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86화 (286/303)

〈 286화 〉 맹점

* * *

"그럼 이렇게 된거 이야기나 더 하지 그래? 나갈 방법도 없다며."

"되게 신나 보이는 목소리네요."

"1400년만에 대화하는 거라니까.

이제 곧 26000년이 될 테고.

나중에 가면 너와 대화했다는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신하지 못할거라고.

지금이라면 나는 다르말록과도 신나게 대화할 수 있어."

"어련하시겠어요."

"뭐 아무튼 그런거야. 네가 당장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또 모르지만,

못나간다며? 우리가 알고 지낸지가 몇년인데, 친구 좋다는게 뭐냐."

"하하..."

"참 여러 일들이 있었지.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물론 이렇게 될거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우리 네명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래서 말인데, 때로는 후회했어..."

"후회라니요?"

"우리 옳은 선택을 한걸까? 내가 구한 세상은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 거였을까.

정령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런 것들 말이야.

한때는 정말 모든게 다 부질없다고 느끼기도 했었잖아 우리.

내가 중간에 얼마나 그만두고 싶었는지 말한 적 있었나?

사람들은 영웅이라고 불렀지만, 결국 그건 보답이 되지 않더라고.

알잖아. 너도 아마 나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사람들은 영웅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관심 없어.

그저 영웅이라고 부르면서 자기만족을 이루고나면

그저 자신의 안위가 지켜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나태함을 놓지 않아.

차라리 내가 여기 봉인된건 좋은 일이었을지도 몰라.

그 모습을 보고 나면 아마 화가 나서 뭘 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멜타이트..."

"영웅은 대단한게 아닌데. 그냥 우리는 나서지 못한 이들 사이에서

먼저 한걸음 내딛었던 것 뿐인데. 사람들은 우리를 점점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어.

덕분에 우리는 소외되었음에도 찾아오는 이 없었고, 결국 잊혀져버렸지.

내게 눈물 흘리며 감사하던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을까?

저 밖에는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을까?

어쩌면 정말 우리는..."

"누가 기억해주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잖아요."

"난 아니었어. 그건... 천사인 너니까 가능한 생각이야.

그런 대가없는 자비로움은 적어도 1400년 전의 나에게는 없었다고.

아르간티아는, 도르테우스는, 나와 너는...

정말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다르말록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충격이었다.

아르간티아가 그랬기에. 나는 어쩌면 그의 사상에 동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나는 왜 다르말록에 저항했는지 이제 잘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떠오르는 것은 분명 그때 나는 상당히 화가 많이 났었다는 점 정도였다.

"멜타이트."

"왜..."

"다섯이에요."

"뭐?"

"우린 그때, 다섯이었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헬브람이 있었어요."

"그런 녀석이 있었던가?"

"못믿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분명히 있었어요.

헬브람이라는 동료가. 다섯번째로."

"그랬나보네."

"믿어주시네요?"

"어쩐지, 너희들 만들어준 반지 말이야, 4개 분량이 빠졌더라고.

내 몸인데 내가 잘 알지."

"아... 그렇...군요..."

"만나면 전해줘. 미안했다고."

"미안하다고요?"

"나같이 구른 새끼가 하나 더 있다는데 이제껏 존재도 기억 못했으면

너무 미안하잖아. 그래놓고서 이제까지 내 불평만 너한테 늘어놓고 있었다고 난.

하지만 왜지? 무슨 저주를 받은거야?"

"환생의 저주에요. 세계의 어딘가에서 죽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피곤할 만도 하구만. 나나 그 친구나 어지간히 골아프긴 마찬가지네."

"그나저나 왜 여기 갇힌건지는 짐작하는 바가 없나요?"

"왜 없어? 차고 넘치지."

"어...."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공간이었으니까.

여기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으니까.

야생 생물들이 그대로 본존되어있고, 자연이 살아있어.

늪과 초원, 그리고 사막과 푸른 하늘까지.

정령들이 좋아하는 장소였지."

"아..."

"동시에 여기는 꿈이 내려앉는 장소이기도 했어."

"꿈이 내려앉는 장소라고요?"

"정이라는 거대한 존재는 몸을 구성하던 정신과 혼을 구성하는 정령으로 나뉘었어.

정신은 네가 알다시피 마력을 다루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존재로 찢겨져서

인간을 비롯한 생물군을 구성하는 기반이 되어버린 거고. 정령은 보다시피,

죽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마력 친화적인 존재들이라는 거지.

그렇다보니까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거야."

"근원적인 문제?"

"둘이 더는 하나로 돌아가지 못하는 형태가 되어버린거야.

두개의 파편이 서로 맞지 않는 모습이 되어버린 거지.

기본적으로는 다르말록의 짓이었어.

하지만 서로 받아들이지 못한 정령들과 정신은 분열하기 시작한거야.

자신들이 원류고, 상대는 자신에게서 떨어져나온 존재들이라고 말이야."

"예...?"

"정신은 몸을 이룬다고 했잖아. 영혼이 떨어져 나간 거라고 말했고,

정령들은 마력조차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그 근원이라고 자부할 수 없다고 했지.

결국 정신들은 점차 마력을 포기하고 그걸 내부로 순환시켰고.

그렇게 인간은 인간들끼리. 정령은 정령끼리 모여살면서

그 간격이 점점 커졌다는 거지."

"그럴수가..."

"그렇다보니 정신체는 마력을 환원하고, 정령이 마력을 위주로 다루면서,

점차 마법사의 비중이 줄어갔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분명 세계의 마력 총량은 동일하다고...!"

"그래. 동일하지. 그리고 그 원인제공은 정의 분신들도 했다는 말이야.

결로부터 말하면 그 마력들은 일부 인원에게 밀집되기 시작했고,

환경적으로 퍼져 이용할 수 있는 이들만 유기적으로 이어가는 수준이 되어버렸지.

그게 1400년 전의 일이니까 분명 26000년 뒤에는 더 심화했겠지?"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소마법 정도가 남았고,

최고점이라고 하면 마력탄의 연사 정도인 것 같더라고요."

"허... 진짜로? 용케도 멸종 안하고 버티고 있는 수준이네.

분명 1400년 전에는 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에너지 조작 정도는 하고 그랬잖아?"

"지금은 그런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고요."

"놀랍네. 그런데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

"뭐든지요."

"저 뒤에 있는 저 칙칙한건...네 친구야?"

"뒤에 있는 칙칙한것...?"

"느껴져. 불길하고 칙칙한게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전 아무것도..."

"그래. 일단 그럼 몸을 먼저 숨겨. 네 친구는 아니라는 거잖아?"

"네...!"

나는 동굴 틈 사이로 몸을 숨겼다.

축축하고 꺼끌한 감각.

그리고 벌레들이 사부작대며 기어다니는 소리.

그 사이에서 거무칙칙한 형태가 걸어왔다.

나는 그 존재를 마주하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젤렌지였으니까.

온통 검은 색으로 채색된 것 같은 그 어두운 얼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로

그저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건지 눈은 초조함과 두려움이 잔뜩 담겨있었다.

"젤렌지...!"

내가 그를 불러세운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젤렌지는 그런 내 말조차 무시하고 그저 걸었다.

저 앞은 막힌 길일텐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고, 이윽고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왔는지 몰랐던 것처럼

그 벽을 그저 어떻게 통과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갔다.

방향은 한곳으로 고정한채 목적없이 걷는 모습은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젤렌지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존재할 수 없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멜타이트."

"어."

"이곳에 속하지 않은 존재가 또 나타난 것 같아요."

"아마 그럴거야. 나도 느꼈으니까.

다만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말인데,

방금 그거,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다만 누군가의 잔념이 섞여들어온게 아닐까 생각해."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왜 여기 나타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삐삐를 혼자 놔둬도 정말 괜찮은지

나는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말이 없네 엘타리스. 확신이 섰어?"

"네. 가봐야겠어요."

"그래. 하지만 바로 돌아가지는 않도록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어가.

두 번은 돌아오지 않을 기회일테니까 확실히 뽑아낼 수 있는 모든걸 뽑아가라고."

"그럴 거에요. 적어도 여기서 성장해야 하는건 나 혼자만이 아니니까.

그리고 난 그 애 엄마로서, 그 애를 마주하러 가야해요."

"뭐야, 그 새 애 엄마가 됐다고?"

"그새는 아니에요. 26000년 뒤의 이야기니까."

"그렇군. 그럼 26000년 뒤에 다시 보자고. 가능하다면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침묵했다.

나 역시 발을 천천히 옮겼다.

텅 빈 동굴에 또각 하는 발소리가 울리면 그가 물었다.

"너, 나가는 법 모른다며."

"네. 하지만, 나가봐야죠 이제. 지체할 수는 없어요.

아까 그 존재를 봐 버렸으니까."

"아까 그게 뭐였는데?"

"어쩌면 정말 거슬릴지도 모르는 존재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젤렌지가 사라진 뒤로 따라 걸었다.

동굴의 벽에 보이는 작은 틈새. 그곳으로 바라본 너머의 축축한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

왜 이 앞으로 걸어갔는지도 모르고, 왜 이곳에 나타난건지도 모르지만,

분명 젤렌지는 이곳에 있었고, 나는 그에게 방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분명 아무 이유 없이 이곳에 나타날 인물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건지 알아내야 했다.

손을 뻗었고 집중했다.

그 손끝에서 분명 무언가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마력은 분명 몸 안에서 회전하고 있다.

마법은 사용할 수 없지만 말이다.

삐삐에게 사용한 포션의 효과가 있었던 걸로 봐서 주술의 산물도 사용 가능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마력은 존재하지만, 그걸로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마력을 손 끝에 모았다.

젤렌지는 죽은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필시 이곳으로 온 것으로 보아 어느 차원에도 속하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현재 이 세계는 차원의 영역에서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사후의 존재가 어떻게 접근한 것일까.

멜타이트는 분명 답을 말해주었다.

1차원의 선에서 2차원의 면으로, 3차원의 공간까지.

그리고 우주의 차원선에서 엇갈리는 수많은 갈래들.

답은 나왔다. 수학적으로 보았을때 하나의 영역을 박탈당한 것과

모든 영역을 박탈당한 것은 그 사이에서 하나의 접점을 만든다.

뒤집지 못하는 종이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가정했을때,

종이 뒷면에 그린 그림은 종이 밖에 그린 그림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종이 뒷면으로 잠시 빼놓은 것이 이 세계이고, 종이 밖으로 추방당한 것은

젤렌지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차원은 곧, 종이가 무한정 붙어있는 노트북과 같은 형식이 될 것이다.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면 페이지를 찢어버리거나, 다른 페이지에 새로 그린다.

어쩌면 가끔은 새로운 종이를 추가할수도 있겠지.

그런 개념으로서 차원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깨달았다.

젤렌지가 소멸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존재하는 이유,

기록에서 지워졌다고 말했던 헬브람의 존재를 누군가는 기억하는 이유,

내 기록을 고쳐썼음에도 멜타이트가 나를 엘타리스라고 부른 이유.

"그게 기록이구나... 기록의 도서관은...

아아... 그래서... 기록의 반쪽이라는 것도! 그 기록은... 그 책은... 우주였어..."

기록은 완벽하지 않았다.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기록에 허점이 있다.

이제껏 깨닫지 못한, 아니. 깨달으려 하지 않았던 근원적인 빈틈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그 기록은... 하나도 아니었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할 수도 있으며, 지워진 것을 복구할 수도 있는 가변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이 절대적이라는 불변성을 기반으로 세워진 다르말록의 신화는

무너져내릴 수 있는 모래위의 성이었다는 것이었다.

"아아아아아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느낀 이후,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 조차도 느끼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마력은 기록의 권한을 빌려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 마력이 이 세계에 간섭하지 못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노트 앞장에 아무리 낙서를 해도, 뒷면은 깨끗할테니까.

젤렌지는 그 두꺼운 노트의 측면에 펜을 대고 쭉 그어버린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앞면, 뒷면. 그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 존재는 그저 방황하며 어느 노트에도 소속할 수 없다.

나는 이 세계에서 한없이 무력했다.

그와 나는 기본적으로 존재 자체가 달랐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렇다는 것은...

"찾았다."

나는 노트 앞장의 뒷면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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