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only one & one of them
* * *
게비디는 자신이 한참을 때려패던 젤렌지를 쾅 소리가 나게 적 진영 쪽 바닥으로 내다 꽂았다.
한참을 그저 맞기만 하던 젤렌지가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이제 은퇴 하셔야겠는데?"
"그렇게 쳐맞고도 아직 말할 기운이 남았나보군."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봤는데 맘에 들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고 젤렌지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개싸움을 좋아한다고? 나도 좋아하는데. 우연이야.
게비디, 설마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고 기뻐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명줄이 조금 늘었다고 할 일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도 준비를 좀 했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젤렌지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게비디의 눈이 커졌다.
"내가 엄청난걸 주웠거든.
왜 교국에서 그렇게 긴 시간동안 몸을 숨기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이걸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
그렇게 말하고 젤렌지는 오르골을 내밀었다.
오르골은 짤랑 소리가 나면서 밝은 음을 연주하고 있었다.
"오르골?"
"이건 작은자의 오르골이라고 하는건데 말이야.
확률의 반전이라는 능력이 있거든. 궁금하지?
성물로서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물건을 내가 슬쩍 가져왔어.
그 이전에는 발레서티라는 여자가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야.
들어는 보셨나 모르겠네?"
킬레리 하나가 게비디의 옆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발레서티는 가장 성공한 창녀라는 별명을 가진 여자입니다.
거부이면서 동시에 도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자로 유명합니다.
늘 이기기만 한다고 합니다."
젤렌지는 그 설명에 웃으며 말했다.
"아는구나? 그래, 바로 그거다. 이 오르골 때문이지. 상대가 어떻게 대비하고
아무리 사기를 치려고 해도 결국 그녀의 무패전설에 확신을 더해주고,
그 명성이 쌓여 결국 든든한 벽이 되는 거다.
100%패배해야 할 판을 100% 승리해 버리니까!
자, 게비디. 어쩔거지? 내가 너보다 약하다는 전제가 있는 한,
결국 나는 언젠가 이기게 된다."
"걱정마라. 난 내 뒤로 한명이라도 남아있으면 절대 쓰러지지 않으니까.
네 잘난 코를 부러뜨리고 기어이 그 시선을 하늘에서 땅으로 쳐박아주지."
젤렌지와 게비디는 근접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게비디가 아무리 주먹을 날려도 그 피해는 없는 것처럼 아무리 맞아도 기어이 일어나서
좀비와도 같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젤렌지를 바라보며 게비디는 불안을 느꼈다.
이제껏 없었던 상황. 무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은 그에게 낯선 것이었다.
아무리 때려도 젤렌지는 비틀대며 일어섰고, 그때마다 오히려 몸에 쌓이는 부패의 마력은
조금씩 건틀렛과 손에 피해를 축적해가고 있었다.
손은 통증이 섞여 피가 흐르고, 부식된 것처럼 쓰라렸다.
검은 결국 게비디의 몸을 베고, 그 단단했던 피부마저도 상처를 늘리고 있었다.
절대 쓰러질 일이 없다고 단언한 것처럼 이런 공격에 질 일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먼저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쓰러뜨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미묘한 불안감은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이길때는 쓰지 않고, 질 때는 늘 사용하면서, 결국 모든 판을 가져가는것.
그게 게임을 흔드는 방법이다.
물론 그 멍청한 여자는 그것까지는 모르고 교회에 이걸 팔았다는 모양이지만.
사실 진짜 중요한 효과는 따로 있다는 걸 몰랐던 거겠지."
"진짜... 중요한 효과...?"
킬레리가 그 말에 경계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젤렌지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말했다.
"들어보면 알겠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청명한 소리는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음으로
싸움에 지친 이들을 향해 울리기 시작했고,
한명씩, 쓰러지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픽 하고 맨 처음 쓰러진 것은 킬레리 중 하나였다.
그리고는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괴로워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다가
그대로 하나 둘씩 스스로의 목을 베고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킬레리들은 연이어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나씩 발작하고 쓰러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젤렌지는 게비디에게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나봐? 아니 근데 그렇잖아.
같은 사람의 같은 유전자가 어떻게 저렇게 많이 존재해? 그렇잖아?
그럴리가 없지?"
동시에 이단자들 중에서도 일부가 쓰러지기 시작한다.
역시 똑같은 발작을 일으키고 똑같은 피거품과 함께 쓰러져 죽어간다.
"아니 대체가 말이야 크흡...큭큭... 성기사가 타락했다는게 말이나 되냐고.
앙? 신성모독이잖아? 어쩌겠어. 신벌로 죽어야지."
그렇게 말하고 젤렌지는 검을 들었다.
"진정한 오르골의 효과는 부정한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다.
네 뒤에, 이제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이길 생각이지?"
그 말에 게비디는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껏 손수 체계적인 훈련으로 키워냈던 킬레리들이 모두 처참하게 쓰러져 죽어있었다.
게다가 죽은 시체 위로는 검은 머리를 한 엘프들이 득시글하게 달라붙어
죽은 이단과 킬레리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
"고작 이런걸로 꺾이지 마십시오. 늘 하시던 말씀이잖습니까.
최고의 자세를 유지하고, 그에 걸맞는 격을 보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그곳에는 킬레리 하나가 서 있었다.
발레서티에 대해 설명하던 그 킬레리였다.
"그렇군. 고맙다. 진정이 되는군."
젤렌지는 이를 갈고 외쳤다.
"개소리 하지 마라!"
검은 마력을 쏟아내며 젤렌지는 게비디에게 달려든다.
이미 오래 전 유레크로스에서 카르고르가 그랬듯, 쩌적 하고 갈라지는 마력이
미숙한 실력이 그렇게 드러나고 있었다.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킹메이커는 왕을 위해 겸허히 물러나는 것이 역할이지,
왕의 자리를 넘보면 안되는 겁니다.
젤렌지. 너나 나나 어차피 똑같은 가짜 아니던가?
이미 진짜로부터는 멀어졌어.
끼리끼리 놀아야지. 알아들어? 진짜에게서 멀어진 가짜끼리."
"입 닥쳐라. 나는 진짜다!
이제 하다못해 반쪽짜리 복제품이 날 가르치려들어!!"
"그렇다면 알텐데? 진짜 반쪽짜리 복제품이 뭔지.
네 기록은 이미 조사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한 귀족이 있었지."
"닥쳐라!!"
젤렌지는 방향을 꺾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뒤에서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기다려요!!! 같이 가자구요!!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어디 있어요?!"
게비디는 갑자기 나타난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건 작은 소년이었다.
겁에 잔뜩 질려서는 여리여리해 보였고, 그 골격은 왜소한, 겁쟁이 같았다.
"자네는 누군가?"
"그... 저 버르너라고 하는데요..."
"그 복장으로 보아, 사제 같은데 교국 출신인가?"
"ㄴ...네. 무서워요... 교국에서 안전한 곳으로 간다고 해서 따라나왔는데...
여기가 더 무서워요... 혹시 여자... 그 분 이름이... 아! 안들어놨어요!"
"교국... 따라나왔다? 여자를 따라서 안전한 곳으로 간다고 했다고..."
게비디는 고개를 돌려 킬레리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럼..!"
그리고 그곳에는 캔과 같은 것을 들고 젤렌지의 공격에도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여유롭게 선 그녀가 있었다.
"사장님 지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이군요."
"발레리아였군..."
그리고는 발레리아는 캔을 틱 소리 나게 뜯어 바닥에 내던졌다.
희뿌연 보랏빛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갔고
젤렌지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한 후에 뒤로 돌아 후방에서 허리를 걷어차 고꾸라뜨린다.
"커억...!"
젤렌지의 등 위로 발을 깔고 나서 그녀가 웃는다.
"근육 이완제, 마취제를 배합해 만든 거니까 한동안은 일어서기 힘들걸."
게비디는 발레리아에게 물었다.
"무령님께서 주신 건가?"
"아니오. 직접 만든겁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이죠.
포션을 기화시켜 가스 형식으로 압축해서 캔에 넣은 겁니다.
휘발성이 짙고 효과가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성능하나는 확실합니다."
"놀랍군..."
"크아악!!"
젤렌지를 바닥에 깔아 그 위를 짓밟은 발레리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11년 전의 그 귀족은 몸이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의사들은 그의 기대 수명을 길게 예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모두가 시한부라고 말했었지. 그런데 너는 살아있었다.
유레크로스에서의 행보와 교국을 전전긍긍하던 네 행보를 비교해봤다 젤렌지.
그리고 내가 알아낸 것은 하나였다."
"닥...쳐.... 그건...!"
"11년 전에 젤렌지는 죽었습니다. 저건 젤렌지가 비공식적으로 복제한 스스로의 클론입니다.
아마 목적은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한 용도였겠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젤렌지 본인은 죽어버렸다!
그리고 분명 그 모종의 사건은..."
"그래! 내가 죽였다. 문제 있나?"
"아마 당신은 그 젤렌지의 사체를 먹어서 처리했을 겁니다.
그래서 너는 불사에 집착한거다. 신이니 피니 하는 것들에 집착하게 된 것도 모두!
소모품으로 태어나 자신의 생명이 결코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존재해서는 안되는 스스로의 운명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인간의 불완전한 창조물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신을 뛰어넘고 싶어했다!
모든 창조물을 자신과 같은 위치까지 끌어내리고 싶어졌던 거겠지!
자신이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너는 본체를 죽이고
이제껏 11년간 젤렌지로서 살아온 거지. 내 말이 틀렸나!"
"하...하하.... 씨발...
아냐... 아니라고! 난 인간이다. 제롬을 직접 만들었고... 아, 그래..!
미리타엔은 최고의 국가였다고... 그저 힘이면, 지위면 모든게 허용되었다고...
신도 없었고 윤리도 없었다. 오로지 힘이 나를 긍정했단 말이다...
그런데... 그걸 망쳐버렸어 이 개새끼들이!"
"그리고 그 오르골의 효과. 모순을 제거한다고? 헛소리 하지 마.
그건 광신을 제거하는 성물이다. 맹목적인 믿음에 빠져 이성을 잃은 이들을 구원해주는 소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나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 젤렌지.
킬레리들은 세뇌교육이 끝나게 되어 스스로 분노와 죄악감에 자살한거다.
그리고 이단자들은 너를 따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오염과 성력이 상충해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은 거다. 원래는 팔라딘이었던 자들이니까."
"그 말은 즉..."
"저 엘프들은 이미 너를 대장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아.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까. 그저 오염으로 인한 충동성만으로 움직이고 있어.
어쩌면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는 동족들과의 갈등이겠지.
이제 거기에 네 자리는 없어. 저들은 아마 분명 타협점을 찾아낼테니까."
"끄아아아아!!! 왜!! 나는 확률을 반전시켰는데도 왜 네가 아직도 그 위에 있는거냐!!"
"애초에 이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움직임을 봉쇄할 생각뿐이었으니까.
이길 생각이 없는 사람이 승리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하지 않겠어?"
젤렌지는 몸부림치며 땅을 굴렀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그런 그에게서 오르골을 빼앗아 들고 바닥에 깨부숴버렸다.
부서진 오르골은 잠시 굴러가며 소리를 내더니 이내 그것마저 멈춰버렸다.
"아... 안돼... 내... 내 오르골...!"
그런 젤렌지를 무시하듯 고개를 돌린 발레리아는 게비디에게 말했다.
"당신의 차례입니다."
"그랬나. 그래서... 자신의 여동생을 임신시켰다는 말을 그리 당당히 했던 건가.
남매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모양이군.
안타까운 여자다. 사람을 가지고 놀았군.
나는 밑바닥에서 직접 기어올라왔다.
그 확률에도 의지하지 않았다.
확률이 있다면 이 주먹으로 때려 부숴 이겨왔다."
최고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제각각의 방식으로 헤매곤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위치에 올라간 이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때로는 상투적인 답변에 반색을 사기도 하는 그들에게 사람들은 추측을 던지곤 한다.
누군가는 그 길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또한 누군가는 그 길에서 손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가끔은 차려진 길을 걸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며
출발선이 다르다고 불평하는 이들 역시도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그 자리를 증명하는 순간, 그들은 목도한 광경에 진실을 깨닫기 마련이다.
주먹 한방 한방이 포탄처럼 터진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까드득 하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질척질척한 무언가를 여러 번 다지는 소리가 들렸다.
곤죽과도 같은 질척한 것을 때려 펴는 소리는 이미 주변으로 끈적하고 검붉은
핏덩이를 튀기고 있었다.
누구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공포.
바닥에 반쯤 쪼그려 앉은 마운팅 자세로 질척한 무언가를 내리치고 바닥에 내부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원형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후에야 휙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에 튄 피를 슥 닦아낼 뿐이다.
무심해보이는 얼굴에서는 건조한 목소리만 새어나온다.
"더 있나?"
모두가 숨죽인채 그 모습만 바라보았다.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모두에게 그는 확실히 증명한 것이었다.
콜로세움 최강자, 게비디가 어떤 남자인지.
그리고 시선은 초라하게 내던져진 곤죽덩어리에게 옮겨간다.
처참할 정도로 짓이겨져 흐물흐물하다.
몸에 있는 뼈라는 기관이 마치 사라진 것처럼.
"이럴리가... 이렇게 간단히..."
내던져진 패배자의 이름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적지 않다.
게비디는 손을 툭툭 털고 주변의 블러드 엘프들을 독려한다.
"거기 둘, 엔시온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치료하고,
아직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투 준비 후에 모두 블러드엘프를 돕는다.
공격적인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 블러드엘프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이단자들을 몰아내도록. 그리고 블러드 엘프, 이제부터는 내가 통수권자를 맡는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수비에 전념하도록, 어떻게든 저 엘프들은 무력화시켜 협상할 자리를 마련해보게.
나 또한 시도라의 희생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휘하에 들어온 이상, 죽지 말아라.
헛된 죽음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한발짝 더 내딛은 게비디는 양 주먹을 쾅 부딫혀보이며 말했다.
"내 뒤로 한 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의 말에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날 그들은 기어이 승리해버렸다.
모두는 환호속에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기 시작했고,
엘프들은 재회와 이별속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발레리아는 게비디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는 아직 킬레리 소속이었던 겁니까?"
"아니, 넌 아니다. 생각이 변했어."
"그럼, 아까는 왜 쓰러지지 않으신 겁니까?
그 엘프들을 모조리 상대하시면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으시던데요."
"할 일이 남아있었다."
"할 일 말입니까?"
"난 이제껏 내 뒤에 네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많이 부족한 모양이군.
넌 다른 킬레리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내게 있어 충격이었지."
발레리아는 쿡쿡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그래서, 정말 하실 말씀이 뭔가요?"
"못 당하겠군."
"빨리 안하시면 저 가요?"
"사랑한다.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나요?"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
"그 많은 킬레리들이 있었지만, 넌 특별한 하나였으니까.
그러니까..."
발레리아는 풉 웃으면서 웃다 새어나온 눈물을 한손으로 닦고는,
그대로 게비디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저도요."
"앞으로는 뒤가 아니라 내 옆에서 걸어주겠나?"
"네. 그럴게요."
둘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마주잡았다.
===
"멍청한 새끼들. 그렇게나 조사해놓고도 모른단 말이냐...
죽음을 궁극적으로 거부하는 방법은, 죽어서야 비로소 기능한다는 걸...!"
유레크로스의 여정 중 발견했던 고대의 분지와 데릭의 관.
그리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젤렌지는 알고 있었다.
게비디의 주먹을 맞으면서 그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렇게 여겼다.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그는 텅 빈 공간에서 일어난다.
그의 앞에 보이는 장발의 남성은 분명 들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서 와라. 생을 마감한 자는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
네 이름을 기억하게 해 주겠나?"
"지즈렐."
"지즈렐? 지즈렐이라. 그렇군."
젤렌지가 쾌재를 부르고 있던 순간이었다.
"거짓말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아까보다 조금 진지해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반투명한 푸른 영혼들이 걸어나왔다.
젤렌지는 그 모습에 눈을 의심했다.
"ㄷ...데레코즈...!"
"여어,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네.
썩 달갑지는 않더라도 말이네. 내가 하는 일이 이단 심문관이라서 말이야."
"이런...씨발.... 이 개새끼들이...! 개새끼들이!!!"
도르테우스의 차분한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 그래, 젤렌지 말이지. 네 자리는 없어. 이미 같은 존재가 먼저 와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도르테우스의 뒤로 또 하나의 푸른 영혼이 보인다.
자신이 죽였던 젤렌지였다. 자신을 공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도 내지 않는
그 얼굴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끼지만 이미 늦었다.
그 사이로 도르테우스의 말이 길게 따라붙었다.
"업이라는건 결국 어떻게든 돌아와 발목을 붙잡게 되어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네 이름을 알고 있더군.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건 말이야. 잘가라. 영원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