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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78화 (278/303)

〈 278화 〉 만약은 없다.

* * *

엔시온은 창을 두 손으로 꾹 쥐었다.

목표는 하나였다.

지지 않는 것. 죽지 않는 것을 포기한다. 내 안위를 포기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 눈 앞에 있는 저 괴물을 더 커지기 이전에 자신의 손으로 잘라낸다.

그것이 그녀에게 들어온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 두가지였다.

하나는 유효타를 지속적으로 넣을 수 있어야 했고, 모든 공격을 방어하지 않는 대신

피해낼 수 있어야 했다.

창의 공격 방식은 찌르기. 끌에 닿지 않는 것이 주된 싸움의 방식이다.

하지만 그 긴 리치는 방어에 상당히 특화되어있다.

창과 창의 전투라면 당연 방어하는 쪽이 먼저 들어온 상대의 창을 쳐내고

유동적으로 경우를 선택하게 된다.

그런 불리한 요소를 온전히 감당해내면서도 이길 자신이 있어야만 선택할 수 있는 것.

방어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더 빠른 맹공. 멈추지 않는 연계. 그리고 결국 숨쉴 틈을 주지 않는 연격.

그것이 엔시온이 생각한 모든 것이었다.

유연하게 돌렸던 연계의 기반은 무기의 변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곧장 가장 날카로운 형태로 창을 전환했다.

봉침과 같은 첨예한 형태.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치켜올리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리고 시선을 베르가모트에게 고정한다.

그리고 몸을 낮추고 중심을 앞으로 꺾는다.

한순간에 튀어오르듯 앞으로 날아가는 몸은 말 그대로 하나의 탄환과 같았다.

붉은 탄환과 다를 바가 없었던 그 모습에 빠르게 베르가 모트는 반응하기 위해

창을 뻗어 휘둘렀으나 그 창은 그저 붕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엔시온의 창이 베르가 모트의 목 아래를 빠르게 노리면 베르가 모트는 창을 피해

고개를 뒤로 젖혀 순간적으로 몸의 탄력을 이용해 뒤로 한바퀴 굴러 피한 후,

바닥에 창을 내리꽂아 그 힘으로 몸을 들어올렸다.

공중으로 빠르게 도약하는 순간 자세를 고쳐잡고 엔시온을 노리려던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이미 자신의 바로 턱밑에서 창을 바짝 대고 쫓아올라온 엔시온이었다.

"이 씨발년이..."

창을 피하는 쪽은 오히려 베르가 모트가 된 상황이었다.

몸을 뒤로 젖혀 다시 한번 창을 피해내는 베르가 모트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리고

창을 다시 겨눈 후에 소리쳤다.

"날 속였구나 엔시오오온!! 이런 기술이 있었으면서 내게 숨기던거냐!"

"....."

"무시..? 무시냐? 이렇게 만들어놓고 날 이제와서 무시하겠다는 거냐?

이기적인, 아니 독한 년."

때려박히는 창은 끊임없이 연달아 날아든다.

봉의 특성을 살리는 싸움. 이제까지의 엔시온이 봉의 거리와

회전을 이용한 '면'으로써의 방어를 위주로 했다면,

이제는 면과 면을 잇는 연계로 '공간'을 입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부족한 회전은 공격 사이의 빈틈을 줄이는 것으로 이어나간다.

상처가 늘어가고, 베인 상처는 점차 쓰라려온다. 얻어맞는 감각은 익숙해지지 않고

이미 갈비뼈 몇 대는 나간 것 같았지만 그녀는 꾸준히 발의 스텝을 유지하려고 했다.

속도가 늦춰지면 곧바로 반격이 날아든다. 더는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시작하며 보이지 않던 각에서 찌르기가 들어간다.

피할 수 있는 공간의 범위를 늘리고 있다.

그 증거로 베르가 모트의 공격은 유효한 피해 한번 내지 못하고 허공만 가르고 있었다.

베르가 모트 역시 화가 단단히 난 것인지 씩씩대며 팔을 돌려댔으나

이제까지 베르가 모트가 상대한 것과는 다른 패턴 그리고 다른 연계였다.

그렇게 이어지는 합 중에 한 번. 한 합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엔시온의 창이 가로막히고

베르가 모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즉시 창으로 반격한다.

한번 말린 공수전환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역량으로 그 차이를 메꾸기 시작했다.

분명 쳐냈을 터인 엔시온의 창이 점점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베르가 모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막아냈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이나 쳐내도 그 창은 찰나의 순간에 다시 눈 앞으로 날아와 목을 노린다.

"대체...뭐야 시발..."

빠르게 방향을 바꾸고 다시 쳐낸다.

그것이 반복될 수록 팔에 쌓이는 피로가 늘어가고,

엔시온의 이마에도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베르가 모트는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전선에서 이탈하고 있었던 엔시온은 비록 그 실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결국 그 체력에서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가 성신으로 끝내 오르지 않은 이유는 곧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뒤져!!!"

따악 소리를 내며 엔시온의 창을 쳐낸다.

베르가 모트는 그것만으로도 승리가 자신에게 떨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엔시온이 손에서 한 줄기 피를 흘린다.

이 때를 기다려 왔던 것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까지 기다린 것은 엔시온의 손이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은 무거운 창과 갑옷의 무게에 짓눌리고 마찰에 의해 조금씩 찢겨갔다.

엔시온은 손에서 핏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창을 잡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덕에 주변으로 튄 붉은 피가 날렸다.

그 모습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무엇보다도 붉은 전장의 요정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피를 흘려 차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엔시온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눈은 더 또렷하게 목표를 노려보고 있었다.

창날에 베여 베르가 모트의 어깨는 깊은 상처에 피가 번지고 있었고

엔시온 역시 피로가 과하게 축적되어버린 팔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투구로 보호하고 있는 얼굴에도 피로가 몰려 눈이 감기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치켜뜨고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아무리 피한다고 해도 방어를 전면으로 포기했기 때문에

엔시온의 갑옷에 누적된 피해는 그녀의 몸 곳곳에 멍이 들게 만들었다.

쉴새없이 이어진 합에 베르가모트의 창은 결국 뚜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더는 무기로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난 창을 내던지고

베르가 모트는 한 손으로 그 창을 받으려 했다.

마침내 푹 하고 창이 쳐박히는 소리가 났고, 베르가 모트의 손바닥을

정통으로 뚫어버린 엔시온의 창이 베르가모트의 피로 젖어 해에 빛났다.

"잡았다. 날파리같은 새끼."

까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고 베르가모트는 그 손으로 창을 꽉 틀어잡고 당겼다.

"두번이나 당하면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거든!

넌 똑같은 걸로 나한테 뒤진다."

그렇게 창을 틀어막아 베르가 모트는 엔시온의 창을 붙들었다.

사실상 한쪽 손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위였기 때문에

그 피해는 상당했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엔시온의 공격이 그만큼 효과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베르가 모트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천천히 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엔시온은 오히려 그 창을 밀어넣으며 상처가 벌어진 손과 어깨 안쪽으로

창을 밀어넣었다.

"끄아아아악...!!!"

창은 팔과 어깨를 나란히 관통하며 박혀 고정되었고,

베르가 모트는 피가 철철 흐르는 팔로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쩔건데! 뭘로 날 죽일 생각이지?

해봐 씨발. 해보라고!! 내가 과다출혈로 죽는게 빠를까,

이 거리에서 네가 나한테 맞고 얻어터지는게 빠를까 보자!"

베르가 모트가 그렇게 외쳤을 때였다.

푸욱. 깊게 가슴을 찔러오는 통증이 매섭게 심장을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무슨...?"

고개를 아래로 내린 베르가모트의 두 눈이 떨리고 있었다.

분명 아무 것도 없었을 터인, 그리고 그랬어야 할 엔시온의 손에는

어느새 꽉 잡힌 금빛 단검이 있었다.

그 날은 자신의 심장에 찔려 울컥이며 뿜어지는 피를 받아내고 있었다.

"너... 시발...이게 뭐야...."

"....."

"이게 무슨... 야.... 아니지...?"

"....."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엔시온의 눈에는 이미 동정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불쾌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눈이 오래전 자신에게 그랬듯,

그날처럼 내리꽂혔다.

"이런 씨발... 쿨럭...!"

입에서 거칠게 피를 토해내고 나서 베르가 모트는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함께했던 교인들도 이미 도망쳐 사라져있었고,

본대에서 온다고 했던 지원은 미리타엔의 두터운 방벽을 넘지 못하고 죽어갔으며

이제라도 합류한 줄 알았던 검성과 젤렌지 연합은 자신에게 눈길 조차 주지 않고

그저 죽어가는 자신은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번 만이라도 죽기 전에 다시 보고 싶었는데..."

사랑했던 그 남자를 닮은. 차갑던 아이.

교회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작은 아이에게, 흔히 자신이 말하던 그 '애새끼'에게 관심을 가진 건.

나와 같은 종류가 아닐까. 순간 그런 착각을 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베르가 모트는 자신의 모든 인생이, 그 모든 순간이 에스트로에게

맞춰져 있었고, 여유같은 것은, 자신을 위한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쩌면 지금의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을 눈 앞의 여성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변해왔었는지를 주마등이 스쳐가는 순간처럼 바라보았다.

깊은 과거에서 돌아오지 못할 순간까지.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건지 모를 순간에.

베르가 모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뭐였는지 생각했다.

남자? 피? 싸움? 전쟁?

결국 그 모든 것이 살아있다는 충실감을 위한 자극이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말문이 틀어막혔다.

벅차오른 것이 눈물이 아닐리 없다.

목이 메이는 것도 아마 그래서 일 것이다.

"내가...만약에..."

베르가모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만약은 없어."

엔시온은 그렇게 단호하게 말을 잘라내고 그 심장에 박힌 금빛 단검을 잡아

소를 발골하는 정형업자와 같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대로 위로 찢어낸다.

심장이 찢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그 위로 폐를 다친 베르가 모트가

말 대신 쏟아내는 공기, 그리고 알콜 향이 섞인 고약한 토사물.

베르가모트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욱 하고 차오르는것이 감정섞인 말이길 바랐지만 끝내 구역질나는 토사물이었다.

자신의 진심은 이제와서 전할 수 없었고, 다른 이들이 역겨워하며 피할 뿐인 그저 냄새나는 오염물일 뿐이었다.

'시발...씨이발...'

그리고 그 눈에 자신이 쏟은 토사물을 피하지 못한, 피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들어온다.

증오했고 서로 이해하지 못해 창을 맞댄 이였는데

결국 자신의 추한 모습까지 받아들이고 마지막으로 토해낸 것을 받아준 것은 엔시온 뿐이다.

그게 더는 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기분... 좆같네...'

베르가 모트는 그대로 천천히 숨을 멈췄다.

의욕이라는 것이 더는 생기지 않아서.

다른 이유는 없었다.

베르가 모트의 사인은 그저 의욕이 생기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그래서 죽었다.

엔시온은 창을 천천히 내려 늘어뜨린다.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 머릿속에 남는다.

만약은 없다는 말은 베르가 모트에게 전하는 말임과 동시에

스스로의 각오를 되새기는 표현이기도 했다.

만약은 없다.

그건 그 지긋지긋하던 악연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질긴 숨이 끊어지고 축 늘어진 옛 제자를 바라보며 엔시온은 조용히 창을 든다.

그리고 그 창끝을 적진으로 향했다.

창의 형태를 바꾸고 난 후에 조금씩 그 창을 뽑아냈다.

"그래, 역사에 만약은 없는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생각하지 못했던 그리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은 조용히 전해졌다.

기억의 공유. 그 감각은 낯설게 만난 숙련된 경험 같았다.

자신의 손 끝에 닿았던 칼. 황금상아의 단검.

그 손잡이에 담긴 기억은 분명 모종의 마력으로 자신에게 전해진 기억의 공유였다.

기를 다 쓴 건지 철퍼덕 쓰러진 엔시온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직접 가져다 줄 것이지... 데레코즈... 개새끼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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