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자아
* * *
엠페레스 남부의 초원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을 처음으로 이끈 자는 비고 베일슨이라는 남자였으며,
그 넓은 자연구역을 지배하며 북부로는 엠페레스를, 남부로는 아라카스트를 위협했고,
넓은 유목의 끝은 늘 화려한 벌판에서의 바람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런 그들에게도 금지되는 것이 있었으니
단 세 개의 조항이었다.
허가받지 않은 곳을 꿈꾸지 말라.
신성함을 침범하게 두지 말라.
잠든 자를 깨우지 말라.
그것이 오랜 시간동안 그들이 지켜온 규율이었다.
분명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미올로가 말했던 자연구역의 동굴.
그것은 멜타이트가 잠든 곳이리라.
동부 지역의 동굴. 분명 알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 곳.
그 깊은 땅의 근원에 발을 들이는 것은 허가되지 않은 선을 넘으려 하는 것.
국립 자연공원에서 허가되지 않은 구역은 그뿐이다.
40년 전의 땅은 지금과는 달랐다.
사슴, 악어 따위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사자가 그곳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물소와 하마 역시 그 구역을 배회했다.
야생이라는 단어가 피부로 다가오는 구역에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 흑백으로 가득한 세상이 허파를 두드린다.
거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악마의 굴과 그 동북부에 자리한 유적과도 같은 동굴에
한발을 내딛을 때마다 벅찬 느낌이 솟았다.
그리고 그 감정에 동화하는 것은 아마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꿈틀거리는 꼬리가 내 팔을 간질였다.
"일어났어?"
"으응... 마마... 여기 어디야...?"
"국립 자연공원이라고 하는 곳이야."
"궁닙 자연공언?"
"그래. 거의 다 온 것 같거든."
여전히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캐스트가 되지 않아 갑갑한 심정을 다스리면서
천천히 걸었다.
자연공원의 시간을 빠르게 뒤로 돌려가며 걷는 순간이었다.
날이 어둑해지고 하늘에 별이 떠오르면 삐삐와 나는 잠시 쉬어 별을 보기도 하면서
느긋하게 길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까 최근에는 느긋하게 별을 볼 시간이 없었네."
"삐삐두."
"보여 삐삐? 저기 별들이 나란히 있는거."
"별 마니 이써!"
"별자리라고 하는거야.
저건 별고래 자리, 저건 엘프자리, 그리고 저건 천무자리."
"삐삐자리!"
"삐삐자리도 생기면 좋겠네."
삐삐는 하늘을 향해서 몇번 의미없는 숨을
'푸우 푸우' 하고 뿜어보더니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별 안생겨."
"브레스로 별 만들려고 한거야?"
"반쨕반쨕해!"
나는 삐삐를 쓰다듬어주었다.
삐삐는 밤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신기한 것들이 많다며 감탄했다.
이제껏 많이 재워서인지 잠이 없는 것 같아 어울려주기로 했다.
동물들에도 흥미를 보였고, 육식 동물이 하위 개체를 잡아먹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내게 맛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구우면 맛있어 질걸?"
"모꼬십따..."
"나중에 엄마가 아는 아저씨한테 부탁해볼게."
"마싯는 아지씨?"
"응. 퓨어하트씨."
"죠아!"
"그럼 다시 갈까?"
"응!"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몇번인가 다리가 아파지면 쉬기도 했지만 결국 어떻게든 악마의 굴에 도착했다.
악마의 굴을 둘러싼 산을 넘는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 둘 다 지쳐있었지만,
악마의 굴 너머에 있는 동굴까지 가보기 위해서는 결국 한곳씩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굴은 말 그대로 거대한 출수공, 혹은 크레이터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그저 빨아들일 것 같은 그 가운데 보이는 커다란 심연에는
모래와 자갈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구멍은 아주 천천히 사막의 한가운데와 같이
작은 모래들을 안쪽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저 많은 모래들은 어디서 계속 공급되는 것인지, 언제부터 구멍이 저 모래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나는 그 아래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발아래가 빨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 안으로 순순히 손을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쉽지 않으니까.
긴장이 풀리지 않는 사이에 삐삐가 말했다.
"거기 모 이써?"
"아니, 이 아래에 뭐가 있는 것 같아서."
"구래?"
삐삐는 내가 저지할 틈도 없이 그 구멍에 대뜸 손을 집어넣었다.
그 작은 팔이 쏙 들어가더니 잠깐 조물조물 뭔가를 건드린 후에 삐삐가 말했다.
"시어내!"
"시원하다고?"
"시어내! 근데 쫌 꽉이야."
"그거야 모래가 압력이 있으니까..."
"아파."
삐삐를 안아들고 뒤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빠지지는 않았고, 결국 나는 삐삐와 함께 그 아래로 천천히 빨려들어갔다.
"삐삐야! 눈 감고 숨 참아!"
"우부붑! 우붑!"
"늦었구나... 일단 눈부터 감아! 입도 꾹 하고 있어! 모래 삼키지 말고!"
그 밑으로 떨어지는 모래를 가만히 바라보다 시간을 빠르게 감아보기로 했다.
여기서 모래에 계속 끼어 빨려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빠르게 떨어지는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 아래에 뭔가는 반드시 존재할테니까.
무지성으로 시간을 되감던 와중에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이 일그러지고
발 밑의 구멍이 어느새 너무나 커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에서 본 구멍은 빙산의 일각과 같이 굳어져 보인 것이었다.
실제로는 겨우 구멍위를 모래로 지탱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밑으로 빠져 아래로 빨려들어가는 것이었다.
밑바닥은 상당히 깊어보였는데, 그 아래에는 유리와 같은 벽이 있었다.
사방이 막힌 상태로 갇혀 바닥을 내려다보면 차곡차곡 모래가 쌓이고 있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어지간한 광장을 네닷개 합친 것보다 거대한 크기였고,
쌓이는 모래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로 보이는 벽 너머로는 어딘가 기시감이 있는 동굴이 보였는데,
그마저도 동굴과 이어진 작은 통로 같았다.
그 통로는 내 팔뚝 정도의 작은 관을 통해 이어져 있었는데,
확실한 것은 이 유리 벽은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통로와 이어진 구멍들이 작게 뚫려 있었고, 유리벽을 넘어 그곳에서 바람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대체 이 유리벽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걸까..."
위에 뚫린 거대했던 구멍은 어느새 다시 작아져 있었다.
삐삐는 모래산에 거꾸로 쳐박혀 꼬리와 노란 비늘이 보이는 엉덩이를 바둥거리고 있었다.
날개와 꼬리를 파닥이는 탓에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꼬리를 잡고 쏙 들어올리면 그제서야 삐삐는 입에서 젖은 모래를 퉤 하고 뱉어냈다.
그리고 잠깐 콜록콜록거리더니 나한테 쪼르르 달려왔다.
"마마...흐에엥..."
가방에서 물을 꺼내 얼굴을 씻기고 모래를 닦아주었다.
이 공간의 목적을 잘 알수 없어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어?"
"삐삐 왜?"
"조기."
삐삐는 유리창 너머 통로를 가리켰다.
그 통로 너머 작은 틈을 가리키며 내 쪽으로 꼭 달라붙은 삐삐는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눈..."
"눈?"
"보구이써..."
보고있다.
그 말은 누군가가 저 너머에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아마 극히 한정되는 것이었다.
"삐삐야,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그 눈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거야?"
삐삐는 옆으로 몇발자국 아장아장 이동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들짝 놀라서
내 곁으로 도도도도 이동해 내 팔을 꼭 붙들었다.
"ㅂ...보고이떠... 우서써..."
"웃었...다고...?"
눈이?
하지만 저쪽에서 여기 보이는 것중에 웃을만한 요소는 없다.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있다고?
다른 차원에서? 배제된 상황에?
불길함과 동시에 묘한 희망이 생긴다.
"삐삐야."
"응..."
"잘했어."
시간을 되감았다.
빠르게. 더 빠르게. 저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분명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가 있을거고,
그건 과거에 존재할 테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쌓인 모래들이 위로 떠오르는 것이 전부였다.
모든 모래가 위로 쌓이기까지 나는 한없이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다시 그 모래들은 일순에 우르르 내 위로 쏟아져내렸다.
삐삐와 내 머리 위로 모래의 산, 아니 사막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건 맞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머리에 모래가 쏟아지고, 어떻게든 가까스로 붙든 정신
압박으로 인해 죽기 직전에 나는 되감기를 멈췄다.
이 시대는 대체 어떤 시대인지 나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별안간 다시 몸이 붕 뜨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애써 내게로 손을 뻗는 삐삐를 붙들어 안고
몸이 떠오르는 상황에 어떻게든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게 전부였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아래쪽에 뚫려있던 관에서 엄청난 수압의 물과 바랍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빠르게 차오르는 물은 금새 나와 삐삐를 위로 쏘아올리듯 밀어냈다.
말 그대로 튕겨져 날아가며 나는 유리벽 이곳저곳에 강제로 밀쳐 부딫혔다.
팔꿈치, 그리고 머리, 등짝까지.
몇 번이나 반복되어 부딫힌 결과로 전신이 욱신거렸다.
팔꿈치는 아마 깨진 것 같았고, 뒤통수에서는 붉은 피가 베어나왔다.
"이런..."
어떻게든 삐삐를 안아들고 쿠션 역할은 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마치 고래가 물을 뿜어낼 때와 같은 감각으로 안쪽에 채워져있던 모래들이 전부 밖으로 튀어나갔고
그 순간 사방에 모래가 흩날리는 모습은 장관이라고 말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삐삐와 그 아래에 같혀있던 순간에 본 것보다
훨씬 많은 모래를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아가는 와중에 말이다.
마치 모래를 토해내는 화산과도 같아보였다.
뿜어진 모래는 악마의 굴을 둘러싼 산맥에 막혀 다시 악마의 굴을 위로 덮을 모양으로 쌓였고
산과 같은 형상을 한 채로 악마의 굴 따위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저 거대한 모래 무덤이 되어있었다.
마치 어지간한 도시 하나는 그냥 삼켜버릴 크기. 마치 서지스와 비슷한 수준의 모래무덤은
아주 천천히 악마의 굴을 만들듯 아래로 빨려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이건... 마치..."
무언가가 생각났지만 막연한 사고는 개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비밀은 분명 동굴에 있으리라 여기며 나는 몸에서 흙을 털어냈다.
털어낸 흙들은 털어낸 순간부터 마치 오류를 수정한 것 처럼,
내가 간섭하기 전의 시간대 본연의 역할을 하려는 것처럼 사라져갔다.
어디까지나 나는 이방인이라고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둘러본 주변은 조금 모습이 달라보였다.
무엇보다 제일 가시적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이제는 볼 수 없는 과거의 생물들이 초원을 활보하는 것이었다.
어스 웜, 센타피온, 각종 리자드와 와이번.
그리고 무자비하게 그 위에서 존재를 짓밟고 죽은 와이번의 목을 물어뜯는 거대한 지룡까지.
그 거대한 장관에 놀란 것은 단연 나 뿐만이 아니었다.
삐삐는 그 모습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삐삐야...?"
"삐삐...랑 똑까치 생겨떠..."
"아냐."
종이 다르니까... 아직은.
"아냐...?"
"응."
이곳에 천각룡이 내려앉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삐삐랑 똑가치 생긴거 업떠?"
"앗...!"
삐삐가 그렇게 말한 순간, 다시 시간이 되감기되어 돌아간다.
그리 많은 시대가 변하지는 않았다.
햇수로 1년도 채 안될 것 같은 변화, 그리고 머리를 가리는 눈부신 형태.
그건 말 그대로 성체인 천각룡의 모습이었다.
"삐삐랑 똑가치 생겨따!"
"그래. 저건... 천각룡이니까..."
"청강뇽?"
"응. 천각룡이야."
천각룡은 하늘을 바라보고 거대한 기운을 모으는가 싶더니 브레스를 내뿜는다.
하늘을 향해 날아간 브레스는 폭죽과 같은 모양이 되어 터지고,
그곳으로 천각룡의 무리가 모여든다.
하나같이 날개와 뿔을 가진 성체 개체들이었다.
"삐삐두 하구십따."
"뭘?"
"청공슥격."
"청공슥격?"
"쪼오기 있는 아줌마가 그래떠. 청공슥격한대."
발레리아의 부재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천각룡이 청공슥격...
나는 멍하니 의미를 되새김질하다가 문득 데릭이 준 도감을 떠올려 꺼내보았다.
천각룡 항목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진 개념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항목을 '비룡' 항목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천공습격] 이었다.
[공중을 유영할 수 있는 용의 무리가 일제히 강하하여 사냥하는 방식.
주로 전신에 마력을 두르고 강하하며, 그 무게와 마력량, 충격은 소규모 국가 하나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위력이다. 지형 자체가 변하는 수준의 파괴력을 보이기에
실패시에 리스크가 상당히 크고, 실질적으로는 효율도 잘 나오지 않아 일반적으로는 잘 시도하지 않는다.
이를 시도하는 것은 상당히 분노했다는 의미이므로, 대피를 추천.]
"삐삐야."
"웅?"
"따라가볼래?"
"그래두대?"
"응. 엄마는 여기서 할게 있으니까,
그동안 삐삐는 저기 아줌마 아저씨들 따라갔다가 다 끝나면
빙글빙글 할 줄 알지? 그거 해서 다시 여기로 따라오면 돼?"
"빙글빙글해서 거꾸로 하는거?"
"응. 그렇게 해서 여기로 오면 돼.
엄마도 삐삐가 빙글빙글 하면 여기로 올게."
"아라떠!"
"끝나면 뭘 봤는지 꼭 말해줘야해?"
"그래!"
아무래도 천각룡의 천공습격이라고 하면 삐삐에게도 배워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분명 천각룡에 대해서 조금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까 말이다.
원래 습성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가르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근데 마마."
"응?"
"삐삐 길 이러버리면 어떠캐?"
"그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엄마가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줄게."
삐삐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친구들이랑 현장학습도 가고 그러는거야.
유치원에서 다들 하는거니까 재밌게 놀다가 돌아오면 돼. 알겠지?"
"다녀오께!"
"그래. 언제라도 무서우면 여기로 와서 빙글빙글 하면 돼?"
"응!"
나는 삐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천각룡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하면 삐삐도 그 옆에서 따라 비행을 시작했다.
아직 미숙해보였던 삐삐는 금방 그 비행을 따라했다.
"이케 이케 하면 대는구나..."
자신감을 찾은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까지 와서 나만 얻어가는게 있으면 불공평하지.
나는 괜히 혼자 보내기가 아쉬워 멍하니 삐삐가 가는 길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삐삐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눈물을 훔치고 돌아섰다.
"나도 할 일을 해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