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 성녀
* * *
다시 도착한 페세티아 대륙.
삐삐가 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산을 걸어 넘을 필요가 없게 된 탓이었다.
젤데리스의 상황은 너무나 평온했고, 그저 신을 모셨다는 것 외에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다르말록이 활약할만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젤데리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대에 살아 있었으니까.
내 기억상 젤데리스에 본격적으로 다르말록이 손을 쓰는 것은 젤데리스 말이었다.
왕국이 본격적으로 망조가 들기 시작하던 당시의 일이다.
"삐삐야, 준비 됐어?"
"또 그렇게 보기만 하면 돼?"
"응. 그게 전부야."
"필요하면 그렇게 할게."
"그래. 바로 출발할게."
다시 흰 빛무리가 우리를 감쌌다.
어느새 시야에 떠오르는 정보는 또 다른 어두운 모습이었다.
하늘은 검붉은 색이었고, 곳곳에서 신음이 넘쳐났다.
젤데리스왕국은 오랜 전쟁으로 약화되어 있었고 페르데이왕은 백성으로부터 그 신임을 잃었다.
국가는 이미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백성들은 기근에 굶주렸으며 거리는 이미 사창가와 오락거리로 만연했다.
의지할곳을 찾아 백성의 민심을 돌리기위해 왕은 신전을 지었고 막대한 제물을 쏟아가며 신에게 기도했다.
33일째 되는 날 밤.
신전에서 페르데이왕이 기도를 마치자 신전 천장이 무너지고 그곳에서 뱀이 떨어졌는데,
이 뱀이 크기가 커다랗고 온 몸이 흰 빛이라 불길하게 여겨
누구도 감히 이 뱀을 죽이려들지 못했다.
이 뱀이 잠시 혀를 날름거리더니 망설임 없이 젊은 왕자, 멜베이를 물었고
멜베이는 잠시 뒤에 그대로 쓰러져 초점 잃은 백안을 보이고는 경련하듯이 몸을 떨며 말했다.
"왕자의 생명을 대가로 성녀를 내리겠다.
누구보다 큰 상처를 가진 처녀가 성녀로 선택받을것이다."
그 말과 동시에 피를 토하며 떨던 왕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놀란 왕이 정신을 차린 후에 급히 의원을 불렀으나 이미 왕자는 숨이 끊어진 후였다.
왕은 슬퍼했으나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왕자는 이미 죽었다.
왕은 멜베이 왕자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힘없이 팔을 떨어트렸다.
왕의 품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진 멜베이 왕자의 머리는 쿵 소리를 내며 신전 바닥을 피로 물들였다.
왕은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왕은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에 두 눈을 쳐박고 중얼거렸고
신하들은 왕이 미친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왕은 고개를 들었고, 그러고는 병사를 불러 왕자의 제사를 준비했다.
왕은 왕자를 백색천에 싸 유황을 발라 불태웠고, 그 뼈를 검은 상자에 담아 보관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비단으로 덮어 방부처리를 진행했고,
이를 왕성 건축가를 불러 왕성 어딘가에 숨기도록 했다.
그리고 건축가가 명을 지키고 돌아오자 단칼에 그의 목을 쳐 떨궈버렸다.
"왕자는 왕가를 떠나지 않는다"
이후 상자는 왕성 어딘가에 숨겨졌고,
그 이후로 가끔씩 성 곳곳에서 뱀이 출몰하곤 했다.
왕성 내 신하들은 이를 왕자의 저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간이 흘러 그 누구도 상자의 위치는 커녕
존재조차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일주일간의 장례를 마친 페르데이 왕은 아들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성녀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전국에서 상처를 입은 소녀를 찾아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곧바로 성녀를 찾는 벽보를 대대적으로 공포하고 이를 추진할 병력을 모았다.
왕국의 기사들이 대거 투입되었으나 이대로는 찾아 낼 수 없다고 판단한 왕은 국왕 산하 직속 성기사단을 불러모았다.
백색 성기사단에게 소녀들을 모아오라는 명을 내리고서 왕은 그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백색 성기사단의 주도하에 많은 소녀가 모였고 선택받을 아이가 누구인지 조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성기사의 일원인 그레이스는 아이들을 찾아 명부에 올리고 그녀들을 보호하는일을 맡았다.
아이들의 부모는 대부분이 그녀에게 자진해서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비용과 더불어
성녀가 될 자신의 딸이 보호받으며 고등교육을 비롯한 각종 국가혜택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대우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딸들은 울부짖으며 부모에게 매달렸으나
오랜 전쟁과 기근으로 이미 아이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는 국가에서
눈물을 삼키며 살림을 위해, 혹은 아이를 위해
부모는 다소 매몰차게 그 시선을 외면하며 아이를 그레이스의 손에 떠맡겼다.
그러나 그레이스 또한 아이를 보내며 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모습을 자꾸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가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 책임은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레이스는 하다못해 이 아이들에게 친구같은 보호자가 되기위해 노력했고 아이들은 그녀를 잘 따랐다.
그렇게 그레이스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불러모으고 다음 마을로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좁은 골목에 쓰러져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잔뜩 찢어져 더러워진 옷을 입은 채 엎어져있었고
등에 낙인이 찍힌 것이 찢어진 옷 사이로 보였다.
사창가로 통하는 길목에서 겨우 숨만 붙은듯 보이는 소녀는 누가 보아도 노예였고
전신에 채찍질의 흔적이 남아있어 보기만해도 곧 죽을것 같이 생긴 아이였다.
그녀는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녀를 한손으로 안아들고
성기사단에게 돌아갔다.
철걱거리는 무거운 갑옷의 삭막한 가슴에서 작은 아이가 자고있었다.
차가운 강철 갑옷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에 안도하면서
그레이스는 이 소녀 역시 성녀 후보로 넣었다.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괜히 등뒤에 묶인 무거운 성기사단 메이스를 더듬어 고쳐쥐기를 반복하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이를 안고 대열에 합류했다.
아이는 망치보다 가볍고 부드러웠다.
성녀후보가 수만명 가까이 모였고 왕은 그들을 위해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곧 왕은 그녀들 모두에게 시설을 제공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고
자격조건을 다시 따져 그녀들을 재검할 것을 명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이 일에 또 다시 잠을 바쳐야 했고
그렇게 선별된 아이들은 백명 남짓되는 수였다.
왕은 성녀 선정을 앞두고 다시 그녀들을 선별하기 위해서
그녀들을 신전앞에 불러모았다.
상처가 가벼운 아이들을 제외했고 처녀가 맞는지도 확인했다.
수치심을 느끼기도 이전인 어린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를 생각하며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검사가 진행될수록 하나 둘 성녀후보에서 탈락한 아이들이 나타났고,
왕은 이들에게 그 이상의 관심은 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부모와 국가 양측에서 버려졌다는 기억만을
현실로 받아들인 채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왕은 제외된 아이들에게는 일말의 자비없이 은화 한 닢씩을 던져주고는
성기사들에게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말 한마디만을 남겼다.
제외된 소녀들은 대다수가 아직 열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었고
그녀들의 눈은 울다 지쳐 말라있었다.
그녀들의 눈빛은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나 어두웠다.
돌아간 자신을 보고 지을 부모의 표정.
그리고 이곳에 오면서 본 부모의 마지막 표정.
아이들은 너무 어렸고 또 여렸다. 그레이스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들을 계속 분류하던 왕은 그레이스가 구한 작은 노예소녀에게 왔다.
"이 아이는 뭐지?"
아이는 익숙한듯 울지 않았으나 어딘가 두려운 눈빛으로 떨고있었고
자신을 향한 시선에 이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잔뜩 움츠러든 몸에 두려움이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다 겨우 대답했다.
"그...후보라고...생각해서..."
"노예가? 노예가 성녀가 될 수 있을것 같으냐?"
"그런건 모르지 않습니까.."
왕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했다.
"일리는 있군. 좋다. 내 아들의 목숨값이 헛되이 쓰이지 않길 바란다."
왕은 소녀를 보고 이죽 웃어보인 이후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가서 이 아이를 씻기고 옷을 주어라. 이 아이는 너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책임지고 지키도록."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레이스는 아이에게 미소지으며 이야기했다.
"언니랑 같이 갈까?"
소녀는 두려운 눈으로 덜덜 떨며 끄덕였고 그레이스는 아이를 쓰다듬어주었다.
놀란 아이가 머뭇거리기도 전에 그레이스는 아이의 자그마한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탕에 도착한 아이는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 그레이스가 아이를 씻겨주면서 물었다.
"이름이 뭐니?"
"없어요.."
"뭐?"
그레이스가 놀라서 씻기던 손을 잠시 멈추자 그녀는 글썽이며 죄송합니다를 연신 반복했고 그레이스는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혼내는게 아냐. 오늘부터 너랑 같이 지낼 제니퍼 그레이스. 그레이스라고 불러."
"그레이스?"
그레이스가 아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혹시 괜찮으면 내가 이름을 지어줘도 될까?"
"네.."
아이가 어설프게 웃어보였고 그레이스는 살짝 기뻐 눈물을 흘릴뻔했다.
"그럼 브리아나는 어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그레이스는 브리아나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고 싶었으나 천애고아였던 브리아나는
어릴적부터 노예로 팔려 겨우 버티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그레이스는 정식으로 브리아나를 데려다 키우기로 했고
브리아나의 이름은 브리아나 그레이스가 되었다.
그녀에게 난생 처음으로 주어진 애정은 부모도 가족도 아닌
처음 본 여 성기사였으나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국왕은 브리아나에게 성녀로서의 기대를 가지지 않았으나
나날이 변화해가는 그녀의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녀가 선정되는 날 밤 왕의 앞에 모인 소녀들은
제각각 상처를 보이며 앉아있었고 왕은 그녀들을 주시할 뿐이었다.
"게멘데르 공작, 자네가 보기에는 누가 선택되겠나.
과연 아직 우리가 찾지못한 성녀가 있을까?"
"없을겁니다. 무려 10일을 찾았고 2일을 검사했습니다. 혹시 몰라 제보도 받았습니다.
계획은 일말의 차질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왕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왕좌에 돌아갔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왕전에 늘어선 신하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병사들은 지금 당장 신전으로 돌아가 신탁을 확인하고,
성기사단은 다시금 대열과 정비를 갖추고 자리를 지켜라.
게멘데르, 의사를 불러오라.
혹시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겠노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계획대로 진행됨과 동시에 신전에서 밝은 빛이 타오르고 하늘로 뻗어나갔다.
마치 불기둥과 같은 빛이 하늘로 이어져 몇 분간 계속 불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감히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장엄한 광경에 눈을 떼는 자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왕이 그 광경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구국의 성녀라...이 정도면 젤데리스를 경계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당장 저기 크델리샤 놈들.
두번다시 우리의 영토를 짓밟을 수 없을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녀를 믿고 신을 의지하는 이상 다르말록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빛이 사그라들 쯤 왕은 다시금 이들을 조사했다.
몸에서 빛이나는 자는 없었다. 상처에 무언가 변화가 있는것도 아니었다.
이중 누군가는 징표가 있을 것이라며 왕은 계속해서 아이들을 검사했다.
왕은 이들중에 그 누구도 성녀가 아니었음을 납득하지 못했고 다시금 그들을 조사했다. 병사들과 성기사단을 그들에게 붙여 차이를 찾았고
무언가 반드시 달라진 점이 있을 것이라며 집착했다.
그러나 나오지 않은 성녀와 변화에 무릎을 꿇으며 좌절했다.
왕은 침묵했고 이들 중 누구도 실망에 주저앉은 왕을 만족시킬수 없었다.
"이들 중 성녀가 단 한명도 없단말인가! 아니 이건 너희가 더 자세히 찾지 않은것이 잘못이다!
또한 검사를 자세히 진행하지 않고 돌려보낸 것이 분명하다!
이미 신전은 의식을 마쳤고 이 곳에 성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명백하게 우리는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틀린가?"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벌레같은 놈들...일처리를 맡겼거늘 이를 이렇게 처리한단 말인가."
페르데이 국왕은 이들에게 금화를 1개씩 내리고 모든 소녀들을 집으로 돌려버렸다.
왕은 어전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 일에 집단 함구령을 내리고 퇴거를 명했고
이 일에 대해 발설하는 자는 사지를 비틀어 꺾어 다르말록의 제단에 올려 화형시켰다.
왕자의 죽음이 허사로 돌아간 것에 대한 울분의 표출이었고
자신을 배신한 다르말록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기도 했다.
신하들은 이후 그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왕은 귀를 틀어막았고 방안에 틀어박혀 술을 마셨다.
그를 위로하기 위한 악대를 준비해 음악을 연주했으나
왕은 악대를 돌려보내고 일을 주선한 자를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그 이후로는 누구도 감히 왕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고 왕은 점점 미쳐갔다.
그럼에도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이윽고 모든 성녀를 거부한 채로
그의 신하들과의 알현을 불허했고 정치의 전권을 게멘데르에게 위임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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