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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88화 (288/303)

〈 288화 〉 성장

* * *

내가 신호를 따라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엠페레스의 상부에 위치한

거대한 빙산지역이었다.

아마 교국과 이어지는 길목을 하고 있을, 마운틴엘프의 숲이 생길 장소겠지.

그리고 그 아래에서 폴리모프를 한 삐삐가 거대한 천각룡과 함께 앉아 울고 있었다.

"흐아아앙!!"

"삐삐야!"

곧장 삐삐를 안아주었다.

"마마! 삐삐가... 흐아앙..."

"미안해.. 혼자 두는게 아니었는데... 미안해..."

"아...아줌마가...으엥...!"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데릭이 준 노트의 내용을 생각해냈다.

[실패시에 리스크가 상당히 크고, 실질적으로는 효율도 잘 나오지 않아 일반적으로는 잘 시도하지 않는다.

이를 시도하는 것은 상당히 분노했다는 의미이므로, 대피를 추천.]

잘 시도하지 않는 행위.

그것은 다시 말해서 불길한 결말이 나올 거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제서야 나는 삐삐의 옆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천각룡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비늘과 부러졌지만 강한 뿔이었다.

삐삐를 안아들고 천천히 시간을 뒤로 돌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보았던 것은 아르간티아가 떠나고 나서 남겨진 초국이

어떻게 멸망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분명 1400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님에도 그곳에는 퇴폐하고

향락에 젖은 인간들이 방탕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있었다.

이제 누구도 그들을 중재하지 않았던 탓이다.

삐삐는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보였다.

이들은 천각룡을 비롯해서 지저룡, 뇌룡종과 준하는 희귀 생물개체를 포획하고

이를 소재로 하는 마법 재료 및 사치품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그저 용도 없는 장식이었으며

많은 소재를 뜯긴 생물들은 그저 버려지거나 고가의 요리가 되었다.

야외에서 벌거벗고 뒹구는 이들은 처참하게 죽은 용종의 뿔과 이빨로 자신들의 성욕을 달랬다.

나는 그 모습에 삐삐의 눈을 가리고 한숨을 겨우 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리낌 없이 그런 행위를 하게 된 근간에는

다르말록이 있었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자.

인간의 세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아르간티아를 최악의 방식으로 욕보이고 있었다.

아르간티아는 인간에게 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은 아르간티아를 배신했다.

결국 다르말록은 그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이들을 짓밟아 버렸다.

더 과거로 시간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을 메우던 천룡종과 지상을 거닐던 용종을, 그리고 대해와 산을 넘나들고 있던

그 수많은 생물들을 그저 처참하게 유린하고 있었다.

도리어 그 광경에는 초기의 미리타엔이 더 선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것은 자연이었다.

아르간티아가 인간을 규합해서 국가를 세울 당시만 하더라도

정령과 엘프, 악마와 용종이 저마다 각자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고

그 경계를 처음으로 넘은 것이 다르말록에 의해 탄생한 괴, 그리고

괴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인 괴물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점차 감염병처럼 번져가던 탐욕은 마침내 인간을 물들였다.

다르말록의 행보는 말 그대로 인간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인간을 배제하고 아르간티아와 나를, 그리고 헬브람과 도르테우스를

마침내는 멜타이트까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간의 방종은 천각룡들이 단체로 인간을 습격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나는 조용히 다시 쓰러진 천각룡에게 돌아왔다.

천각룡은 이 개체가 마지막이라고.

여왕이었던 용이라고 삐삐가 말했다.

"마지막 여왕이라고?"

"응..."

불길한 느낌에 나는 그 최후를 지켜보기로 했다.

약 500년에 걸쳐 서서히 말라간 용은 결국 그 껍질이 바스라지고

발톱이 빠지고, 비늘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알을 품었다.

마지막으로, 더이상 그 알을 품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자신이 알에게서 마력과 생명력을 뽑아내지 못하게 조용히 눈을 감고 자결했다.

마력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모체가 알보다 조금이라도 마력이 짙다면, 알에게 전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게 되는 그 순간은 결국 오기 마련이다.

살은 바스라져 말랐고, 결국 그 자리에는 거대한 용의 뼈만 남았다.

알은 겨우 그 위에 남아 조금은 초라해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지났고, 알이 혼자 남겨진지 일주일이 지날 무렵에

누군가가 그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혼자 남겨진 알과 거대한 용골을 보고 털썩 무릎꿇은 사람은 익숙한 장발의 남자였다.

"미안하다..."

아르간티아였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조용히 그 앞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는 알을 발견하고 말했다.

"부탁한다."

그 뒤로 터벅터벅 걸어온 것이 처음보는 얼굴의 남자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에 누군지도 모를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째서인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알입니까? 부탁하고 싶다고 했던 게."

"그래."

"알겠습니다. 약속한건 확실히 지켜주십시오.

흑마법의 끝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알에게 손을 뻗어 마법을 거는 손은 빠르게 마법진을 그리고 캐스팅을 시작한다.

나는 저 마법을 알고 있었다.

내가 성연 마카에게 걸었던 마법이었다.

봉인의 마법.

"이 알의 시간을 멈췄습니다.

이제 알을 깨울 정도로 막대한 마력을 쏟아붓기 전까지는,

아마 죽지도 깨지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대체 아르간티아. 당신쯤 되는 분이 왜 저런 알에게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아르간티아는 조용히 옆에 놓인 거대한 용의 뼈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내 친구였거든."

"알은 여기 두고 가도 되겠습니까?"

"아무도 손 대지 못하게 해줘."

"그럼 여기 얼음 기둥 아래에 넣어두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얼음기둥 아래로 알을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얼음기둥은 그냥 보기에도 절대로 녹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크기였다.

사방에서 눈이 불어오는 이 차가운 냉지에서는 말이다.

"후우... 이게 마지막 천각룡이라니... 안타깝기는 하군요."

"그러게... 네가 쓰는 그 생물학 노트에 천각룡은 있나?"

"있죠. 그래서 말인데, 따로 적어야 할 내용이 추가되었는데,

이미 천각룡 페이지는 다 적어둬서 문제죠."

"마지막페이지에 따로 적어줘."

"그러겠습니다."

아르간티아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 거대한 용의 뼈를 하나씩 옮겼다.

천천히 옮기고, 마침내 그 모든 조각을 한데 모아 들고 천천히 북부로 걸음을 옮겼다.

이 알의 행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영원한 침묵의 눈이 녹아내렸다.

얼음기둥 역시 부서저내렸고, 얼음의 잔해 밑에 깔려 땅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마침내 이 알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약 24000년이 더 지나서,

암시장에 물품을 납품하기 위해 고고학자와 주술이 담긴 물건을 조사하던

파면된 학자에 의해서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삐삐를 안은채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삐삐야."

"응?"

"사랑해."

"히히, 삐삐두."

나는 여왕의 뼈를 어디로 가져갔는지에 대해 조사했고, 그 답은 금방 나왔다.

엠페레스 북부로 올라가는 지역의 순수의 폭포.

그 샘 안에 조심스럽게 하나씩 뼈를 집어넣으며 아르간티아는 묵념했다.

"편히 쉬길."

나는 거기서 발걸음을 멈추려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 폭포 아래에 직접 들어가본 나는 그 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 뼈는 결론부터 말하면 흩어졌다.

한 마녀가 그것을 챙겨 감격하며 도망쳤고,

결국 교국에서 덜미가 잡혀 뼈를 빼앗기고 만다.

그 뼈의 일부는 마녀가 가지고 탈출하는데 성공해 보르드예프로 탈주했고,

거기서 마력연구와 유전자 연구의 반복으로 용인족이 탄생하게 되었다.

남은 뼈들은 안타깝게도 교국에 넘어갔고,

그들은 용골에 담긴 마력을 사용해 성수를 뽑아냈다.

그리고 용골이 발견된 장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에 들인 시간은 당연히 교국에서 마운틴 엘프를 몰아내고

그곳에 감시초소를 세운 연도와 일치했다.

"후우..."

"삐삐두 알고 있어."

"뭘?"

"프렌데라 여왕님... 아줌마... 삐삐를 낳은거지?"

"응..."

"고마워. 마마는 알고 있었지? 그래서 일부러 따라가라고 한거지?"

"....."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마가 오기 전에, 이야기했어.

잠깐이지만, 기억해달라고. 그리고 살아남아달라고.

꼭 이 아이를 지켜달라고 하면서...

나한테 반짝반짝한거... 그거... 마력을 보냈어.

그건... 결국 받지 못했는데... 그런데... 봐 버렸어..."

나는 삐삐를 더 꼭 안아주었다.

울컥이는 목소리가 안쓰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마력에... 기억이 담기는거 알았어...?"

"아...아아...."

"나 아직 어른이 되지도 못했는데... 너무... 많은걸 배워버린 것 같아....

마마... 아니, 엄마... 나 이제 말도 잘한다...?"

"아냐.... 아니야 삐삐야...."

"다 아는데... 다 알 것 같은데..."

"크읍..."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그래..."

"불결이...불결이 뭐야....?"

"깨끗하지 않은것. 더러운 걸 불결이라고 해..."

"삐삐는... 나는... 불결한걸까... 동족을 죽이고 태어난 걸까..."

"아니야. 넌... 천각룡의 마지막 여왕이야... 제일 고결한 용이야..."

"그렇구나..."

삐삐는 나의 품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막연히 다가왔다고 생각했던 삐삐의 성장은 급격하게 안타까운 비극을 담고

눈물로 피어나고 말았다.

한결 거대해진 모습, 그리고 훨씬 능숙해진 마력 운용과 금빛 광채.

화려한 날개와 두 쌍의 뿔.

비늘끝에 다른 채도로 칠해진 아름다운 패턴의 테두리.

"고마워 엄마."

"마마라고 불러도 돼."

"응. 마마. 나는 여전히 앨리스 삐삐 세리타인이니까."

삐삐와 함께 다음 목적지로 걸어가면서 나는 노트를 꺼냈다.

노트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천각룡의 여왕급 개체는 비늘 끝 테두리에 다른 색상이 칠해지는데,

이때 칠해지는 테두리의 색은 많이 흡수한 마력의 성질을 따른다.]

그 밑에 확연히 다른 시기에 적은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좋은 어머니를 만났구나 꼬마야. 축하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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