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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89화 (289/303)

〈 289화 〉 리더

* * *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꽤나 젊었을 때였다.

"슬픈 눈을 하고 있구나."

"그러는 너야말로 지독한 절망에 찌든 눈이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겁도 없군. 인간이 말을 거는건 처음인데."

"인간이긴 해도 다른 인간들과는 좀 다르지."

"우월감인가?"

"아니,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거든. 하하..."

"그거 안됐군."

"친구가 있기야 있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져버렸어."

"그런가."

인간과 말을 섞은 것은 그것이 거의 처음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 눈은 정말로, 내가 본 인간들 중 제일 순수하게

고통을 감내하는 눈이었으니까.

"이름이 뭐지?"

"아르간티아."

"이거 영웅님을 몰라뵌건가."

"영웅이 아니야.

그냥 겁쟁이일 뿐이지."

"누가 영웅님을 겁쟁이로 만들어버린건가?"

"그냥 세월이. 세월이 그렇게 만들던데."

그 말은 거짓이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는 너는 이름이 뭔데?"

"프렌데라."

"그렇구나."

"별다른 할 말은 없나?"

"이름을 물어봤고 이름을 알려줬는데 뭘 더 바라겠어."

"시원시원하군."

그는 내 말에 픽 웃어보이며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용사님께서는 지도자 아니셨나?

왜 이곳까지 찾아온거지? 인간들의 구역은 없는 걸로 아는데."

"아, 여기가 어디였지?"

"이름없는 땅이다. 땅에 지명을 붙이는 존재는 너희 인간들 뿐일거다."

"그런가? 오만했네."

"그래, 모두 같은 대지고 모두 같은 창공이며 모두 같은 대해였다.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는. 이름을 붙인다는건... 그 존재를 재단한다는 거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군. 배웠어."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 해 줄 생각이지?"

"쫒겨났어."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머리를 긁었다.

"이야~ 어쩔 수 없잖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말이야.

독립하겠다는 자식을 언제까지 품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잖아?

나한테도 그런 순간이 온거지."

"상당히... 의연하군."

"그러게. 나도 이정도로 의연할 줄 몰랐는데 말이야."

"표정은 완전히 썩어있다."

"어쩌겠어. 내가 화를 돌릴 대상은 지금 오직 하나 뿐이야."

"꽤나... 단호하군?"

"너도 내 나이 되면 알거야."

"인간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처음이다."

"그렇겠지. 색다른 경험이길 바래."

"재밌는 남자구나."

"그래서, 프렌데라. 왜 여기 있는 거야?"

"존재의 의의를 찾고 싶어서."

"존재 의의?"

"태초의 인간은 너라고 들었다.

너에게 모든 인간이 분화했다고 말이야.

짐승들도 정신이 분화되며 생겨났다고 말했고.

천사와 악마들은 테라시아에게서 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필시 우리 용종도 그 나름의 근간이 있을 것이다.

지금에 들어서는 용들도 종으로 분화되고 말았지만,

분명 그 시작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시작을 나는 알고 싶은 것이다.

분명 우리가 생겨난 데에도 이유라는것이 있을 테니."

"그거라면 분명..."

"쉿. 그대에게 대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가는 과정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렇구나. 확실히 그럴 법 한 이야기야."

"그대는 별난 지도자로군."

"이젠 지도자도 아니지만."

"그대와 같은 인간은 처음 봤다. 과연 살아온 세월이 다르다는 건가."

"이유야 모르지만 결국 별나다는 이야기잖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죽지 않는다고?"

"그렇지 뭐. 그래도 썩 편한 건 아니야.

이제까지 몇 명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났을 것 같아?

또 몇 명의 사람들이 날 두려워하고, 또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발등을 찍었게?"

"그럼에도 그대는 인간에게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걸 어떻게 알지?"

"자신을 내친 이들을 이해하고 떠나온 모습이 처량해보인다고 말하면 이해하겠나?"

"아, 맞네. 나 지금 쫒겨온 거였지 참."

그는 천진하게 웃어보였다.

"어떻게 잘도 그 정신을 붙들고 있군."

"마음쓰지 않는 법을 알았거든."

"마음쓰지 않는 법?"

"오래 걸렸어. 내 일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그들이 이루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게 어려웠거든. 인간에게는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영웅으로 기록된 역사니까 내 이름은 꾸준히 거론되더라고.

정작 나한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지만."

"공허로군."

"보답받지 못하긴 했지."

"....."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폴리모프를 통해 모습을 바꾸며 다시 물었다.

"네 눈에 비치는 나는 어떠한가."

"예쁘네."

"그게 다인가?"

"그정도면 극찬이야.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눈이 얼마나 높아졌을 거라고 생각해?"

"영광이군."

"뭐 할 일도 없겠다 한동안은 여행이나 다닐 생각이야."

"하긴 이제 정치도 했겠다, 즐길 것도 즐겼으니 방치하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겠군.

그런 여유는 부럽다고 생각한다."

"왜, 너는 여유가 없었나?"

"나는 무리를 이끌 책임이 있으니까.

이제 그대가 물러났으니 일선에서 격하게 움직이리라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왜?"

"그대가 사랑하는 그 인간들이 우리의 적이기 때문이다."

"하아... 미안해. 그건 그러니까..."

"그대의 탓은 아니다. 박애를 탓하기에는 그대의 무력함을 알아버린 이후이니."

"그렇구나..."

"그대는 수긍하는 것 이외에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나?"

"글쎄. 난 그저..."

"하아... 이런 인간을 지도자로 세웠으니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이

왜 그대를 져버린 건지도 알 만 하군."

"하하하..."

"종종 이곳으로 찾아와라. 그대와 이야기하는건 매우 답답하지만,

어딘가 후련한 느낌을 받는구나."

"그러지 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는 가끔씩 찾아와 문을 두드리듯 바위에 앉아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흥미롭군."

"어, 왔구나?"

"내가 부른 건데 와야지 맞지 않겠나."

그는 미소를 짓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다가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건 네모 모양을 한 작은 상자 같았다.

"이게 뭔가?"

"선물이야. 마음에 들어했으면 좋겠는데."

"선물이라... 이제껏 조공은 받아 봤어도 선물 같은건..."

"또 그런다. 그냥 주면 고맙다고 받으면 돼."

"뭐길래 그렇게 생색을 내는지는 확인해볼 가치가 있겠구나."

나는 그에게서 작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 상자 안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마력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이건 무슨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나."

"천각룡들은 받아들인 마력에 따라 강해진다며?

그래서 내 마력을 담아봤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정점이 넘기는 마력이라... 감사히 받지. 이거라면 불로불사에 가까워질 수 있나?"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야. 그건 내 저주 같은 거라서 말이야.

아마 그 마력에 담겨있는건..."

"힘의 마력이로구나."

"그래. 힘의 마력이지."

간단한 마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근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인력, 척력, 중력, 강력, 약력, 자기력. 말 그대로 모든 것에 작용하는

그 힘 자체를 다루는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대의 마력이라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해도 되겠구나."

"그렇...아, 그러고 보니 비늘 색에 변화는 없겠네.

금색에 금색은 섞어도 태가 안날 테니까."

"그새 천각룡의 특성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군."

"그래, 여왕은 마력을 받아 그 형태를 변화시킨다고 들었어."

"보여주마."

나는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화려하게 자라난 머리 위의 뿔이 두 쌍으로 늘어난 것을 보여주며

나는 괜히 그에게 이것 좀 보라는 식으로 으스댔다.

그러면 그도 놀라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축하해."

"이건 아무래도 익숙해 질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겠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나 역시도 평소에는 잘 다루지 않는 힘이기도 하고.

그런건 어디가서 함부로 사용하기도 어려우니까."

"이건 단순히 기백이 좋다고 사용할 만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사용할 수 있는 자가 그 역량을 보일 수 있을 때 사용해야 하지.

머리가 비상한 자여야 한다. 그 말인 즉슨."

"그 말인 즉슨?"

"그대에게 어울리는 마력은 결단코 아니었다고 하겠다."

"동감이야. 너무 무거운 짐이었지."

"나 외에도 누군가 그대의 마력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는가?"

"그럴리가."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는 당황스러워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아닌가? 있으려나...?"

됐다. 이 남자는 나를 속일 위인조차 되지 못한다.

재미있는 자다.

"모든 용은 마땅히 그 생태와 습성을 따라 살아가기 마련이다.

제일 이질적이고 제일 가변적인 용이 우리 천각룡이지.

우리는 하늘에서 관망하는 천룡이며 동시에 굴하지 않는 의지를 지닌 각룡이다.

그 안에 품은 마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대는 아는가?"

"순수한 마력으로 발현된다는 건 알아."

"무엇으로도 물들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 원형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은 우리뿐이다.

약속하마. 천각룡종의 여왕, 프렌데라가 선언하겠다.

그대는 나의 친우일 것이다."

"하하..."

"친구 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러게. 난아직도 우리가 친구가 아닌 줄은 몰랐는데."

"이해해 주게나. 용들이 워낙에 까탈스러워야 말이지."

나는 웃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있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어쩌면 그의 덕분에, 나는 무리에서 점차 무게를 잡아갔다.

단언컨대 그의 마력은 내가 살면서 채 10%도 제대로 다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여왕으로서 무리의 지도를 맡아야 했다.

이전부터 해오던 일이었지만, 그들이 나를 보는 시각은 달라졌다.

점차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안도와 존경이 섞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에게 의지가 될 수 있음에 기뻤다.

하지만 점점 상황은 그렇지 못한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그 마력을 너무나도 맹신하고 있었다.

모든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나 역시도 그 마력에 점차 의존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늘의 색이 같아 알아채지 못했지만 나는 점점 마력의 조율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그래도 된다고 여겼다.

용의 날개와 뿔은 마력을 다루는데 능숙하니까.

나는 나를 우수하다고 믿었으니까.

점점 나를 의지하는 부하들이 늘어날 수록 나는 그들앞에서만큼은 유능한 여왕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느꼈다. 모두는 나에게 과할 정도로 의지하게 되었다고.

내 유능하다고 생각한 착각들이 저들의 날개를 나에게 묶었다고 깨달았을 때는

나 또한 아르간티아가 그랬듯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올라 있었다.

그건 천천히 다가왔기 떄문에 우리가 굳이 눈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랬기 때문에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으며

결국 후회를 다짐하면서도 남은 것은 실낱과도 같은 희망을 겨우 품는 것 뿐이었던

두 지도자들의 숙명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참으로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그저 관여하지 않고 종족의 번영과 평화를 바라는 것은

나 역시도 그 눈으로 언젠가 마주했어야 할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에게서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 모든 순간이 멸종을 불러왔고, 나는 홀로 도태될 수 있었던 과거를

사무치게 후회하며 모두를 죽음으로 내몬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건, 어느날의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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