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가능성과 제물
* * *
샤인은 분명 제물로 바쳐질 터였다.
그리고 그를 위해 교황이 치밀하게 계획한 순서를 따르게 될 터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적이 자신을 구원했기 때문이었다.
"에리아씨, 이 앞으로는 못 가십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굳이 내 앞을 막아야겠어요?"
"일단 일이니까요.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주어진 일은 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알고 있어요."
나는 그녀가 사성중 제일 강력한 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피하지 못하면 위협적일 것이다.
"난 교국을 오늘 무너뜨릴 겁니다.
당신도 평범한 모험가로 돌아가게 될 거에요.
휘둘릴 필요도 없겠죠."
"유혹이 상당하네요."
"금방 끝날 거에요."
샤인은 도끼를 붕 들어 바닥에 쾅 내리찍고 말했다.
"교국이 망할거라는 건 알아도 결국 제 삶은 이어져야 하잖아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잠시 쉬고 계시라는 거에요."
손가락을 들어 비전강타를 꽂았다.
처음에는 그더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장난하시는 거에요? 그래도 저는 지금 적으로 여기 서 있는 거에요."
"알아요. 가중, 비전강타."
또 한번 미력한 공격이 그녀의 도끼를 툭 때리고 있었다.
"이런걸로 뭘 하시겠다고 하시는 거에요? 동정심 유발이라도 하시는 거라면..."
"정신 차리세요. 적으로 서 있는 거라면서요. 그렇게 봐주셔도 되나요?
가중, 부하, 비전강타."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강한 공격이 샤인의 복부를 후려친다.
그제서야 그녀도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을 느끼는지 눈빛을 바꾸었다.
"가중, 부하, 연격, 비전강타."
하나였던 공격은 점점 강해지고, 그 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연달아 날아드는 비전강타는 그녀가 반응하기보다 더 빠르게 복부와 어깨, 도끼를 강타하고 있었다.
"30%의 위력이 계속 가중될 거에요. 그리고 그만큼 마력에도 부하가 있을거고요.
그걸 연속으로 사용하는 거라구요. 비전강타라는 마법은 결코 당신같은 사람에게 통하는 수준이 아니겠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가중, 부하, 연격, 적중, 비전강타."
아까와는 다르게 모든 비전 강타는 일렬로 늘어서 복부를 연달아 타격한다.
그때부터는 위험을 느낀 샤인이 거리를 급격히 좁혀오기 시작했다.
"가중, 과부하, 연격, 적중, 비전강타."
점차 강해지는 공격은 견디기 힘들 정도까지 강해져 가고 있다.
한번 맞을 때마다 통증을 1로 수치화 한다고 했을 때,
1은 곧 1.3이 되고, 1.3은 곧 1.69가 되며, 1.69는 2.197이 된다.
결국 그 공격들은 처음과 비교해 2.8배, 3.7배, 4.8배, 6.2배, 8.1배로 늘어난다.
그리고 연격을 사용하면서 한번에 시전하는 비전 강타의 수는 무려 10번.
첫 10번의 시전을 반복하면 10배 정도의 위력이 나오고,
연격으로도 연달아 시전했으니 못해도 30번은 시전한 효과인 것이다.
30번의 공격에 부여되는 힘의강도는 처음의 약 2015배.
슬슬 한대 한대에 감당하기 어려운 타격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십번의 비전강타는 막아내기 벅차다. 피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적중을 미리 걸어두었기 때문에 피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결국 목표를 따라 추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끼를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강타에 복부를 구타당하고 있었다.
연달아 사용하다 결국 퍽 소리가 나며 갑옷이 터져 그 안으로 맨살이 보이고 나서야
그녀는 더이상 싸울 수 없음을 직감했던 것 같다.
사실상 일방적인 싸움이었지만 말이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싸움이에요."
"초반에 방심하셔서 그렇죠 뭘."
"이렇게 될거라고는 생각 안했다고요."
"다들 그러다가 맞아보고 놀라고 그래요."
"후우...까득."
분할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 역시도 그녀를 눕히고 편히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걸음을 떼려고 하자 뒤에서 쿨럭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면 피를 쏟으면서 쿨럭이는 샤인이 보였다.
"뭐야..!"
내가 그렇게 세게 공격했던가 하는 생각에 안색을 살피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이에 낀 자그마한 캡슐이었다.
우선 다른걸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곧장 회복계열 마법과 함께 생명력을 부여했다.
이대로 끝내면 이용만 당하다가 가는 거니까.
그건 용납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 캡슐 누가 줬어요?"
"왜... 먹으면 죽는거라도 된다나요?"
"다 죽어가면서도 그걸 물어보는거 보면 눈치가 없는거에요 아니면
말해주고 싶지가 않은거에요?"
"그냥 다 피곤해서요. 메리. 교황이 준거에요."
"전선 이탈해서 안전한 곳에서 쉬라고 충고하고 싶은데,
어디 말을 들어야지."
"걱정 말아요. 그럴테니까."
"그래요. 걱정 끼치지 말고 가서 푹 쉬어요."
나는 그녀가 삼킨 독이 충분히 중화될 때까지 회복 마법을 연이어 써 주고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서는 삐삐가 새근새근 졸다가 나를 바라보고 일어나서 폴짝폴짝 뛰고 있다.
"삐삐, 그 안에서 초록색 병 가져다줄래?"
"아라떠!"
삐삐는 금새 초록색 병을 가져와서 건네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서 샤인에게 전달하고 위급할 때 먹으라고 조언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삐도 모고도 대?"
"안돼. 삐삐는 집에 가면 엄마가 더 맛있는거 해줄게."
"진쨔?"
"그럼~"
"근데 마마."
"왜?"
"반쨕반쨕하는거 지지야."
"지지라고?"
"응. 저쪽 반쨕반쨕인데 지지야.
마덥져..."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삐삐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보게 된 것은 아주 불쾌한 모습이었다.
한발짝 걸어가 때마다 느껴지는 아주 불쾌하고 냄새나는 마력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처럼 거대해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기고 있으면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
뒤를 돌아본 곳에는 금발의 남성이 서 있었다.
이제껏 본적없는 진지한 얼굴로 서 있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나는 단번에 알았다.
"아르간티아."
"이 앞으로는 위험해."
"그래서 가지 말라고?"
"그것도 좋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 혼자서는 역부족일 거라고 생각해.
다만 준비를 철저히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거지."
"그 말은 저 앞에 느껴지는 마력의 기운은..."
"응. 다르말록이야. 아마 지금 막 누군가가 봉인을 건드린 모양이야.
제대로 풀려나게 되면 골치아프겠지만 일단 현 상황만 보면
신봉자의 수가 많지 않아서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겠지."
"그럼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은 앞뒤가 맞질 않잖아."
"상황만 보면 그렇지만, 다르말록의 힘의 근원은 신봉자와 찬가에서 기반해.
우리가 다르말록을 초반에 묶어놓는 것으로 다르말록의 신격을 의심하게 만들면
자연히 추종자로부터 오는 힘이 약해지게 될 거고,
그 동안 너는 다르말록을 이길 수단을 강구하는거지."
"그렇게 복잡하게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어?"
"우선은 우리도 인원을 모을 필요는 있을 것 같아.
너와 나, 그리고 아버지와 에스트로 까지는 어떻게든 찾아냈다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의 조각을 찾지 못했으니까."
"정령왕 멜타이트였지...?"
"그래. 다르말록의 봉인은 제물을 바치는 방식으로 해금된 것 같아.
다시 말하면 다르말록에게 바쳐진 제물이 고품질일 수록 힘이 강해진다고 볼 수 있지.
그런 부분에서 현재 대다수의 마력이 공양되고 있는 건, 대다수의 교인들.
아니, 정확히는 이제까지 교국에 숨어있던 이단자들의 자멸공양이고, 분신공양이겠지.
이 사람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을거야. 적어도 제물의 목적으로 죽는 사람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이
그나마 우리가 뭔가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수단이 되겠지."
"제물 목적으로 죽는 사람?"
"우선 메리가 공양할 인간들을 막아보는게 중요해."
그제서야 식은땀이 흘렀다.
성희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면 아마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우선 에리아, 너는 에스트로와 협력해서 멜타이트를 찾아줘."
"멜타이트가 어디있는지 모른다며."
"몰라. 하지만 아직이라면 막을 수 있을거야.
오래 끌수는 없어. 길어봐야 3일이야.
어차피 기록에 이름이 적힌 이상 저쪽에서도 함부로날 죽일수는 없을 테니까
여기서는 두 팀으로 움직이는게 더 나을거야.
그리고, 미리타엔도 지금 많이 복잡해 보이던데 너한테는 소중한 곳이잖아?"
"그...렇지."
"뭐 천천히 오라고. 나도 공을 뺏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가 먼저 처리해도 불평하기 없기야?"
"그래..."
그 말이 허세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지고 번개구름 같은 것이 하늘을 메웠다.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함을 등지고 아르간티아는 말했다.
"가봐. 멜타이트를 찾아야지."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르간티아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어주었다.
느껴진다. 저 너머에 있는 다르말록의 기운이.
하지만 그럼에도 목전에 둔 적을 등지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한없이 아쉬웠다.
이게 맞나? 여기서 돌아가는게 정말 옳은가?
그런 생각이 계속 반복되었지만 내 등을 억지로 떠민 것 같은 아르간티아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에스트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옆으로 돌아왔다.
"불렀구나."
"응."
"이제 어쩔거야? 저 너머에는 다르말록이 있어. 지금이라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다르말록과 싸우길 바래?"
"아니, 꼭 그런건 아니지만, 지금 마땅히 할 일이 있어?
저것 보다 중요한건 없는 상황이잖아. 게다가..."
"멜타이트를 찾기로 했어."
"멜타이트?"
"응."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있었구나. 다르말록처럼 모든 힘을 빼앗기고 봉인된 존재.
확실히 우리가 다르말록을 봉인했을 당시에도 그녀석이 있었으니까."
"사실 나 멜타이트는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
에스트로는 머리를 살짝 긁어보이며 말했다.
"정령왕이었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 당시에는 너도 알다시피 정은 마력원 그 자체이면서 소명하지 않는 특성이 있었으니까.
제일 강대한 정령은 마땅히 사용가능한 마법이 없더라도 왕으로 칭송받았었지.
그때 그녀석이 아마 괴를 비롯해서 다르말록이 수족으로 부리던 녀석들을 대부분 정리하고
인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막아내는 역할을 주로 했었어.
지금으로 따지면 탱커 역할이었겠네. 모든 공격을 무효화하곤 했으니까."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왜?"
"분명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어."
"급하지 않겠어?"
"3일 정도 있다고 하던데."
"하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린 다섯이잖아?"
"다섯이었지."
"아저씨께 부탁해봐. 분명 답을 알고 계실테니까.
3일로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잖아."
"아저씨..."
"도르테우스 말이야."
"하지만 이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도 금지된 사람인데?"
"그래도 이세계의 관리자이기도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에스트로에게 말했다.
"그럼 내 상담소로 가자. 거기서부터 다시 천천히 시작해보는게 좋겠어."
"조금은 급할 필요도 있을걸."
"그래. 일단은 말이야."
나는 그렇게 그와 함께 상담소로 돌아왔다.
미리타엔의 거리는 상당히 많이 변해있었고, 거리를 메우던 노예들은
이전보다 처참한 모습으로 거적데기를 두른 채로 골골댔다.
내가 겨우 상담소의 문을 열면 안쪽에서 보글보글 무언가를 끓이는 소리가 났다.
"무령님?"
발레리아였다.
"아, 발레리아."
"교국에서의 일은 다 처리하고 오신 건가요?"
"아니,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식힐 필요가 있어서.
그나저나 지금 끓이는건?"
"죽이에요. 미리타엔 내부에서 전쟁이 있었으니까요.
보급도 해야 하고, 다친 사람들을 치유할 필요도 있고요."
"아무래도 그렇구나. 내가 한번 둘러보고 와야 할까?"
"무리하지 마시라고 해야 하는데, 필요한 상황이긴 하네요."
"그래..."
"그나저나, 황제께서는 어디 계시죠?"
"플로라 말이야?"
"네. 무령님을 돕겠다고 교국으로 출발하셨거든요."
"맙소사... 그럼 지금 걔 혼자 교국으로 건너갔다고?"
"애니도 같이 가기는 했는데..."
"하아... 일이 틀어지는 것 같은데. 일단 알았어."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을 볼 날이 얼마 안남은 것 같네요."
"그러게."
"언제 또 못 보게 될지 모르니까 미리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쉽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에이, 그런거 아니에요."
"그럼?"
"게비디 대공께 청혼을 받았습니다."
"아, 그런거라면.... 뭐?! 누구한테... 뭐라고?"
"청혼을 받았습니다. 게비디 대공께요.
제게 어머님 같은 분이시기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제 마음 아시죠?"
"그래서, 너는 어쩌고 싶은데?"
"승낙했습니다. 상황이 정리되면..."
"안돼!! 닥쳐!! 그 이상은 안돼!!!"
"후후... 알겠어요."
"에스트로!!!"
내가 에스트로를 귀가 떨어져라 부르면 그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 무슨 말을 할지 알겠네. 맡겨둬."
"다른거 다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게비디 찾아가서 뺨아리 한대 올리고 싶은데,
지금 내가 너무 바쁘니까 참는다. 너 허튼 소리 함부로 하지마.
다른 때는 몰라도 지금은 안돼!"
나는 쿡쿡 웃는 발레리아를 보고 물었다.
"너 그럼 저 죽 게비디 주겠다고 끓이는 거야?"
"네. 그러려구요. 무령님것도 준비했어요."
이마를 탁 짚었다.
"그래... 파이팅 해라..."
나는 그녀를 두고 미리타엔 전역을 돌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킬레리의 절멸과 더불어 데레코즈의 죽음과, 마운틴 엘프의 멸종,
블러드엘프와 타락한 엘프가 섞이기 시작한 것까지.
나는 그 모든 광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게비디를 만나 그를 치료함과 동시에 몇마디 정도 나누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게비디, 킬레리를 새로 뽑을 생각은 안하는거야?"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제 아내라고 생각하면 하나뿐인게 맞지 않겠습니까.
특별한건 하나뿐이니까요... 다른 대체품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 상황에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냐... 나도 할게 있으니까..."
기억의 미로가 있던 그 잔해속에, 이제는 흔적만 남은 그곳 제단에서
도르테우스를 다시 만나기위해서 나는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곳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