아주 약간의 동정마저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걸.
그저 벌레를 상대하는 것 처럼 긴장을 풀고 싸우다가는 정말 그 작은 팔에 목덜미를 붙들리게 될지도 몰랐다.
"분명 저번에 서로 만족하고 거래를 마무리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아직도 뭔가 미련이 남았습니까?"
"자기증명..."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악마를 상대한다는 겁니까?"
"고작 그런 것."
한층 더 빨라진 칼이 허공을 가른다.
이윽고 바닥을 내리치는 쾅 소리에 시선이 모인다.
점차 더 빠르고 강해지는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면서 마벨디르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수준과 맞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하급악마라고 해도 그 존재는 결코 인간이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확인 끝."
해백이 그렇게 말한 순간에 마벨디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가벼움. 그리고 쓰라림. 있어서는 안될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하지만 보이는 것은 오직 해백과 그의 검 뿐이었다.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의 팔을 확인한다.
깔끔하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잘려나가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검은 팔과 어깨 아래로 깔끔하게 비워진 몸.
이럴리가 없었다.
"왜 말이 없어? 악마들은 입이 팔에 달렸나?"
뿌드득 이를 갈고 마벨디르는 자신의 텅 빈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예상밖이군요."
"우리는 신을 죽일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악마 하나 죽이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지."
"하지만 아직 전...!"
그 말을 내뱉던 마벨디르는 멍하니 다시 한번 허전해진 몸을 내려다본다.
아까와 같은 감각. 잘려나간 다리에 몸이 기울어진다.
이럴리가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인간의 움직임을 눈으로 쫒지 못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 그리고 강해지고 싶었던 사람.
둘을 섞어놨으니 자신보다 약한 건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나온거다.
네가 만들어낸 결과다."
해백이 관찰했던 사람들의 움직임. 한평생 바라보고 익힌 전투.
그걸 행할 수 있는 반응성 좋은 육체가 나타났다.
더 강해지길 바라고 약한 것을 거부하고 끝내 자신이 인정한 사람의 아래에 서길 바라는
그 높은 목표는 기어이 괴물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제서야 해백은 자신이 무언가를 또 한번 뛰어넘었음을 직감했다.
"죽어."
그 검이 마침내 그 악마의 몸을 양단할 때 마벨디르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머니..."
마벨디르는 바닥에 떨어졌고 그 목에는 무자비하게 칼이 박혔다.
침묵이 이어졌고, 그런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데레코즈는 자신의 차례임을 직감했다.
하는 수 없었다고 하지만 데레코즈는 앞으로 한걸음 나아갔고, 유일하게 자신에게 남은 주문을 제창했다.
"오퍼링."
뿌득.
뿌드득.
무언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데레코즈 혼자의 직감이 아니었다.
곧장 해백은 데레코즈에게 일직선으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고
성급하게 피하던 데레코즈의 품에서 담배가 흩뿌려졌다.
다음 공격에 데레코즈가 반응하기도 전에 검은 그대로 데레코즈의 복부를 꿰뚫는다.
"하아... 이런 괴물이 될 줄은 몰랐는데."
"데레코즈!!"
엔시온이 칼에 찔린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호흡이 흐트러지면서도 데레코즈를 눈으로 쫒으며
베르가 모트의 공격을 여떻게든 막아내는 그녀 역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데레코즈는 엔시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체념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입술을 물었다.
후회의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 끝을 냈어야 했다.
혹은 자신이 더 신경을 써 주었어야 했다.
어느 쪽인지 잘 모르지만 그의 입은 거기서 닫혔다.
다만 체념한 표정 사이에서 그는 자신의 배에 꽂힌 칼을 바라보았다.
데레코즈가 바라본 그곳에서, 불룩하게 솟아나기 시작한 무언가가
데레코즈의 몸에서 부풀어오르듯 커져갔고,
해백이 박아넣은 칼을 타고 기어올랐다.
찰나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철썩 하고 들러붙은 타르, 정제되지 않은 원유와도 같은 것이 그 몸을 천천히 무너뜨렸다.
꾸물거리는 그 덩어리를 떼어내기 위해 해백이 발버둥쳐 보지만 오히려 더 그 몸을 죄여가고
마침내 해백을 쓰러뜨리고 그 위를 덮어버리고 만다.
그 덩어리는 꾸물거리며 땅 속으로 천천히 파고들었고, 불쾌한 악취를 풍기며 사라져갔다.
마침내 그곳에 남은 것은 눈을 감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 해백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해백이 쓰러진 순간은 잠시였다.
곧바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칼을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딘가 이상한 자세로 비틀거리며
그대로 다시 주저앉아버리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칼을 어떻게든 잡으려고 한다.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 사람이 보일 움직임이 아닌 것 같았다.
"어어...!"
비틀거리는 움직임을 멎지 않았다.
겨우 자세를 잡고 다시 일어난 해백이 처음으로 보인 행동을 쿨럭이며 피가 섞인 기침을 뱉은 것이었다.
이상하게 허덕이는 모습,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풀려버린 눈.
훌쩍이는 호흡과 쇳소리가 섞인 숨.
"하아... 아냐... 아냐...."
소리를 지르려고 한 것 같지만 그마저도 먹먹하게 먹혀 울리지 않는다.
바르르 떨리는 손은 자꾸 무기를 놓친다.
"무슨 상황이지?"
엔시온이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 해백은 그대로 옆으로 쿵 쓰러져버렸다.
최후의 오퍼링이었다.
데레코즈의 오퍼링으로 바친 수명이 곧 그의 마지막이 되어버렸고
그의 수명 전부를 바친 대가로 해백이 가져간 것은 데레코즈가 한평생 사랑했던
담배와 시가, 에라옥신으로 망가져버린 몸이었다.
흑마법의 기본, 어쩌면 원초적인 흑마법.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하는 것.
아무도 데레코즈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대가였다.
담배를 한번도 피우지 않았던 해백에게는 더 강하고 극심한 고통이었다.
그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섰는데, 그가 한걸음을 내딛으며 검을 부여잡고
게비디쪽으로 달려가는 순간, 그의 코에서 피가 한줄기 주르륵 쏟아졌다.
"앞으로 운동은 못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움푹 파인 얼굴을 하고 퀭한 눈으로 바라본 곳에는 킬레리가 서 있었다.
"네가...네가 시발 뭘 알아...!"
"다른건 몰라도 소시지와 닭다리 훈제를 주문한 당신의 구겨진 표정은 알고 있습니다."
그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너...너는..."
모두가 같은 모습인 줄 알았던 그의 눈에 비친 킬레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때 그 표정은 분명 꼴보기 싫은 얼굴이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았던 것 같습니다."
해백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강해지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돌아보았다.
막연히 떠오르지 않는 사고를 이어붙이면 그 먼 곳에서 꾸물거리는 것이 있었다.
처음 도서관을 통해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 자신이 해야할 일은 하나 뿐이었다.
도서관이 제시하는 사건속에서 맡은 임무를 해결하는 것.
사건을 해결하거나, 혹은 실패하거나. 어차피 살던 그 곳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그 당시의 해백에게는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방인인 자신을 받아준 사람을 만났다.
늙은 사냥개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빈포드는 정말 자신을 아들로 생각하며 아껴주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없는 사이 목숨을 잃었고 그 원수는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처음으로 평온했던 그의 마음에 누군가 돌을 던진 것 같았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었던 이 세계가 그와 연결점을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자신이 멋대로 빈포드의 죽음을 도서관이 제시한 사건이라 단정지었고
그 사건을 조사하던 와중에 제롬과 뒤섞여버리고 말았다.
단지 조금 꼬였다고 생각했던 그를 한번 더 막아세웠던 것은 그에게 에스메랄다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아껴준 한명의 여자였다.
본체는 이미 죽었다고 말했고 고작 클론이라고 말했다.
알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함께한 순간이 행복했고
순간순간 인간적인 부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끝을 고해버렸다.
영원히 잃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잃어버렸다.
자신을 알아주던 사람들은 더는 남아있지 않았고
일그러진 신념만 남아 강박처럼 가슴을 옭아매고 있었다.
왜 강해지려고 했었는지 잊어버린 채로 그저 강자의 뒤를 따랐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몸을 던지고 있었던 그의 원초적인 목표가
지금 막 떠올랐다.
지키고 싶었다.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주는 사람들을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빈포드, 에스메랄다. 그리고 이제는 제롬을 믿고 의지해주던 데레코즈마저도 죽였다.
눈 앞에서 시체도 찾지 못하게 사라져버린 모습이 생생하다.
왜 그랬더라.
몸이 무거웟다.
손에 든 칼이 왠지 더 어두워 보였다. 피로 얼룩져 있는 칼은 흉측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누더기처럼 기워진 낡은 갑옷에 너덜너덜해진 몸.
숨을 쉬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자신을 내려다본다.
"나, 상당히 초라했구나."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내려다본다.
내리쬐는 햇살이 구름에 가린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살마저도 이제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고막을 때린다.
"돌아가면 다시는 이곳을 찾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있엇던 기억을 지우고
원래 처음부터 이런 세상따위는 몰랐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사십시오.
당신은 그릇도, 힘도, 한참 모자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킬레리가 자신의 앞에 종이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노릇한 냄새.
모듬 소시지 구이였다.
"당신이 좋아하던 그 가게에서 구입했습니다."
"그런 가게. 안좋아한다고."
"그렇습니까."
바닥에 툭 내려놓은 종이 상자의 틈이 벌어지고 보이는 소시지를 두고
킬레리는 그 자리를 유유히 벗어났다.
"ㅇ..아..ㄴ..."
안돼. 가지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답답하게 낀 가래가 목 아래서 끓었다.
미리타엔의 한복판에서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휩싸인 채로
해백은 겨우 목 아래를 짜내듯 말을 뱉었다.
"이게...이게 아니었어... 내가 바란건... 나는 이런 곳에서 이렇게...!"
숨이 가늘어진다. 점점 가빠진 호흡이 마침내 고르게 정렬된다.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은 기분에 순간적으로 빨려든다.
곧이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어둠과 연달아 들리는 군대의 발소리.
그저 찰나의 순간, 잠시 눈을 감고 떴을 뿐이었다.
낡은 방. 그리고 낡은 옷장. 그리고 갑옷이나 헤진 상처따위는 없는 손.
그리고 창 밖으로 지저귀는 햇살, 낡은 빌라의 폐쇄된 단칸방.
발치에 걸리는 책.
해백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돌아...온거구나."
며칠이나 있었는지, 또 어떻게 지낸건지 알 수 없다.
처음 그 곳에 떨어졌을 때처럼 낯설다.
"그...곳...?"
해백은 눈물을 닦는다.
분명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왠지 모를 아련함만 남았다.
그곳이 무엇인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천천히 지워지는 기억들 속에서 왠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그런 단어들만
머릿속에서 떠오를듯 점멸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든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가득하다.
[진누리 여사: 집에 오기 전에 연락 한번 주렴. 아들 좋아하는 소시지 구워놓을게.]
"엄마네?"
그의 어머니는 이제 나이가 40을 넘어 50에 가까웠다.
검은 머리칼이 잘어울리는 미모의 외국인 여성이었다.
국적은 알 수 없으나 한국으로 귀화했다고 했다.
이름은 귀화할때 참된 세상이라는 뜻이 좋아 지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몇 번째?"
라는 식의 장난만 치곤 한다. 실없는 장난만 아니라면 좋은 사람인데.
능력있었고, 똑부러지는 성격이라 인기도 많았다.
가끔 멍하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가 있어서 그렇지 이상할 것도 없다.
왜 이곳에 있었는지도 이제 잊어버린다.
도서관도, 미리타엔과 유레크로스도. 모든 것들이 그저 한여름밤의 꿈처럼 날아간다.
머릿속이 하얗게 흐려지는 것을 그는 막지 못했다.
"개꿈이네..."
고개를 저어 생각은 털어버리고 밖으로 나간다.
안쪽에서 잠긴 단칸방 문은 삐걱이긴 하지만 쉽게 열린다.
그가 나간 단칸방의 문이 다시 닫히고 어둠만 깔리고 나서
조용히 책의 첫 페이지가 넘어간다.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스스로 모두 놓아버리다.]
첫 페이지에 적힌 글귀는 물에 뜨는 잉크처럼 둥실 떠올라 창 밖으로 흘러갔다.
선택받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결국 그 경험을 지워버린 안타까운 인간으로
한명의 여행자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말았다.
무엇도 남지 않았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무엇도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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