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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83화 (283/303)

〈 283화 〉 망월의 조사대

* * *

시그릿은 초조해보였다.

내가 알던 사건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 추가된 디테일은 예상 외의 것이었다.

"에그니아! 이제껏 날 무시했던 대가를 치러라!"

"하, 그런다고 내가 눈이나 깜빡할 것 같나.

네가 미리 나이프를 준비했다는걸 내가 듣지 못했을거라 생각하나?"

"어..어어...?"

에그니아는 먼저 시그릿을 처치하겠다는 듯 얼굴을 양팔로 가리고 달려들었고,

시그릿은 당황한 듯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발포했다.

나 역시 깜짝 놀라 바로 삐삐의 눈을 가렸다.

어린 아이가 보기에는 너무 잔인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탕 소리와 함께 에그니아가 팔을 부여잡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이 개ㅅ...읍...!으윽..."

그마저도 시그릿이 곧장 그 입을 틀어막았기에 조용히 번질 뿐이었고,

그 순간마저도 가슴과 팔을 가차없이 나이프로 찔러댄 것이었다.

에그니아는 힘이 빠져 털썩 쓰러져버리고 말았고,

시그릿은 나이프를 다시 챙겨들고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애써 사람을 부르려고 한 에그니아는 빠진 목소리로 허덕일 뿐이었다.

그러나 두터운 방음 문과, 때 마침 사람들은 갖은 소란으로 시끄러웠기에

그 목소리가 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 이후로 도망친 시그릿을 뒤로하고 에그니아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문쪽으로 한걸음씩

무거운 발을 옮기고 있으면 그 문을 헤럴드가 열어젖힌 것이다.

나는 그 문 밖으로 나왔다.

"마마... 대머리 아지씨..."

"아, 아무것도 아냐."

"밧서. 아지씨 아야해써. 아파."

나는 조용히 삐삐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어. 나는 네가 빨리 자라지 않길 바랐는데...

너는 결국 내 마음처럼 커 주지는 않는구나.

삐삐야.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거야. 시간은, 그저 받아들이는 거고.

그렇게 성장하는거야. 알겠니?"

"그럼... 아찌 주거?"

"저 아저씨는 말이야, 우리가 여기 오기 전부터 죽어있었어."

"모...루겟서..."

삐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안겼다.

"집에 가고시픈데... 안대는거지...? 삐삐 여기 이써야대지...?"

나는 삐삐를 꼭 안아주면서 주저앉아 울었다.

"미안해... 엄마가 같이 있어줄게... 울지마... 미안해..."

내가 그렇게 자랐다고 해서, 이 아이가 그렇게 자라도 되는건 아니었는데.

난 나조차 극복하지 못했던 슬픔을 내 아이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구나.

"삐삐... 안우러..."

그 말에 고개를 들면 삐삐는 울음을 어떻게든 참으면서 훌쩍이고 있었다.

"삐삐가 울면... 마마도 우러..."

"넌 그렇게 강한척 하지 않아도 되는데..."

삐삐에게 어떤 마법도 걸어주지 못했다.

가방안에 있는 포션을 끄집어내 삐삐에게 건네주었다.

받지 않으려고 하는 걸 뚜껑을 열어 조금씩 입으로 흘려주었다.

천천히 한모금씩 마시는 수면제에 삐삐의 몸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해 줄수 있는게 이런것 뿐이었다.

"마마... 삐삐는 갠차나... 그러니까 울면 안대... 삐삐가... 지..켜...ㅈ...."

삐삐가 겨우 잠에 들고 나서야 나는 또 한번 울컥하는 기분을 억지로 삼켰다.

빨리... 빨리 끝내야 했다.

곧장 알현실로 달렸고, 시그릿이 이곳에 잡혀오는 순간으로 가속했다.

잠시 기다리면 짠 것 처럼 플뤼네는 이곳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적록 기사단의 무리에 붙들려 끌려오는 그의 앞에는 왕좌에 앉은 페트리나가 있었다.

"놓아라! 내 발로 걸어갈 수 있으니!"

"닥쳐라 더러운 반역자!"

"이런... 개새끼들이..."

억지로 풀어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플뤼네를 힘으로 저지하는 두 기사는 상당히 굴강해 보였고

힘으로는 어지간해서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곧장 시그릿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아 몇 번인가 주먹으로 후려쳤고

턱뼈가 부러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소리가 났다.

그냥 보기에도 상당히 건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기사가 마침내 무력화된 시그릿을 무릎꿇렸다.

페트리나 여왕이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보다 말했다.

"미올로, 그 자가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하게 해주어라."

"예."

저 남자가 미올로... 적록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최전성기의 적록기사단을 이끌던 남자.

미올로는 능숙하게 시그릿의 턱을 뚜둑 소리가 나게 조립해 주었다.

그러면 시그릿은 또 한번 '끄아악!'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미올로... 네놈... 들은 적이 있다...! 필시 도르보 교도소의 최흉 범죄자...!"

"....."

도르보 교도소. 또 모르는 지명이 추가되었다.

"그런가...! 죄명이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반역이었구나...!

왕에게 충성하는것이 국가의 존망보다 중요했더냐!"

시그릿은 자리에서 일어나 냅다 미올로에게 달려들었고, 나이프로 그의 오른쪽 등허리를

마구 내리찍어 상처를 냈다.

갑옷의 틈 사이로 몇 번이고 찍어버린 탓에 미올로는 순간적으로 기울어졌다.

금방 자세를 다시 잡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아무 일 아닌 척 다시 그 자리에 선 미올로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다른 기사들은

그야말로 여왕에게 모든 집중을 다하고 있었다.

미올로는 차분하게 시그릿을 다시 제압하고는

턱뼈를 가격해 다시 턱을 뽑아버리고 만다.

"소란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등은 괜찮은가?"

"문제 없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다음 배우 등장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금방 에드먼드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들어온 것은 헤럴드였다.

내가 아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문득 어째선지 불길한 그런 예감이 들었다.

"미올로."

"예, 폐하."

"투구를 벗지 않도록."

"예."

모든 사건이 종료되고 난 이후에 미올로와 기사단은 여왕의 앞에 일렬로 무릎꿇었다.

"그대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반역을 선택했겠지?"

"그렇습니다."

"그 얼굴은 죄 많은 이들의 원망을 담을 것이요, 죄인의 얼굴이니

두번다시 그 얼굴을 보이는 일 없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적록 기사단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모든 책임을 떠안고 몰락해야 할 이들이 내 왕정을 지키는 것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묻겠다. 미올로, 날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기사단은 어떠한가? 날 위해 죽겠나?

아니면 너희들의 단장을 따르겠는가?"

"여왕폐하를 따르겠사옵니다!"

"미올로, 그대를 따르는 기사는 없는 모양이군? 신뢰할 수 있는 병사가 없는가?"

"부단장과 부관을 신뢰하고, 그 휘하의 부하를 신뢰합니다.

모든 부하를 신뢰하며 그 충성은 한곳을 향합니다."

"그래... 부단장과 부관은 단장의 옆에 서도록."

세 명의 기사가 섰다.

"그대들의 손으로 반역자들의 싹을 자르도록."

부관의 손이 잠깐 떨렸으나, 곧 미올로가 부관을 진정시켰다.

적록 기사단은 그 자리에서 미올로 단장, 벡스터 부단장, 도투아르 부관을 제하고

모두 처형당했다. 그들이 제일 신뢰하던 이들의 손에 의해.

"아 역시, 죽은 자를 보는것은 썩 유쾌하지 않다. 너희 셋은 파면이다.

불명예를 안고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여생을 즐기도록.

자결은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앞으로 3일 후. 너희의 신분에 걸리게 될 죄목은

기존의 도르보 교도소의 그것에 가중하는 것으로 한다. 나가보도록."

바르르 떠는 부단장의 손을 미올로가 꽉 붙들어잡았다.

그리고는 여왕에게 충성을 알리는 경례를 마치고 조용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단장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삶을... 삶을 각오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장님... 저희손에... 동료들의 목숨이...."

"진정해라. 동료들은...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너희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우린 해야할 일을 마땅히 했을뿐이다.

이제 나머지는 남은 임무를 완수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올로는 한숨을 뱉고 말했다.

"너희에게 나는 아직 단장이냐?"

"저희에게 단장이 또 누가 있습니까."

그들의 말에 미올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로 너희 둘은 퇴출이다. 왕가의 기사도 아니고, 적록 기사단도 아니다.

원하는 대로 살아라. 난... 단장은 왕가로부터 수여받는 자리. 내 의지로 그만두지 못한다."

부관은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뭐해 임마. 일어나."

"단장. 그간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 명에 못 살것 같습니다.

여기서 숨을 끊겠습니다."

"야...! 야 임마! 도투아르!"

미올로는 스스로 검을 뽑아 자결하려는 도투아르의 배를 걷어찼다.

도투아르는 칼을 놓치고 모래바닥을 굴렀고,

미올로는 그 칼을 받아들었다.

"기사도 아닌 새끼가 검같은걸 함부로 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가. 가 임마. 가서 정 죽고 싶다 싶으면 난 뒤졌다 복창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아보던가.

너 약혼녀도 있다고 하지 않았었냐?"

"약혼녀는...이미 전날에 엠페레스를 떠났습니다. 저와 있으면 행복할 수 없으니까..."

"이 호로새끼 이거. 싸질렀으면 책임을 져라.

약혼녀 배만 안불렀다고 네가 한게 사라지냐?"

"ㅇ...예...?"

"임신했더라 네 약혼녀. 네 앞으로 편지 오던거 몰랐어?"

"어...."

"가봐. 평생 속죄해야 할 사람이 있는 놈은 죽더라도 거기서 죽어."

"ㄱ...감사합니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냐?"

"예...?"

"아들이면 이름을 빌로 짓고, 딸이면 밀리로 지어."

"왜...그렇습니까?"

"내가 나중에 자식새끼 낳으면 지어주려고 한 이름인데 말이야,

나야 이제 결혼 하기는 글렀잖냐?"

"하...하하..."

"뭘 쳐 웃어 임마. 그렇게 하라고."

"예... 꼭 그렇게 짓겠습니다."

"가봐."

도투아르는 헐레벌떡 사라져갔다.

미올로가 쓴 웃음을 짓고 있으면 벡스터가 물었다.

"그런 편지 온 적 없잖습니까."

"그럼 임마, 저새끼 저거 죽게 내버려두냐?

약혼녀도 있는 새끼가 거기까지 가면

잘도 그 앞에서 속았다고 죽는다 하겠다.

됐고, 넌 안가냐?"

"전 됐습니다."

"왜 임마? 너도 꺼져. 이제 내 부하 아냐."

"거 부하도 아닌데 명령하지 마쇼. 좀 따라가고 싶어서 따라가는 거니까.

범죄자 셰~끼가 말여."

"지는 임마 ㅋㅋㅋ 너도 똑같이 범죄자 딱지 붙었잖아."

"거 뒤지기 전에 형님부터 신고하고 갈라니까 어디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 다닙시다."

"하, 새끼. 하긴, 나도 다른 놈한테 몸값 쳐주기는 배알이 꼴린다.

어디로 갈래?"

"바다? 형님 바다 보고 싶다고 안하셨어?"

"그러기야 했지."

"집이 무슨 소용이야. 바다앞에 깔고 살면 온 바다가 집이잖수?

이제 우리 집도 없잖여."

"그래 임마. 가자."

"....형님."

"왜?"

"괜찮수?"

"뭐가 임마."

"집에 엄니 계시잖어. 나야 뭐 돌아가셨고, 형님이 제사까지 잘 치러주셨지만서도

형님은 아니잖어."

"아서라. 울 엄니는 나 진즉에 뒤져분줄 아시닌께."

"왜 꼭 좋은일 했드니 이래 버려지고 근다이께. 하아...씨벌.

그래, 이젠 우리밖에 안남았지."

그리고 나서 그들은 바다로 사라졌다.

남들의 발이 닿지 않는 암초지대를 넘어서 배마저도 들어가지 못할 정박지 없는 곳.

갯벌만이 그 발치에 펼쳐져 인간이 살 수 없는 그곳에서 둘은 걷고 있었다.

"그, 형님. 그거 기억 나요?"

"또 뭐 임마."

"우리가 처음 도르보 수용소에 갇혔을 때 말이여."

"아, 그거?"

"위에서 마운틴엘프인가 뭔가 하는 새끼들이 마법같은거 써대는 바람에

꽤 많이 뒤져나갔지 아마?"

"어쩌겠냐. 그때 왕께서..."

"왕이 씨발 뭘 해줬다고 자꾸 왕께서야? 아주 뼛속까지 군인이셔."

"놔둬라 임마. 붙은걸 어쩌냐?

그때 엘프들하고 전쟁하면서 국경 사수한다고 버티기 하던게 진짜 오지게 힘들었지."

그렇게 말하고 미올로가 털썩 쓰러졌다.

"뭐여?"

등에서 피를 흘리는 미올로를 그제서야 발견하고 벡스터는 그를 일으켜세운다.

"이런 시발... 아까 그 새끼야?"

"피 아직 안멎었냐? 아씨... 온 길에 흔적 남았겠네."

"그딴 소리나 할 때야? 걱정마셔. 우리 온 길은 바닷가라 파도 치면서 쓸렸으니까.

다쳤으면 말을 해야될거 아냐."

"후우... 이런걸로 안죽어 임마. 내기할래? 내가 너보다 오래 살걸?"

"어휴... 그렇다고 칩시다. 어디보자... 어후, 시발 이거 다끊어졌네.

척추며 허리며 다 박살 났겠구만. 칼이 위로 찔렸어.

형님 감 다 죽었네. 이젠 센 젬병한테도 당하고."

"닥쳐 임마. 그건 엘프새끼들이랑 전쟁중에 다친거야."

"어휴, 거짓말은. 내가 그걸 몰라?

우리 그때 다친거 한명한명 다 체크했었구만."

"에라이 새끼. 그럼 그건갑지. 자연구역쪽에서 베일슨파 쫒아내던 때."

"지랄은. 베일슨파랑 협상으로 끝냈구만 뭘 싸우길 싸워.

형님 혼자 웬 동굴 찾았다고 신나서 다녀오더니

멜빵이 타이트하다고 징징댄거 말곤 없었어."

"아 새끼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기억 안나? 나게 해줘? 그거 애들이 다 들었거든?

주세트랑 피티아스 불러서 물어ㅂ...

하... 시발..."

"후우...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둘은 그 갯벌에서 한참을 살았다.

약 20여년이 지나서, 벡스터는 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고,

미올로는 바닷가에 그를 갑옷째로 묻어 떠내려가지않게 하고,

그 옆에 검을 꽂고 검에 투구를 걸쳐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라져갔고, 떠내려갔으며, 결국 투구만이 남았다.

혼자남은 미올로는 점차 그렇게 잊혀져 갔다.

"당신이...미올로였어..?"

내 물음에도 이제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나는 결국 초라한 미올로를 뒤로하고 다시 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걸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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