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화 〉 망월의 조사대
* * *
"그래, 분명 너를 처음 만난 것도 고고학을 목적으로 네가 엠페레스에 발을 들여서였지.
그때 분명 우리 게약의 조건을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분명 그때..."
"아유, 알죠. 그러믄입죠. 적록 기사단의 전 단장 미올로를 찾아달라는 거였죠?"
"그래. 알고 있는데 이제와서 정보상단을 떠나겠다고?"
"미올로를 제가 찾을 수 있었다면 진작 찾았겠죠.
이미 이 근방을 뜬게 분명합니다.
유레크로스, 미리타엔 어딜 가도 없는데 제가 어떻게 찾습니까?"
"썩을.... 그럼 그 적록 기사단이 한번에 사라진게 말이 된다는 말이야?
엠페레스의 주력 병대가 한순간에 사라졌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주력 병대... 확실히 지금의 엠페레스는 이전에 비해서 약하다는 평이 있죠.
그 비밀이 그겁니까? 적록기사단의 부재?"
"후우... 그래, 지금의 적록 기사단은 이전의 적록 기사단이 아니니까.
내가 젊었을 때 본 기사단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었지."
"뭐, 어디 숨어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기사인지 뭔지 해도
결국 먹고 살려면 사람 보이는 곳에 있기야 할텐데."
"그 미올로같은 남자가 늙는다고 존재감이 사라질 것 같아?
썩어도 준치라고 했고, 부러진 검도 쇠붙이라고 했어."
"네네, 그럼 일단 찾으면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일단 이번 업무 마무리 되면 그만두는 걸로 처리해 주십쇼."
"제멋대로군."
"아 좀 해주십쇼 그거 얼마나 한다고."
"하아... 알아서 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거잖아?"
"그렇죠. 매일이 행복합니다."
"잘해줘. 언제 떠나갈지 모르니까. 절대 놓치지 않게."
"아가씨...?"
"평생 후회하지 말고. 이번 일이 끝나면 연락하지 마. 이제 네 연락 안받을거니까.
그리고 이제 우린 남남이니까 서로 관여하지 말자고."
"그럼 미올로는..."
"미올로고 나발이고 내가 알아서 해."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쇼."
그렇게 말하고 다니엘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위로 쳐들더니 말했다.
"가볼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협상에 성공해버린 것이엇다.
하여튼 천운이 따라주는 남자인 것 같았다.
데니스가 올해 열 한살이었으니, 10년전의 공간인 것 같은데,
10년 전이라면 분명 엠페레스쪽에서도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겠지?
나는 삐삐의 손을 잡고 선착장쪽으로 걸었다.
10년 전의 무법지대와 같은 엠페레스의 풍경은 썩 아이에게 보여줄 꼴이 못되어서
어떻게든 가리고 간다고 했는데도 사방에서 들리는 노예들의 질척한 소리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마마, 저기 사람 싸워?"
"어...안 싸워..."
"머해?"
"어... 운동... 운동하는거야..."
"안 추어?"
"어... 모르겠네... 추우면 옷 입겠ㅈ... 하아... 안입겠구나 쟤들은...
삐삐야, 가방에 잠깐 들어가서 쉴래?"
"아니! 삐삐 안졸려!"
그냥 혼자 올 걸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어린 아이를 누가 돌보겠느냐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너무 일찍 보여서는 안될걸 보인 기분이었다.
생각할게 또 많아졌다.
마치 내가 스스로의 존재를 찾아다닐 때와 같은 느낌.
힘겹게 번 시간이다.
분명 리스크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얻어낸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알아내야 하는 것은 모두 알아내야 했다.
내가 지치는 한이 있더라도 밖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굴러야 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내 이기심 때문에 삐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는 것이다.
마법은 사용하지 못했다.
아마 이 세계와 내가 속한 차원이 달라져서 마법을 사용해도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아마 비슷한 연유로 삐삐도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 거겠지.
대신 나름의 적응을 하고 나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시간대를 돌아보며 미리타엔에서 엠페레스로 향하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자연스레 섞여도 어차피 그 사람이 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 섞여 따라간 후, 엠페레스에서 다시 시간을 재조정할 수 있었다.
이걸 시간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찾고 싶은 시점을 말하는 데에는 제일 부합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행동이 되감아지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금새 그것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적응한다고 해서 그 꺼림칙한 감각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삐삐는 그것을 묘하게 무서워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때마다
삐삐를 꼭 껴안아 눈을 가려주었다.
"삐삐 집에 가구시퍼."
"끝나고 꼭 집에 가자."
"지금 가면 안대?"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 꼭 같이 가자. 엄마가 미안해."
"아라떠..."
엠페레스까지 체감상 걸린 시간은 적어도 5시간은 지났지만,
실제로 이 공간에서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잿빛으로 번진 이 공간에서 다시 눈만 깜빡이면 시간같은건 되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낯선 개념들이 삐삐에게는 어려워보였다.
미올로. 그 이름은 분명 처음 듣는 것이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대강 감을 잡고 있었다.
아마 에드먼드 브리깃이 남긴 기록에 적혀있었던 여왕의 즉위에서
당시 반역을 이끌었던 그 적록기사단의 수장이었겠지.
필시 그 책임을 떠안고 그 세대의 기사단이 모두 물러나게 된 게 아닐까.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은 멜타이트다.
분명 이것과는 다른 이야기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멤돌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직감이 자꾸 내게 미올로를 찾아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올로를 알아내야 한다는 그런 꺼림칙한 감정이 계속 남아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미올로가 아직 현역으로 있었을 40년 전의 버크레이엄 궁으로 이동했다.
버크레이엄 궁에 당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그 왕성 문 앞에서
자연스레 인파에 섞여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그 40년 전의 연회로 시간을 돌렸다.
수많은 인물들이 거리를 거꾸로 배회하고, 또 많은 시간들이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안에서 바르를 떠는 삐삐는 나를 더 꽉 껴안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눈 앞이 밝아지고 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버크레이엄 궁을.
그리고 동시에, 이 앞에서부터는 삐삐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어
나는 삐삐를 조심스레 가방 안으로 넣었다.
그리고 가방안을 뒤져 작은 포션 하나를 삐삐에게 건네주었다.
"삐삐야, 무서우면 이거 마시면서 기다리는거야?"
"시러... 가치 이쓸래..."
"엄마 어디 안가. 여기서 무서운거 혼내줘야 하니까 삐삐는 여기서 기다려.
엄마가 부르면 다시 나와도 되니까. 알겠지?"
"시러... 가치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삐삐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무서워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냥 믿고 기다려달라는 말 뿐이었다.
육아가 이렇게 어려운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 애정이 벽에 가로막힐 것 같은 순간이었다.
정말 그 순간 울고 싶었다.
"미아내... 삐삐 기다리께..."
"어...?"
"그러니까 마마 화내지마..."
삐삐의 말에 나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정말... 무서워보였다.
착잡함과 초조함은 결국 삐삐에게 부담을 주고 있었다.
이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눈물이 한방울 뚝 떨어졌다.
나도 힘든데. 정말 이 시대는 왜 이런걸 내게 자꾸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미안해. 미안해 삐삐야. 우리 조금만... 좀만 참자..."
삐삐는 말 대신 내 눈물을 핥았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다가 자기 가방에서 자그마한 사탕을 꺼냈다.
"딸기사탕 머글래?"
나는 그 사탕을 받아들었다.
"엄마 열심히 할게."
"응!"
그렇게 말하는 삐삐의 얼굴이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삐삐야."
"응?"
"같이...갈래?"
"그래두 대?"
"응. 그래도 돼."
"아라떠!"
"근데, 조금 무서울 수도 있어. 괜찮아?"
"응..."
"후우..."
숨을 고르고 삐삐를 목도리처럼 둘렀다.
삐삐는 날개를 파닥이다가 편한 자세를 찾아 내 목에 걸터앉았다.
"가자."
나는 인파에 섞여 안쪽으로 섞여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시그릿 플뤼네였다.
분명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은 분명히 기록으로 남은 그 책에서 보았다.
어딘가 비장해보이는 얼굴을 마주하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이제껏 내가 알던 그의 얼굴과는 많이 달라보였으니까.
그는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덕분에 나도 조금만 늦었다면 들어가지 못할 뻔 했다.
그리고는 혼자 침대에 기댄 후에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나만 말이야... 그 개새끼들."
그렇게 말하고 가방에서 차분하게 꺼낸 것이 나이프였는데, 끝을 예리하게 갈아두었다.
삐삐는 그걸 보고 살짝 긴장한 것 같았다.
목 뒤에서 미지근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이럴리가 없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왜지? 왜 내가 아는 그대로인데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거지?
그러다가 깨달았다.
분명 시그릿이 준비했던 흉기는 총이었다.
로라를 해고하고 나서 총을 챙겨 회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에그니아 역시 그의 총에 살해당했던 기억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째서 총 대신 칼을 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하면 삐삐가 물었다.
"마마, 아찌 안 반쨕반쨕인데 삐삐 아야 안하지?"
"응. 안해."
"근데 마마, 삐삐 간질간질해."
"간질간질하다고?"
"응. 간질간질해."
"어디가?"
"어... 뿌리랑, 날개랑, 꼬리랑.. 다!"
"다? 갑자기?"
"응..."
뭔지 잘 모르겠다.
살짝 거리를 벌려 시그릿을 관찰하고 있으면 그는 그 칼을 가지고 허공을 찌르는 연습을 하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곧 '아직 아니야...' 라고 말하고는 앉아버렸다.
이 위화감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칼에 집중했다.
그런데 삐삐는 조금 달라 보였다.
"마마."
"응?"
"장깐 어질어질 해두대?"
"어질어질?"
내가 되물으면 삐삐가 손을 뻗어 창문쪽을 가리킨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다시 상황이 되감기된다.
시그릿이 일어섰다 앉는 순간.
그 잠깐의 찰나에 분명히 창밖에서 무언가가 잠깐 스쳤다.
위쪽에서 뭔가 떨어지려 하던 것이 다시 시그릿이 일어선 순간에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나는 놓치고 있었던 것을 삐삐는 발견했다.
"삐삐야. 방금 그거 뭔지 봤어?"
"아니!"
나는 다시 쭉 시간을 되감아 처음 플뤼네가 방으로 들어오던 순간까지 돌렸다.
그리고 성을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 그의 창밖이 보이는 곳까지 이동했다.
뭔가가 발견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삐삐를 데리고 창밖이 보이는 곳에서 천천히 다시 시간을 재생했다.
그리고 아까와 동일한 시간에서 그 위층의 방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아래로 무언가를 늘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삐삐야. 확인해!"
"반짝반짝 안해?"
"안해!"
"응!"
삐삐는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서 그 위로 올랐다.
그리고 그 얼굴과 늘어뜨린 것을 가만히 보는 것 같더니 열린 창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너무 삐삐가 멀어지면 나 역시 챙기기가 쉽지 않으므로 곧장 위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삐삐! 돌아와!"
그러면 안쪽에서 삐삐가 쪼르르 돌아 나오고는 천천히 내려왔다.
그 순간, 다시 늘어뜨린 물건은 위로 말려올라가고, 창문은 조용히 닫혀버린다.
"누구였어?"
"대머리 아지씨."
"대머리...?"
"대머리는 머리카라기 업는거야."
"어...그렇지."
대머리라고 하면 분명 에그니아일 것이다.
"대머리 아지씨랑, 이뿐 아줌마 이써."
"아줌마도 있다고?"
"응!"
대머리 아저씨와 이쁜 아줌마. 이 조합이 의미하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 어딘가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럼 삐삐야, 저 끈에 달린건 뭐였어?"
"어...유리!"
"유리...?"
"유리 달린 막대기야!"
유리, 끈... 막대기...
"막대기를 끈에 묶은거야?"
"아니! 끈아니구 막대기야!"
끈이 아니라 막대기... 유리... 잠망경!
잠망경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럼 그 막대기는 아저씨랑 아줌마 중에 누가 들고 있었니?"
"아줌마!"
이어졌다.
마침내 무언가가 들어맞기 시작했다.
다시 시그릿의 방으로 돌아갔다.
시그릿은 차분하게 방에서 따각이던 칼을 품 속에 숨기고,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낸다.
그리고 총알이 제대로 들었는지 점검하는 듯 메만지다가 한숨과 함께 다시 그걸 주머니에 넣었다.
대체 그럼 저 칼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 것인지, 나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 에네도르를 자처하고 있던 페트리나 국왕은
시그릿이 누군가를 살해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고,
이를 에그니아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이건 아마 의도적인 행동일 것이다.
그 탓에 에그니아가 죽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나서야 떠올랐다.
6귀족을 재정비하겠다고 벼르던 그녀의 어조에서
분명 필요없는 인원을 쳐내겠다고 하던 것을.
그녀가 의도적으로 에그니아를 배제한 것이라고 보면 앞뒤가 맞았다.
그리고 중간에 사라진 저 칼의 행방이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거대한 실타래 끝의 실끈을 겨우 붙잡은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