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 발단
* * *
왕은 다르말록을 저주했고 게멘데르는 성녀를 찾지 않기로 했다.
이들에게 중요한것은 서로 합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아들을 잃었고 게멘데르는 실권을 놓칠 수 없었기에
성녀를 포기하고 국내 정세 안정화에 전념했다.
성녀의 존재는 게멘데르에게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성녀가 나타난다면
언제 왕이 자신의 권리를 박탈할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의 영역이 그깟 소녀의 존재로 방해받는다는 사실이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게멘데르는 왕권을 업고 부와 권력을 축적하기에 이른다.
그는 왕이 되고싶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가문을 버리고 베델그 게멘데르는 타인에게 비밀로 자신의 이름을
베델그 엠페레스로 개명해버리고 만다.
이후 그는 왕을 목표로 그 초석을 닦았는데
법의 개편을 필두로 자신의 수하에 있는 병사를 조직하여 왕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왕이 있는 성을 강제로 점거해버렸고
그 기존의 병사들을 통제할 새로운 아군을 포섭하기로 한다.
그것이 바로 성기사단이었다.
게멘데르는 이후 성기사단을 한 명씩 찾아 다니며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고
성기사단 또한 그가 왕의 대리로서 성기사단을 통제하는것에 점차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페르데이 왕은 나날이 신임을 잃어갔다.
왕이 포기해버린 아이들은 제자리로 돌아갔고 그녀들은 왕에게 받은 금화에만 관심이 있었다.
부모들은 성녀로 선택받지 못한 자녀대신 간택된 누군가의 성녀를 저주했다.
다르말록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한 이들의 신앙이 등을 돌리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여 분노했고 이들의 성녀에게 저주를 걸었다.
성녀는 모든 백성의 감정을 공유했고 백성들이 느낀 절망과 불안을 떠안았다.
고통에 몸서리치는 날들이 많아졌다.
백성들은 이를 알 리가 없었고 이들은 날마다 갈곳잃은 분노를 표출했다.
성녀 후보들은 그저 제자리에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간 소녀들이었고
단지 부모의 변한 모습을 어색해 할 뿐이었다.
다만, 그 중 운 좋게 발견된 브리아나의 생활만이 달라져있었다.
그레이스는 브리아나를 적응시키기 위해 학교로 보냈으나 발맞춰 따라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시작부터 차이가 난 수준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다.
브리아나는 그레이스를 생각하며 견뎌냈다.
그레이스의 성기사로서의 업무중 그녀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레이스는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브리아나 또한 이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녀가 사라진 국가에서 그들의 희망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성기사단과 기사들이기에 더욱 그들의 기대를 배신할수 없었던 이들은 치안유지에 더 신경을 썼고
그럴수록 돌아오는것은 왕에게로의 비난과 성녀로의 저주였다.
언제나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만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하루를 마치고 그레이스가 브리아나를 데리러 갔을때 그레이스는 깨달았다.
모두의 원망은 브리아나에게 향하고 있었음을.
노예출신의 소녀가 왕 직속 성기사에게 보호받고 그녀와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으며
하루 아침에 학교를 다니는 것을 포함해
눈에 띄게 달라진 생활양상은 마치 그녀를 성녀로서 보이게 했다.
누가보기에도 브리아나는 성녀였고 그레이스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그녀를 힘들게 했을지 생각했다.
그녀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욕실 내에서 목욕을 하며 물었다.
"학교는 어때?"
"좋아요, 다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괜찮은거야? 힘들면 가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그래, 아직도 반말은 잘 안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안아주고는
그레이스는 그녀가 보지 못하게 몰래 눈물을 훔쳤다.
자신을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소녀가 대견하고도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브리아나의 머리로 몇번씩 물을 부어주면서
그레이스는 브리아나를 행복하게 하기로 다짐했다.
브리아나를 씻기고 잠자리에 눕히면서까지도 괜한 걱정에 부담감이 쌓여
그레이스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브리아나의 등을 안고 말없이 눈물 한방울과 함께 잠에 들었다.
아침이 밝아 브리아나는 학교에 갔고 그레이스는 차림새를 정돈하고 있었다.
성기사단에 입단하면서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서
길게 기른 금발 머리카락의 자신을 생각했다.
순백 갑옷을 닦아내고 가벼운 천으로 가슴을 꽉 조여 맨다.
갑갑하긴 했으나 묶어매는 편이 갑옷을 입었을때는 차라리 더 나았다.
무거운 철갑옷에 은까지 덧대어놨으니 무겁고
그와중에 언더웨어, 더블렛을 기본으로 입어 덥기도 더웠다.
상징적인 존재인 팔라딘, 성기사는 그런 복장에도 불평 한마디 꺼낼수 없다.
모든 것을 감내하고 성기사라는 중직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나 껴입어도 결국 창과 검을 맞으며 전투에 참전하던 그레이스는
적의 메이스에 맞아 갑옷이 찌그러질 정도로 크게 다쳐 낙마했고
그녀의 갑옷 등부분은 다시 펴는것만도 일이었다.
비걱거리고 걸려서 안그래도 좁은 어깨의 활동폭을 더 줄여버렸다.
이때 메이스에 찍힌 상처는 등을 크게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큰 흉터를 남겼고
그 때문에 더운 갑옷에 활동하며 등이 땀으로 젖으면 괜히 쓰라린 기분이 들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함께 젖은 긴장을 털어내며
그녀는 망치의 긴 손잡이를 가죽끈에 꽂아맸다.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었다.
불안하기도 했으나 이 나라의 모두가 그녀를 의지했으니
그녀는 연약한 모습을 보일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성기사 그레이스로서 약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성에는 게멘데르 공작만이 조용히 왕좌앞에 서 있었고
그 뒤로 이어진 촛불을 조용히 바라보며 게멘데르 공작이 기도를 올렸다.
아주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확실하게 그는 왕과 성녀와 죽은 왕자를 저주했다.
아무도 듣지 못한 그 기도는 왕의 울분에 섞여 푸념처럼 사라졌다.
성기사단이 집결하고, 그들이 왕전에서 국왕대리 게멘데르 공작에게 인원보고를 마쳤다.
공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을 순찰이라는 명목하에 도시로 보냈다.
게멘데르에게는 아무도 감시가 붙지 않게끔 만들 계획이었으나
정작 그 누구도 이미 그에게는 별 관심을 쏟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지금, 성녀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오히려 그는 페르데이 왕이 받아야할 신망을 독차지하며 야망을 떨치고 있었다.
그가 어떤 계획을 세우건 반대할 만한 이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성기사단이 모두 성을 나서는 것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아르간티아님.."
그가 기분나쁜것을 보았다는듯이 소매를 털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누구도 그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시각 성기사단은 단장의 주도하에 도시의 순찰로 바빴다.
그레이스는 혹여 브리아나의 학교 근처 구역을 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그런일은 없었다.
단지 그녀에게 주어진것은 휘하의 일반병사 셋.
성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일반병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필요할 시 휘하에 일정 인원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레이스에게는 이런 병사들 보다 작은 소녀가 더 의지가 되었다.
그녀는 더이상 이전의 그 성기사 그레이스가 아니었다.
어느샌가 성기사보다 언니 그레이스를 선택한 그녀 스스로를 볼 때마다
일종의 갈등을 느꼈지만, 이미 그녀의 어깨는 많은 백성들이 의지하는 어깨였고
많은 병사가 원하는 자리에 있던 무거운 머리는
쉽사리 하기싫다고 포기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순찰을 명목으로 도시를 돌더라도 별 위험한 일같은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건 잘 안다.
일반 병사는 고사하고 마을 젊은이가 두어명 있으면 해결할수 있는
자잘한 수준의 그런 다툼정도가 가끔 있을 뿐이었다.
이는 이들에게 인정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과 그 가족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주변인들에게도 그닥 관심이 없어 이미 대화가 단절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평소 왕래마저 없는 이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표면적인 평화라고 부를수 있었다.
아무리 국가가 혼란스럽다고 하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성내에 있는 귀족들은 나름의 의지와 그 권력을 온존하기 위한 집착이 있었고
그를 지키기 위해 적에게 항복할 수는 없다는 그런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타 국가에 흡수되면 그들은 더이상 귀족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고
쌓아올린 권력은 오히려 백성들로부터 배척되는 그들의 원망을 살 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달랐다. 당장 손안의 은화에 눈앞에 금화에 목숨을 팔 수 있었고
식량하나에 피튀기며 싸우는 이들이었다.
평화마저도 고기 한 덩이, 곡물 한 포대에 이루어질수 있고
그 또한 다시 몇장의 비단에 파훼될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미 국가란 명분에 불과했고
애국심이라는것은 나날이 징수된 세금과 함께 그들의 손을 떠나갔다.
나라가 바뀌고 국정이 혼란해도 당장 입에 풀칠할 수 있다면 이들은 만족한다.
그를 위해 자식마저도 성녀로 팔아넘긴 자들이다.
물론 안전을 보장했었고 이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종의 여행이나 연수정도로 여겼으리라. 그러나 국가는 그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순찰보다는 오히려 국정을 보살피고 왕과 성을 한번 더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왕은 이미 실세가 아니었다. 이 왕마저 없다면 국가는 붕괴할것이다.
그를 겨우 지탱한것이 게멘데르였다.
그렇기에 그레이스는 그에게 일종의 경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인품이나 성격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판은 인품만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국내에 공공연했으며
국가로서의 젤데리스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뿐이었다.
게멘데르를 제외하고도 귀족을 비롯한 고위관직은 다수 있었으나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아직까지 정계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별로 없었다.
게멘데르 공작을 포함해 몇 안되는 대귀족은 그들만의 연합을 별도로 조직했고
그 우두머리인 게멘데르를 필두로 카를로, 시즐디, 바토리오, 텔베드로 구성되어
이들이 군사, 경제, 외교, 정치를 맡아 나라를 조종하고 있는 이들이었으나
이런걸 국민들이 감히 알 턱이 없었다.
그레이스의 존경은 갈곳없이 헤메이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와중에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깨달은 그레이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마을을 돌아다닐때 주민들이 하나 둘 그녀를 피하는 모습에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 그레이스는 즉시 주민을 한명 불러세워 물어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지?"
주민이 흘끔거리며 자신의 뒤에선 병사들의 눈치를 보고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레이스는 그들에게 잠시 쉬다오라고 명했다.
그들은 잠시 떠들다가 술집으로 가버렸다. 선술집에 뻗어있을 것을 생각하니 나중에 고생할 것이 보였으나
그것도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주민의 이야기를 듣기로했다.
"이제 말씀해 보시죠."
"그..기사님의 발밑 말입니다.."
"발?"
갑옷 속의 발까지 확인할수는 없었으나 그의 말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껏 걸어온 길에 자신의 발자국이 남은곳에 붉게 물들어 오른 피가 찍혀있었다.
마치 땅에서 피어오른 꽃처럼 고여 있는 피를 보고 누구보다 당황한것은 그레이스였으나
그녀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대답했다.
"아, 아무래도 상처가 벌어진 모양입니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처에 가까운 병원이
어디에 있나요?"
"저쪽입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발에서 최대한 피가 새나오지 않게끔 조심하며 병원으로 걸어갔다.
피가 새어나온다는것을 인지하자마자 불쾌하고 축축한 감각이 발끝에서 계속 느껴졌다.
"이건 마치..으.."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수술실로 실렸다.
갑옷을 벗기고 그녀의 더블렛을 풀어냈다. 등부분부터 이미 붉게 물들어서
다리밑까지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의사의 물음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성기사다 보니 교전중의 상처 한 둘은 있는 법이죠.
뒤에서 기습당한 흔적이 터진것 중 하나일겁니다."
그레이스가 설명을 하자마자 곧바로 의사는 수혈팩을 찾았다.
피를 채우기 위함이었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는 침착했고
또한 동요없는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감탄하며
의사는 혈액형에 맞는 피를 꺼냈다.
"그럼 일단 어디가 어떻게 다친건지부터 확인해주실수 있겠습니까."
"아, 네. 그러죠."
의사가 그녀의 가슴을 묶은 천을 풀어냈다.
그녀의 등은 아무런 상처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피는 흐르고 있었기에 당황하면서도 의사는 등을 닦아냈다.
피범벅이 된 등을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혹여나 상처가 있을까 확인했으나
그레이스의 반응역시 미적지근했고 어디서도 상처는 없었다.
의사는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저, 상처가 보이질 않습니다만. 이게 대체.."
그녀가 듣기에도 너무나도 예상외의 질문이었기에
그녀는 순간 의사가 자신을 놀리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으나
곧 그의 표정이 진심이었음을 느꼈다.
"등에 파이거나 크게 찍혀서 찢긴 자국같은게 남아있을 텐데요?"
"아뇨, 그런건. 오히려 이정도 출혈이 있는데
아무런 상처가 없다는건 의사로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분명 상처가 남아있을 터였다.
신성력을 사용해 치료한 것이었음에도 남아있던 흔적이 보이지 않을리 없었다.
뜬금없이 피가 난다고 하면 당연히 그 상처일 것이라 생각한
그레이스의 예상이 깔끔하게 빗나가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그 등의 상처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더욱.
아직도 종종 비가오거나 팔을 움직일 때 등이 쓰린 그녀였기에 절대로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녀의 등은 피로 얼룩진것을 제외하면 깨끗한 축이었고
출혈로 인한 빈혈이나 현기증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결국 그녀는 수혈을 포기하고 씻기로 했다.
의사가 간단한 영양을 공급하기 위하여 약같은 것들을 주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치료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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