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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90화 (290/303)

〈 290화 〉 계승

* * *

"여왕님, 이번에도 또 동족이 당했습니다."

"또인가?"

"네."

"역시 인간일테고?"

"그렇습니다."

"왜 매번 그들을 막아내지 못하는 건가?"

"그들이 비열하기 때문입니다.

사특한 마력이 대지 전체에 퍼져있고, 흡수할수도 뱉어낼 수도 없는

그 진득하고 불길한 마력이 용종을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천각룡은 말입니다."

"그런가."

벌써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아르간티아와 몇 번인가 만남을 가지면서도 이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그들의 탐욕을 나는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그들의 손에 끌려가야 했고

이들은 나를 믿고 있다.

내가 이들의 희망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더 침착해야 했고 더 무거워야 했다.

"이타릴로트."

"네, 여왕님."

"난 여왕같은걸 하고 싶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내게는 자격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 말씀 마십시오."

"후우... 인간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겠다고 했는데,

뭐라고 돌아온 대답은 없던가?"

"아무래도 다르말록이라는 자를 맹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존중하려 드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로 불쾌하구나."

대화는 끝났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지났다. 평화. 그 허울뿐인 평화를 위해 감내한 시간은 년 단위로 쌓여갔다.

그들이 우리의 땅을 앗아가도 우리는 그들을 주시하는 것으로 용서했다.

아직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그래서 우리를 침략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용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용들은 늘 그랬다.

무르다고 말할 수도 없는 최소한의 무언가를 선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넘지 않길 바랐다.

아르간티아와 반복되는 대화를 통해 나는 몇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더이상 그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는 것.

인간은 마땅히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그를 믿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응당 그 가능성을 져버린 인간이 입히는 피해에 대해서는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자신은 그저 먼저 태어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했다.

"무르군. 너무 물러터졌다 그대는."

"내 방식은 늘 이런 식이어서."

"나는 그대를 좋은 친우로 인식하고 있지만 행여라도 그대와 무언가를 같이 계획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도 지금은 무언가를 계획하고 주도적으로 시행하고 하는 일은 못하겠어."

"곧, 폭풍이 올거다."

"휘말리는 사람이 많겠군."

"어쩌면 용종도 다수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

"바람으로 끝낼 수는... 아니, 아니야. 이제와서 구차하네.

나는 관여하지 않을게. 언젠가는 그렇게 될 운명이었지."

"그대는 현명한건지, 그렇지 못한건지 잘 모르겠을 때가 있다."

나는 차분히 그의 표정을 흩었다.

"그대는 그 태풍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알고 있나?"

"나비는 태풍에 휘말려 살아남을 수 없겠지.

굴을 파서 숨어 지내는 생물이 아니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하려는거야?"

"저들은 막아야 한다. 고목의 뿌리에 흰개미가 사는 것을 발견했는데,

어찌 이를 방치할 수 있겠는가."

"흰개미... 흰개미라..."

"결국 고목을 쓰러뜨릴 거다."

"알아서...해..."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의 자식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으로 인한 자책이겠지.

"그래서 태풍은 언제 불 것 같은데?"

"혹여나 그럴 일은 없으리라 믿지만, 알릴 생각인가?"

"아니, 이제 그들은 내 말조차 듣지 않아."

"그렇군. 한동안은 알을 만드는데 힘쓸 생각이다.

그대에게 멸절의 예언을 듣고서도 뒤를 준비하지 않을 만큼

나는 용감한 자가 아니다. 강하지도 않다.

후대를 준비해야겠지.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면, 12달 정도 걸리지 않겠나?"

"하지만... 아니... 아니야... 다음에 또 오지."

"그대는 그대가 할 일을 해라."

우리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그리고 예정대로 알을 만들던 내게도 변수가 생기고 말았으니,

인간의 타락은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다.

나는 늘 닿지 않은 기도를 품어야 했고

목 위로 차고 올라오지 않는 벅찬 언어를 속으로 누르며 지친 동료를 달래야 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숨지 못하도록. 저들이 영원히 우리의 눈을 피하고,

언젠가 반드시 저들을 몰아낼 수 있도록. 쌓아올린 것은 이곳에서 이뤄지고

오직 자유만이 이 곳에서 숨쉴 수 있도록. 그 더러운 삶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깨닫도록 하소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어떻게 되었나?"

"모두 여왕님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 후대를 위해 날카롭게 벼려진 눈을 치켜뜬 이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다. 앞으로 조금이면..."

시선이 모인다.

용의 알은 간단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강한 용일수록 더욱 그렇다.

체내 마력을 자신의 혼에 붙들어 천천히 압축해 밀어내는 일이다.

성급하게 진행하다가는 깨져 버릴 것이고, 너무 과하게 품었다가는 도리어 알을 말려죽인다.

그 이후에 자신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그 안에 새로운 용이 깃들게 된다.

필멸의 존재일수록 천박한 방식으로 생명을 만들기 마련이다.

고결한 존재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후대를 잇는다.

아직 마력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전쟁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해 오히려 짐이 될 것이다.

내 고민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날의 일이었다.

"이타릴로트."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타릴로트?"

다들 내 눈치만 살피는 모습에 나는 불길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타릴로트는 어디있나?"

"이타릴로트는 단신으로 인간들의 구역에 쳐들어갔습니다."

"이타릴로트가? 왜!"

"이타릴로트의 알을... 인간들이 훔쳐갔습니다."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것이... 마법의 재료로서 고가에 거래된다고..."

"그게 정말이냐?"

"예."

"고작 그 마법 때문에 마력 적응성도 낮은 인간들이 용족의 알을 훔친다는게...

언어도단이다.."

까드득 이가 갈린다.

"일어나라."

"더는 참을 수 없겠구나. 직접 인간들의 동태를 확인하고 와야겠다."

우리는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종족.

그들의 죄를 관망하고 심판하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동족들을 이끌고 아르간티아 초국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바라본 것은 날개가 잘리고 목이 베여

처찬하게 널브러진 채 경매장에서 사지를 썰려 팔리고 있는 이타릴로트였다.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곧장 방향을 돌려 초원위로 내려앉았다.

"더는 참을 수 없다.

나는 이를 두고 볼 수 없다.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리라 믿는다.

이제 인정할 때가 되었다.

돌리고 외면하던 시선을 모을때가 되었다.

저들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한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공습격을 준비해라."

"여왕님...!"

"준비해라."

천각룡의 비늘은 기본적으로 금빛이다.

태양에 가깝게 날게 되면 비늘에 햇빛이 반사되어 아래쪽에서는 그저 반짝이는 섬광으로 보일 뿐이다.

마력을 둘러 떨어져내리는 천각룡무리의 폭격. 그 위력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화려한 빛무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건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젠가 멸족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결코 달갑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이곳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숭고한 희생이 될 것이고,

도피 끝에 저들이 우리를 다시 찾아냈을 때는 필시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어이 저들의 오만을 용서하지 못하게 되었고,

저들을 대지 위에서 지우기를 바라고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맞서 싸우고 쟁취하는 승리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왕께서는 아직 알을...!"

"내 전투와 끝을 이 알이 기억할 것이다.

이 아이는 내 의지를 이어받을 것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고결한 꽃과 같이 피어날 것이다.

결코 지지 않는 태양처럼 빛날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아이와 함께하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와중에도 내면에 남아있던 걱정과 미련은

무리 끝에서 작게 빛나는 마력을 발견한 순간 사라졌다.

왠지 모르게 따스하고 나와 닮은 마력.

순수하지만 그 끝에서 빛나는 옅은 생명력의 기운이

내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를 품어주는 것 같았다.

슬쩍 떠오른 미소에 나는 마음을 굳혔다.

"나와 함께 죽어줄 수 있겠는가?"

"여왕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죽더라도 제일 고결한 용으로 죽는게 낫겠지 뭐! 나 빼고 다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렇게 우리는 날아올랐다.

.

.

.

그리고...

그 날 아르간티아 초국은 지도에서 지워졌다.

그들의 바람대로였다.

아르간티아 초국의 붕괴와 동시에 인원들은 흩어졌고, 아르간티아를 따르던 이들은

대장간으로 사라지거나 아르간티아의 흔적을 따라 떠났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남은 다르말록의 추종자들만이 자신들의 낙원을 그리워하며

이아에르를 만들었고, 이아에르는 어떤 신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게 되었다.

뒤늦게 그들은 용을 두려워했으나 이미 천각룡은 전설속에만 남은 용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인간의 나라를 멸절시킨 최강용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그러나 일부 천각룡을 기억하는 이들이 평화롭고 순수한 천룡종이라고 그들을 변호할 뿐이었다.

이아에르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나 동시에 신에게 버림받은 최초의 국가였고,

그들은 인간의 순수한 문명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 덕에 인간의 서체로 쓰여진 역사서의 시작은 이아에르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과 마법의 이야기였고, 점차 이아에르 역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아에르의 인간이 중심이 된 사회에 지겨운을 느끼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이들은 다시 신에게 국가를 의탁하자는 신념을 가지고 일어섰다.

이들의 수장의 이름이 '샤르네아 벤 아도르' 였고, 샤르네아에 지지하는 이들과

기존의 이아에르 왕조의 분쟁속에 국가가 분단되어 각지에서 혼란이 일던 시기가

바로 샤르네아 시기였다.

샤르네아는 결국 41년간의 싸움 끝에 페세티아 대륙을 통일했으나

샤르네아가 지병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며 그를 중심으로 뭉쳐있던 이들이 흩어지며

분열하게 되었고, 27년이라는 짧은 집권기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각자 작은 세력들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규합한 것이 젤데리스의 시작이었다.

젤데리스의 페르데이 왕. 페르데이 가문은 본격적으로 다르말록을 숭배하며

그 은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길 바랐고, 다르말록은 이들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젤데리스의 역사가 새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상이 내가 점의 마법으로 뚫어낸 통로를 통해

다른 차원의 배제된 공간에서 바라본 아르간티아 초국의 분열이었다.

삐삐와 함께 이동하는 것을 성공해냈기 때문에

나는 굳이 두 발로 뛰지 않고도 위험 요소를 마주하지 않고

상황을 조망할 수 있었고 이는 내게 있어서도 아주 큰 소득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다시 돌아오면 되었고,

나는 여유롭게 삐삐에게 말했다.

"젤데리스야. 우린 젤데리스로 가야 해."

"젤데리스로?"

"응. 거기에 분명 다르말록의 정보가 남아있을 테니까.

삐삐, 조금만 더 참아줄 수 있지?"

"응. 할 수 있어!"

"그래!"

나는 웃으며 삐삐를 쓰다듬었다.

이제 익숙한지 삐삐는 상당히 편안하게 폴리모프를 구사했다.

"근데 마마."

"응?"

"나 조금 불안한데..."

"왜?"

"원래 가슴이 막 이렇게 무거운거야? 마마나 프렌데라 여왕님은 안그렇던데."

"어...? 어어... 그건 사람마다 달라..."

"발레리아 이모는 그것 때문에 아파했잖아."

"그건... 게비디 삼촌이 그렇게 수술을 한거니까..."

"좀 무서워. 무거워서 불편하기도 하고."

나는 삐삐를 슥 바라보았다. 이미 상당히 성장해버린 모습이 보인다.

아직은 아슬아슬하게 나이에 맞춘 느낌이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아무래도 바스트도 키도 따라잡힐 것 같았다.

대체 잠깐 헤어진 동안 왜 이렇게 커 버린 건지 잘 모르겠다.

"삐삐야."

"응?"

"엄마는... 그런거 잘 몰라..."

"그렇구나."

딸한테 질투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삐삐가 그런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 근데 한번 알고 나니까 신경쓰이네.

"후우..."

"왜?"

"아냐..."

"마마도 역시 앞으로가 걱정되는거지?"

"응... 그러게... 앞으로가... 걱정이 되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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