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77화 (277/303)

〈 277화 〉 그녀들의 사정

* * *

"대체 얼마나 나를 만만하게 봐야 나를 앞에두고 한눈을 팔아?

너도 똑같은 년이었어. 후우... 그러니까 모두 널 떠나는 거야."

"미친년. 스승에게 말조차 가리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탓하겠다고."

엔시온은 창을 크게 돌리며 자세를 고쳤다.

베르가 모트의 눈빛을 보면 분명 둘은 누구보다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엔시온은 처음 베르가 모트가 자신을 찾았을 때를 떠올렸다.

아버지를 막 떠나보낸 그녀에게는 대공이라는 자리가 아직 무겁다고 느껴졌을 때.

그녀가 어김없이 학회로 연구를 위해 출퇴근을 반복하며 푸른 별의 연구를 집필하던 시기였다.

퇴근하던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작은 소녀가 있었다.

머리는 다 헝클어지고 옷은 때가 잔뜩 타 있었는데

마치 야생 들개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학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바둥거리면서도 눈만은 똑바로 엔시온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미 수 차례 제압을 시도한 것 같았다.

어정쩡하게 선 이들 사이로 아이의 멍든 팔이 보였다.

"네가 여기서 제일 쎄다며!"

처음으로 빽 내지르는 아이의 첫 말은 그것이었다.

강해지고 싶다. 그런 말을 내뱉는 아이에게 이유는 묻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몰라."

"모른다고?"

그 눈은 거짓이 섞이지 않았다.

그래서 엔시온은 그녀를 믿기로 했다.

거두어들인 이유는 그것 뿐이었다.

하루 한시간씩 공부를 봐 줬고, 시간이 남는대로 창술을 가르쳤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창술이 제일 익숙하니까.

베르가 모트는 금방 그녀의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러나 이상하게 공부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분명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저 흥미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넌 왜 강해지려고 하는거냐?"

어느날 문득 바람이 불던 날 엔시온이 물었다.

미리타엔으로 장기간 돌아가지 않고 협회에서 머문지 46일째 되는 날이었다.

"갖고 싶은게 있어서."

"갖고 싶은거?"

"강해지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엔시온은 더 베르가 모트를 챙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뿐인 제자였으니까.

물심 양면으로 아낌없이 지원을 거듭했고, 그녀의 성장에 기뻐했다.

그런 베르가모트가 엔시온을 떠난 것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엔시온이 당시 진행하던 푸른 별의 연구 막바지에 학회는 혼란을 겪고 있었고

이는 연구자들이 몰두하는 것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엔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라고 하면 하나 뿐이었을 것이다.

학회의 문을 두드리는 남자의 질문.

"엘라 세리타인을 알고 있나?"

그 질문에 학자들은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는 이 현상을 좌시하지 못하고 학회를 한동안 봉쇄했고,

연구자들이 악마와 내통했는지에 대해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대화를 빙자한 심문과 취조를 강행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이 묶이는 탓에 엔시온은 베르가모트를 챙기지 못했다.

그 기간은 무려 2주에 달했고, 베르가 모트는 그 기간동안 홀로 남겨져

엔시온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베르가 모트는 학회 앞에서 고래고래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모욕을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엔시온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이해해야지... 안타까운 아이니까..."

2주 뒤에 그녀가 학회의 무고를 선고받으며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이미 베르가 모트는 사라진 이후였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결별로 곧장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둘의 재회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2주 동안 방황했던 베르가 모트였지만 그녀의 행방을 쫒지 못할 정도로

엔시온은 무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행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고 있었고,

어디서도 그녀를 곱게 보는 시선이 없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위치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시시각각 전해지며

제발 그 광인을 데려가달라는 말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엔시온이 그녀를 발견한 곳은 엠페레스의 지하 투기장이었다.

그녀가 지하 투기장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엔시온이 그녀를 찾기 9일 전쯤의 일이었다.

그 9일간 엔시온은 투가징에서 연패를 이었다고 한다.

처음 엠페레스에 발을 붙인 소녀는 통제하는 이 없이 성깔에 따라 거리의 모든 이들을

마치 벌레 짓이기듯 때려패고 다녔고, 소문이 퍼져 한 남자가 찾아왔었다.

지하 투기장을 소개받은 베르가 모트는 곧장 그곳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그녀에게 투기장이 제안했던 것.

정식으로 이곳에서 투사로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곳에는 그 남자가 없으니까. 자신을 떨게 했던 남자가 없으니까.

다만 투기장에서 싸움을 반복하며 그녀는 수많은 패배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누구보다 꾸밈없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보았다.

더러운 음담패설과 본능, 그리고 잠시라도 눈이 맞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먹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침을 뱉고 패배자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가혹한 그 모습은

이제껏 그녀가 본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투기장에서 투사로 일하라는 것. 그녀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단 그녀 나름대로 이곳의 풍경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다른 어딘가에서 보고 싶다는

그런 환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투기장은 반드시 거쳐야할, 강해지기 위한 발판이었다.

그 대신 지하 투기장에 협력할테니 그동안 자신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녀는 투기장의 지하를 돌아다녔고, 마침내 그곳에서 작은 난쟁이를 만났다.

아마 드워프나 기타 준하는 종족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작은 체구를 하고

조금은 시큰둥한 눈으로 베르가 모트에게 처음 말을 붙인 그 난쟁이를

베르가모트는 초장부터 때려 패서 반쯤 죽여놓았다.

사유를 물으면 그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드워프를 때려패고 나서 적당히 밖에 널브러뜨려 놓으면 점차 시간이 지나며

안쪽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베르가 모트가 알고 있는 얼굴들.

밖에서 그녀에게 주먹떡이 되었던 이들. 누군가는 팔이, 누군가는 다리가 부러졌고,

코뼈가 부서졌다거나 이가 빠진 이들도 있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베르가 모트는 그들을 모두 한쪽에 몰아놓고

잠을 청했다.

한참 후에 자신을 투기장으로 초대했던 남자가 방 문을 쾅 하고 열어젖히고 들어와

베르가 모트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주변을 둘러본 후에

차분하게 말했다. 마치 화를 억지로 눌러 참는 모습 같아서 베르가 모트는 웃음을 참았다.

가식적인 모습. 자신이 증오하는 그 가식적인 얼굴이었다.

"그 드워프는 이 투기장의 의사를 맡고 있었다.

비록 불법이고 무허가이긴 하지만 더없는 실력자였지.

그런 놈을 한동안 현장에 서지도 못하게 만들면 어쩌자는 거냐."

의사. 베르가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끌렸다.

"의사? 내가 하지 뭐."

그렇게 이어진 탓에 베르가 모트는 인체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그 드워프가 남긴 책들이었다.

드워프가 깨어나고 나면 정식으로 가르치게 될 거라는 말은 했지만,

스스로 때려눕힌 드워프 탓에 반쯤은 강제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호기심이 섞인 충동에서 기인한 의사 활동이 순탄할리가 없었다.

그녀는 부상자를 구분할 능력도 없었고 수슬 방법도 몰랐다.

결국 그녀는 환자의 반응을 살피며 어떻게 하면 대상이 죽는지,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에 신경이 없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죽일 수 있는지 알아냈다.

결국 자의적으로 그녀에게 수술을 받으러 오는 이들은 눈에 띄게 줄었고

환자로 집계되지 않은 탓에 그녀는 서류상으로는 높은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재방한 환자가 없는 의사라니.

4일이 더 지나고 나서 드워프가 다시 눈을 뜨고 나서 그에게 제대로 된 의학을 배우고 나서야

그녀는 정상적인 의사 활동을 겨우 조금은 흉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어린 아이들이 놀 때 처럼 단순히 매스라느니, 부목이라느니,

그저 투사들을 위한 간단한 야매 치료 정도에 불과했다.

여전히 그녀의 수술은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부탁할 수도 없는

괴기스러운 수준이었다. 성공률도 극히 낮았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몸을 맡기는 투사들은 줄지 않았다.

무엇도 얻어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드워프마저도 틀린 것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배워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추구하던 것이, 다른 사람을 고통으로 보내는 것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고

그 모습에 누군가는 금액을 지불하고 열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기억하던 그 남자에게서도 느껴졌던 사특하고 붉은 기운.

그건 피와 죽음이었다.

늘 그와 가까운 충동을 느낄 수 있었던 장소에서 그녀는 만족하고 있었다.

엔시온은 그런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무슨 생각이야?"

"저기라면 알아줬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그리고 뭘 해야 하는지!"

"불법 지하 투기장에서 네가 원하는걸 이룰 수 있다고?

네가 원한다는 강함이 고작 저런 걸 위해서였어?"

"고작 저런 거?"

"창 잡아. 시작하게."

엔시온은 그녀에게 창을 건네주고 다시 대련을 시작했고

일방적으로 베르가 모트를 구타했다.

더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때렸다고 생각할 때에도

베르가모트는 어김없이 일어서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좀 들어?"

"정신은 모르겠고 너한테 꼭 다시 한대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드네."

"그거면 된 거야."

"뭘 맘대로 끝내 씨발년아! 덤벼! 이리 오라고! 야!"

엔시온은 베르가모트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날 이후로 베르가모트는 엔시온에게 본격적으로 창술만을 배웠다.

창술과 함께 그녀가 조금 더 높은 목표를 가지기를 바랬다.

시간이 흐르고, 6년이 지나서 엔시온이 물었다.

"상당히 잘 따라오는구나. 여전히 공격적인 성향이지만 내가 가르친 것들은 잘 써먹는 축이고.

이정도면 이제 어지간한 사람들한테는 지지 않을거야."

"넌 너무 수비적이야. 난 더 강하고 짜릿한 걸 원해.

내가 느낀건 고작 이정도가 아니었다고."

"더 강하고 짜릿한 걸 찾는다면 이 무기를 골랐으면 안되지.

넌 창을 배우러 온거잖아? 창은 공격 방식이 찌르기 뿐인 무기야.

휘두르고 베는 시원한 액션 같은건 없다고.

그런걸 원하는 거였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지.

넌 분명 재능이 있다 베르가 모트."

"이런 방식은 아니었어. 이래서는 집을 떠난 이유가 없다고.

넌 아니었어. 약해. 그냥 쫄아서 쳐 막기만 하고. 병신같아."

"뭐?"

"병신같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집을 떠났다고?"

"그게 왜?"

"부모님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잖아."

"내 알바야? 어차피 씨발 나한테 관심도 없을걸.

그래서 내가 버렸어. 두근거리지도 않았고, 꼴리지도 않았거든."

엔시온은 차갑게 머리가 식는 것을 느꼈다.

불길한 기운이 목 뒤를 쓸고 지나간다.

쾌락. 너무나 강한 쾌락에 편향된 이 아이의 사고방식에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그제서야 베르가 모트를 제대로 바라본 것 같았던 엔시온은 그녀에게 몇가지 질문을 했다.

불안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그날의 훈련을 마치고 엔시온이 베르가 모트를 데리고 간 곳은

제국령의 낙인사였다. 낙인을 전문적으로 새기는 이들에게

베르가 모트를 데리고 가서 그녀가 부탁한 것은

그 아이의 정신을 분석해달라는 것이었다.

확실해졌다.

조울증. 그리고 극적인 파괴성 행동장애. 간헐적 폭발 장애.

지속적인 도피와 충동성 폭력으로 인해 그녀를 바로잡아줄 사람이 전무했고,

결국 도착증이 섞인 채로 방치되어 뇌에서 오랜 시간 마약을 복용한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쾌락을 수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더 강한 자극. 그리고 더 강한 위협에 반응하고, 그 외의 부정적인 반응은 지워버리며

그 감정의 거스러미는 곧장 그녀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트리거가 된다.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었다.

충격에 빠진 엔시온은 그녀와 함꼐 거리를 걸으며 물었다.

"이건 아냐... 모트, 강해지려고 한 이유가 뭐였어?"

"가지고 싶은게 있었다니까."

"가지고 싶은게 대체 뭐야?"

"남자. 피냄새가 물큰 올라오는 섹시한 남자."

엔시온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널 잘못 봤구나."

거리를 벌린 쪽은 베르가 모트였다. 눈빛이 변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창을 꺼내빙빙 돌리며 엔시온에게 그걸 겨누었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렸고 그녀들은 서로 창을 부딫혔다.

"잘못보기는 병신이. 갑자기 사람을 실험용 쥐새끼처럼 갖고 놀더니

이제와서 지 혼자 지랄 염병을 떨고 앉았네. 야 씨발 때려 쳐 개년아."

빠드득

빠드득 소리가 들리고 엔시온은 더 빠르게 창을 휘둘렀다.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제자로 들이면서까지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은 더 좋은 것과 멋진 것 뿐이었고

그를 위해서 더 훌륭하게 그녀의 앞에 서고 싶었던 마음에

협회를 드나들면서도 창술 연습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쩌면 홀로 무언가를 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눈동자에 그녀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동질감을 느낀것은 자신의 초라한 착각이었다.

이끌 수 있는 충견이 아닌, 통제할 수 없는 들개였다.

애초에 그 시선에 자신과 같은 부분은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엔시온이 마주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고통스러울지만을 반복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베르가 모트였다.

"넌 창을 들어서는 안되는 아이다."

"그 말을 왜 네가 해?"

"너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집에 있겠지. 내가 버리고 떠나온."

처음부터 자신에게 신용 같은 것은 없었다.

그건 서로에게 마찬가지의 의미로 다가가고 있었다.

엔시온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창으로 베르가모트를 몇 번이나 후려치고 나서 일방적으로 등을 돌렸다.

"이제부턴 알아서 해."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는 베르가 모트를 버려두고 떠났다.

그렇게 헤어졌었다.

이제와서 마주하는 것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씁쓰름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무기 들어 씨발년아."

다시 매섭게 자신의 목을 노려오는 그 창날을 피하고 빈틈을 노린다.

베르가 모트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 순간까지도 꾸준히 강해져 왔을 저 제자에게

오랜 시간 대공의 자리에 안주하며 창을 놓았던 자신이 밀린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

두번, 세 번도 이어질 거라는 불안감이 자꾸 머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데레코즈도 사라져 버렸고, 게비디도 이곳을 신경쓸 여유는 없어 보였으며

엘프들은 어떻게든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할뿐, 이쪽에 가세하기도 어려워보였다.

두번의 공멸은 제국에게 큰 손실을 가져온다.

누적된 싸움으로 피로해진 이들에게 한번의 패배는 사기저하로 이어진다.

짧게 끝내야 했다.

붉은 갑주를 한쪽 팔로 쓰다듬어본 엔시온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널 받아서는 안되는 거였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더 면밀히 조사했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서도 널 그 나락에서 꺼내주어서는 안되는 거였다.

넌 실패해야 했고 내가 그런 널 끌어올려 버렸지."

"지랄하네."

"입 닥쳐 아직 말 안끝났으니까.

이제까지 널 그냥 바라보았던 것은 내가 대공이었고 이 자리에 쌓아올린게 너무 많아서,

내가 아직 잃은 것을 그리워하고 잃을 것을 두려워하던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실책으로 이 이상으로 피해가 커진다면 이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실책은 책임지고 내가 치워야 하는 거겠지."

"그래서 어쩌라고. 이제와서 설교라도 하자고?

진짜 모가지 뜯기고 싶어?"

"후우.... 덤벼. 비겁한 겁쟁이는 이제 그만 하련다."

엔시온은 그렇게 말하고 핏물 섞인 침을 탁 때려뱉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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