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 대화
* * *
동굴로 향하는 길은 아주 험난했다.
우선 산을 하나 넘어야 했으니까.
그래도 우선 목적지가 확실해진 것에는 기쁨을 느꼈다.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다.
분명 저 아래엔 더 습하고 어두운 감각으로 가득하겠지만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다.
한발짝을 내딛으면 그 안쪽으로 통하는 길이 보였다.
좁은 통로는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구불거리며 길로 굽이돌아 이어지고 있었다.
길은 상당히 불편했고, 곳곳에 기어다니는 독충들도 보였다.
악마의 굴에서 다친 상처들이 아직 쓰라린데도 멈추지 못한다.
내 몸은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죽지 않는 몸이니만큼 큰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쓰라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통증은 남으니까.
독충과 뱀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이 생물들이 존재하지 않을 시간대를 찾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삐삐가 순식간에 무리에서 떨어져버릴 테니까.
이제부터는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수단마저 스스로 제약을 걸어버린 것이다.
좀 쏘이지 뭐. 좀 물리지 뭐. 그런 생각을 억지로 끌어내면서 안쪽으로 발을 밀어넣는다.
물론 저 생물들이 의식하고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에 정해진대로 행동하는 녀석들이니 만큼 나의 존재는 인식조차 할 수 없을테니.
하지만 문제는 내가 좁아진 공간을 통과하며 찔리는 것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어오는 살은 금방 나를 괴롭게 했다.
점차 낮아지는 천장과 좁아지는 공간에 숨쉬기가 벅차올라도
어떻게든 안쪽으로 몸을 밀어넣는다.
축축한 돌틈 사이에 팔이 쓸린다. 가슴이 끼어 압박되면 숨도 막힌다.
"죽겠네 진짜..."
아무리 애를 써봐야 이미 시간 속에 결정된 과거를 개변하지 못하는 나는,
결국 아무리 가느다란 방해물이라고 해도 그걸 그저 피할 수밖에 없다.
부러뜨리지도 못하고, 걷어내지도 못한다.
그 위치에 존재하는 그것의 특질만이 나를 괴롭힌다.
그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을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지만 우선 그 좁고 어두운 구역 속에서 들린 소리는 불쾌함을 가중했다.
마침내 내가 그 좁은 통로를 통과해 안쪽으로 즐어가면 그 안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자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이 내부에 부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문은
거대학 돌을 하나하나 깎아 만들어낸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이게 가능한가?"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어 내 혼자서는 열지 못할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마냥 여기서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암호라거나, 어쩌면 나름의 문을 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세계에 간섭하는 것이 허가되지 않은 지금 내가 문을 열 방법은
단언컨데, 없었다.
"이걸 어떻게 열라고..."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면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못 연다."
"어...?"
"이제까지 그 문을 열려고 한게 너 하나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매번 빈번히 실패했지. 내가 여기 갇힌지도 벌써... 1400년은 족히 지났겠구만."
"1400년...?"
"저 앞에 모래시계 있지? 내가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아, 미안. 그쪽에서는 안보이겠구나.
바깥쪽으로 나가서 산맥 가운데 빠진 모래산을 보면 알 수 있을거야.
그게 모래시계거든. 아주 거대한. 한번 돌릴 때마다 만년이라고 했던가?
미친거지. 저런 걸 만들다니."
"당신이 그럼 멜타이트인가요?"
"오, 날 아직 기억하고 있나? 아니,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물어보지는 않았으려나."
"당신은 제 말이 들리나요?"
"오, 그것도 그렇네. 넌 어떻게 나와 대화할 수 있는거지?
나를 찾아내는 건 적어도 너만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치도 꽝이고, 맨 허구한날 착한 일에 쩔어가지고, 나보다는 사람들을 더 챙길거라 생각했거든.
고작 1400년만에 말이야."
"엘타리스를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설마 1400년 정도 지났다고 해서 내가 널 못알아볼 거라고 생각하면 안되지.
적어도 인간들과 다르게 정령은 수명의 개념은 없으니까.
그래도 점점 감이 더뎌지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미안하지만, 1400년은 아니네요.
전 당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역사의 개념에서 다시 하나씩 말을 맞춰보면 결국 2만 6천 3백년. 그 긴 시간을
그는 혼자서 이 곳에 박혀있을 운명이었다.
"그래... 결국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구만.
내가 그렇게 찾기 힘든 곳에 쳐박혀 있었나?
나야 뭐 내가 어디 갇힌건지 알 틈이 없으니까 말이야.
무슨 해저 깊숙히라도 쳐박아뒀나보지?"
"국립 자연공원의 동굴 속이에요."
"이런 썩을. 거기라면 잘 알지. 고작 그런데 가둬뒀다고 아무도 날 못찾았다고?
2만 6천년동안? 아르간티아는 뭘 했지? 분명 날 찾겠다고 말했다고!"
"찾는데 약한가보죠."
"그럼 넌 어떻게 여기까지 온거야?"
"26260년 쯤 뒤에 우연히 당신을 봤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미치겠네. 잘도 발견했네 그놈은."
"우연히 이 동굴에 피신했다는 모양이던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 조사해볼게요."
"그래서, 넌 도르테우스의 차원을 이용해서 온 거라고 했지?"
"그런 셈이죠."
"운이 좋았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나는 1400년 정도만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니까 모르지만,
26000년을 혼자 지낸 나를 만난다면 내가 과연 온전할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아마 그때가 되면 봉인을 풀더라도 스스로 자결을 택할지도 모르지.
봉인이라는건 여러 방법이 있다는 건 알고있나?"
"봉인이 한 가지가 아니라고요?"
"여러가지야. 그 와중에서도 나정도 되는 존재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더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지.
네가 이런 것도 모르는 걸 보면 확실히 예전의 엘타리스는 아닌 모양이네.
감을 다 잃었잖아. 물론 잡것들한테야 약한 수준의 봉인으로도 충분하지.
우선 봉인의 전제 조건을 보라고.
어딘가에 나를 가두고 내가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게 목적이잖아.
우선 첫째로는 지금의 너처럼, 그 어느 차원이나 시공간에도 속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지.
그러면 이렇게 되고 말아. 내가 자력으로 해낼 수 있는게 없어지게 되지.
두 번째 방법으로는, 그 대상에게 모든 차원의 시간과 공간을 겹쳐놓는거지.
아주 작은 한가지의 행동 만으로도 그 모든 차원에 영향을 주도록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위바위보 게임 알지? 너는 가위, 바위, 보 중에 하나만 낼 수 있다고.
그런데 동시에 100명의 사람과 가위바위보를 해야 한다고 하면,
네가 과연 모두를 이길 수 있을까?
100명이 아니라 1000명이라면? 10000명이라면? 그런 식으로 모든 가능성을 겹쳐두는거야.
행동 하나로 도리어 발이 묶일 수가 있어.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드는 방식이지."
"잔인하네요."
"아직 잔인한건 시작도 안했어. 세번째 방식은 그 존재 자체를 겹치는거야.
기록 자체를 고치는 거지. 무력한 상태로 길가의 돌멩이와 그 존재가 같아진다고.
물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마력량을 뽑아내는게 어렵기는 하겠지만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죠?"
"설명하기 좀 복잡해. 잠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후우... 잠시만. 그래, 잠시면 되니까.
그래, 그렇게 설명하면 되겠구나.
전추석이라고 알아?"
"네. 알죠."
"불이 붙은 전추석을 보관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보관하면... 타버리겠죠...? 단열이 잘 되거나, 타지 않는 소재라면..."
"소용 없어. 그런다고 가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진공상태를 만들면..."
"그래, 하지만 진공상태를 만드는 건 엄밀히 말하면 봉인이 아니라 처형이겠지.
보관의 의미로서 말이야. 우리가 말하는 주제는 봉인이니까."
"기계에 대해서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는데... 음... 모르겠네요."
"그래. 답은 아주 쓸모없는 기계라도 하나 만들어서 전추석을 연료로 그걸 가동시키는거야.
연료 효율이 나쁠수록 효과적이지. 만들어내는 열과 에너지를 모두 만들자마자 소모해버리면서
전추석 자체의 힘을 줄이는 거야. 에너지 자체를 변환시키면서."
"그럼...!"
"제일 까다로운 방법이지만, 대체가 불가능하겠지.
영원히 에너지를 발산하는 물건이니까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어.
만약에 연비가 너무 좋은 기계에 전추석을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감당하지 못하고... 망가지나요?"
"그래. 과열되는거지. 전추석에게서 충분히 에너지를 뽑아내지 못하거나,
전추석이 불규칙적으로 과열되거나 에너지가 포화되는 경우에 말이야.
그러니까, 세번째 방식은, 그 존재를 다른 존재에게 위탁하는 거야.
기록으로 고쳐써야 하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봉인된 대상의 힘이 너무 강해지게 되면..."
"풀려나는 거군요?"
"그런거야. 네가 말한 대로라면 아마 다르말록은 세 번째 방식으로 봉인된 모양이지.
하긴, 기록의 절반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루던 놈인데, 이 세계에 속하지 않게 하는건 불가능할거고,
그렇다고 모든 차원과 시공간에 넣자니, 분명 다른 차원에서 난리를 칠 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야 했을거야. 아니면 뭐 내가 모르는 다른 방식이 있겠지."
"어렵네요."
"쉬운건 없어. 아마 신봉자들이 상당히 열심히 일한 모양이네.
다르말록이 모두가 잊고있었을 신격을 찾았다는 건."
"고생 좀 했죠."
"오랜만에 사람이랑 대화하니까 좋은데. 참... 엘타리스.
그럼 여전히 금제는 걸려있는 상태인가?"
"아뇨, 전 반지를 찾았으니까요."
"아, 원죄의 반지 말이지. 그러고 보니까 나도 원죄의 반지가 있어."
"있다고요?"
"그렇지 뭐."
"뭔데요? 발견되지 않은 반지라고 하던데."
"너 정령이 뭔지 알아?"
"정의... 혼령이죠? 소멸하지 않는 존재라고 하는..."
"반지도 똑같아. 소멸하지 않고, 사용자와 동화하는 물건이지.
그 반지들은 말이야, 내가 몸을 떼내서 만든 물건이거든.
나름 정령왕이라고 해서, 광물의 정령들 같은 하위 정령들보다 훨씬 강대했으니까."
"그 말은...?"
"나 스스로가 반지 그 자체라는 말이야.
절대 소멸하지 않는 내 일부에 각자의 소망을 담아넣은거지.
각자의 저주를 이겨내기 위한 능력을 담아넣으면서 나도 기도했었어."
"기도...?"
"그래. 기도. 내 소원은 별 거 없었으니까."
"뭐였는데요?"
"내 뒤로 살아갈 정령들이 부디 안락할 수 있길 바랐을 뿐이지.
내가 여기 쳐박혀 있으니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아...."
할 말이 없었다.
"뭐, 너는 알고 있겠지."
"그렇게... 꼭 모든게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아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혹시 더 궁금한 건 있어?"
"음, 우선은 봉인을 해제할 필요가 있어보이는데,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하긴, 그게 중요하긴 하지."
"방법은요?"
"나도 몰라. 내가 어느 차원에든 소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거든.
그런데 그걸 자유롭게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도르테우스가 있잖아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상자에서 꺼낸 물건을 다시 상자에 집어 넣어야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고 그게 원래 자리를 찾는 건 아니잖아?
다시 상자에 넣은 다음에 쓰레기통에 넣는 거라면 또 몰라도.
일단은 뭐든 순서라는 게 필요한 법이니까.
다르말록을 먼저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어."
"어렵네요. 다르말록을 잡기 위해서 당신을 꺼내려는 건데,
당신을 꺼내려면 다르말록을 잡아야 한다니."
"그런 근원적인 모순에 집착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게 좀 더 효율적일거야."
"그게 무슨 소리죠?"
"다르말록을 통하지 않고서 그 금제를 풀어낸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거지."
"방금 당신이 말한 거잖아요. 금제를 풀기위해서 다르말록을 잡아야 한다고."
"지금 너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며? 그럼 다르말록이 금제를 걸던 순간부터,
이제까지 그가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볼 수 있잖아.
그 근원부터 조사해보라는 거지. 분명 이어지는 요소가 나오지 않겠어?"
"아..."
"알아들었으면 출발해. 여기서 멍때리지 말고.
내가 할 말은 그게 다야.
그래도 반푼짜리지만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엘타리스."
"얼굴도 못 봤는데요?"
"봐서 뭐할거야. 어차피 뭐 여기서 2만 6천년만 더 박혀 있으면 네가 풀어 줄거잖아?"
"그 전까지 버틸 수나 있고요?"
"모르지. 그러니까 노력해서 빨리 풀어달라고."
"그럴게요."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데요."
"어, 왜?"
"여기서 어떻게 나가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애초에 거기 상황도 모른다고."
"하...하하..."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