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 명령
* * *
병원 샤워실에서 홀로 물을 맞으며 이 상황의 원인은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브리아나 그레이스였다.
정말 그 아이가 성녀였던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그녀는 몸을 닦고 나왔다.
이미 그녀의 갑옷을 비롯한 옷가지는 피로 축축히 젖어있었고
그녀는 환자복을 빌려입고 그 위에 물로 대충 씻어낸 더블렛과 갑옷을 맞춰입었다.
하지만 여전히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은 성기사라고 생각하기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그래도 피는 멎으신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의사선생님."
그녀는 순찰을 포기했고 술집에 있던 병사들에게 남은 순찰업무를 맡기고는
기사단장에게 복귀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기사단장 윌펫은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푹 젖은 모습과 더불어 의사의 믿지못할 소견서에
그녀를 업무에서 제외하고 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레이스. 쉬는건 알겠어.
그렇지만 오늘의 너는 성기사단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했고
이는 너에게 있어 부끄러움이라는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군. 가보라구."
"네."
그녀는 그 길로 곧장 브리아나의 학교로 찾아갔다.
브리아나는 예상대로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었고
그녀와 마주치자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안겼다.
그녀의 품에 안긴 브리아나를 보고 그레이스는 한편으로는 만족감을 느꼈다.
귀가한 둘은 같이 욕실에 들어갔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는 일말의 압박이 스스로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레이스는 브리아나의 옷을 벗겨주다가 다시금 놀랐다.
그녀의 전신에 퍼져있던 채찍의 상처와
브리아나의 가슴윗부분에 찍혀있던 노예의 낙인이 사라져있었던 것이다.
여차하면 직접이라도 새로운 문양을 덧씌워주려고 했었던 낙인이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심한 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사라져 이제는 깨끗할 뿐이다.
그레이스는 놀랐으나 그녀에게 말해준다거나 묻고싶다는 생각은 없다.
또 다른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느껴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레이스는 악몽을 꾸었다.
브리아나가 자신의 앞에서 발끝부터 머리카락 한 올까지 천천히 타오르며
고통스럽게 사라지는 그런 모습에 무력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며
땅바닥을 쥐어뜯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분노해 울고있는 꿈.
꿈에서 깨어나자 그녀는 물을 마시러 주방에 갔고 한잔의 물로 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자랑이었던 금발 머리가 하얗게 샌 것을 발견했다.
"머리가 왜.."
이해할 수 없는 일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뒤로
어느새 깨어 자신의 등을 안아주고 있는 아이.
그 아이에게 기대어 잠시 쉬며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시간이 늦은 새벽에 창밖으로 바람소리가 들려 브리아나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그녀에게 키스를 한 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레이스는 또 한번 같은 꿈을 꿨지만 더이상 울부짖지 않았다.
꿈속의 그녀와 함께 꼭 끌어안은 채로 함께 사라지는 꿈이었다.
아침이 올때까지 그레이스는 그녀를 껴안고 잠을 청했다.
브리아나가 성녀임을 확신하면서.
아침에 눈을뜨고 난 이후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한 그녀는
브리아나를 다시 학교로 보내고 성기사 그레이스로서 왕성에 집결했다.
옥좌에는 더이상 페르데이왕이 앉아있지 않았고
게멘데르가 그 앞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옥좌의 홀 옆에서 걸어나온 카를로 대신이
성기사를 진두지휘중인 윌펫을 따로 불러
명령을 명분으로 그를 데리고 갔고
남은 성기사단은 병사들과 함께 국방수비경계지역으로의 파견을 명 받았다.
이에 그레이스는 젤데리스 최 북부의 콜 지방까지 가서
그곳에서 명령이 있을때까지 주둔하며 지역을 수호해야 하는것이다.
성기사단으로서 명령은 절대적이나 수호기사로서 홀로 선 그녀의 뒤를
또다른 그레이스가 된 소녀가 조용히 지키고 있었기에
그녀는 대답을 하면서도 찜찜함을 떨칠수가 없었다.
게멘데르공작의 주도로 성기사단은 각지로 파견되었고 준비기간을 하루 가지게 되었다.
다르말록에게 기도하는 이들로 교회는 붐비고 있었지만 그곳에 그레이스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브리아나를 집으로 데려와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언니는 이번에 저 멀리 경비를 위해 다녀와야해.
분명 내가 아니라도 도와주실 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내가 없어도 잘 할수 있겠니?"
브리아나는 말없이 도리질을 하고서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브리아나를 홀로 두기를 원하지 않았고
기사단장 윌펫을 찾아가 경비지역의 재고를 요청했으나
그 의견은 고려될 가치조차 없다며 기각되었고
그레이스는 카를로 대신을 직접 찾아가기에 이른다.
왕성 전용 집무실의 카를로 대신의 방을 노크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가 발을 돌리려는 찰나, 문 안쪽에서 들리는 작은 부스럭 소리에
그레이스는 그가 모종의 이유로 부재를 연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방 문앞에 부자연스러운 두명의 병사가 전투태세를 갖춘채
양쪽에서 문을 경비중이었기 때문이다.
"카를로 대신께서는 지금 계시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와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아니, 지금 들어가서 전할 물건만 놓고 갈게."
"저희에게 맡기시면 오셨을때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귀한것이라 직접 전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럼 다녀가셨다고 전해드리지요."
"그냥 이 앞을 비키는건 어떨까 싶은데."
"고위 공작의 개인 집무실에 사적으로 들어간다니 성기사라도 그건 무리입니다."
"그럼 명령으로 하지. 나와. 분명 너희의 통제권은 성기사단에게도 있을텐데.
이쪽은 왕이 인정한 특수권이야.
그리고 분명히 각 성기사는 귀족을 비롯한 백성 및 왕성의 보호의 권한을 가지며,
각 개인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인지한 경우,
혹은 이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이를 위해
임의로 왕실에 대한 제한을 두지만 귀족의 집무실에 출입이 가능해."
"고작 성기사 주제에 지금 누구의 집무실 앞에서..!"
"너희, 국군 소속 병사가 아니구나."
일반 병사의 전신 갑옷을 입은 것으로 군의 병사라고 생각한 것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레이스는 상대가 일반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 안쪽에서 카를로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음을 이해했다.
"카를로 대신! 듣고 있습니까!
사병으로 경비를 세우고 성기사단의 통제권을 가진 왕에게 보고없이
독단으로 기사단장 윌펫을 비롯한 3개 부대를 상부의 명령없이 움직이며,
왕의 부재에 왕명 특수권을 무시한 당신을 반역으로 간주하고
즉결처분권을 행사해도 좋습니까?"
그러자 철옹성 같은 문이 열리고 카를로 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왕하 성기사 1호. 그래. 반갑네.
이렇게 어리석고 예의없는 사람인줄 미처 몰랐네.
누가 들어도 건방지다고 생각될수 있을 언행을 함부로 하고있군그래.
듣자하니 못들어주겠어.
왕이 없는 지금 페르데이왕은 전권을 총리대신 게멘데르 공작님께 위임했고
나는 그 게멘데르 공작님께 명받은 대로 성기사단에게 국경수비를 명했다.
또한, 사병은 지금같은 시대에는 꼭 필요한 것이지.
모든 국내 병사는 현재 게멘데르공작과 너희 성기사단이 쥐고 흔들수 있으니
개인 경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병이야.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법도 어느정도 손 봐둔지 오래되었다는게야.
이건 반역이 아니란걸세.
오히려, 지금 자네의 태도가 반역이 아닌가?
성기사단은 군부대보다 위에 있다고 설마 하극상마저도 허락되는 건가?
설마 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이라도 하는건 아니겠지.
나를 열받게 하는데는 성공했어.
뭘 굳이 전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들어오게.
자네의 목적은 그거겠지?"
"감사합니다."
카를로는 서랍에서 시가를 꺼내 불을 붙여 물었다.
그러고는 집무책상의 회전의자에 걸터앉고
빙글 돌아 그레이스를 바라본뒤 깊게 숨을 뱉었다.
"그래. 하고싶은말이 뭐지?"
"성기사단의 국경수비를 재검토해 주십시오.
이제껏 아무 문제 없던 곳에 불필요한 인력낭비가 아닙니까?"
"게멘데르 공작님의 지시다.
지금의 국가는 혼란 그 자체라고 말할수 있는 수준이다.
언제 누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지.
단, 나는 자네가 무슨 의도로 그런 제의를 하는지 궁금한거야 성기사단원 제니퍼 그레이스양."
"그러니까...그..기존의 순찰과...수도의 경비를...강화하는 것이...."
그레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앞에 둔 것은 왕이 아니라 모종의 계략을 꾸미려 든 사내이며
이미 국가의 주축이 되어버린 군사 통제권을 가진 자였다.
현재 젤데리스는 국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열이 심각한 문제이며,
오히려 내부의 귀족들이 진정한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권의 추락이 낳은 일부 귀족의 폭정이 국가를 좀먹는 상태였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몰아내야 할 대상이라고 하면 눈 앞의 카를로 대신이었고
단신인 자신과 다르게 문 앞에 대기중인 사병은 둘이나 되었고
그들을 배제하고서라도 어느새 문 밖에 발소리가 쌓여가는 것을 깨달았다.
"순찰과 국방경비중 어디가 중하다고 생각하나?
국가 경계선을 수호하고 경비를 강화하는것이
결국 수도의 안보와 이어진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텐데.
자네는 지금 굉장히 무례하고 근본없는 이야기를 하고있어.
분명, 그래. 그 노예년 때문이겠군.
나는 성기사단에게 국방을 수비하라고 지시했지,
내 집무실에 이유없이 찾아와 고집을 피우라고 한 적이 없어.
돌아가게. 지금 돌아간다면 여기까지 해 두지."
"질문이 있습니다."
"감히, 아직도? 자네가? 흠, 그래. 말해보게나. 들어보기나 하지."
"브리아나를, 그 노예소녀를 데리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다. 어차피 어디서 죽어버려도 상관없을 아이였으니까 말이지."
"감사합니다."
그레이스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문앞을 지키던 경비병이 그녀를 흘끔 노려보고선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그런 그에게 굳이 대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않아 무시했다.
카를로 공작의 말은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더 기분이 나빴다.
모든것이 맞는 말이었지만 그중에 어딘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불안한 예감에 말을 아꼈다.
지금도 복도 귀퉁이마다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으므로
조용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나서 조용히 눈을 뜬 후에
더는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요한 일을 작당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는 브리아나를 데리고 하루간의 휴가를 취했다.
브리아나를 지켜줄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뻐 웃으며 그레이스는 웃으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 밤, 온몸이 묶인채 전라로 수도중앙 광장 한가운데,
대중이 보는 앞에서 갈갈이 찢겨 버려져 개의 먹이가 되는 꿈을 꾸었다.
몇번이고 반복되는 고통에 몇백명의 그레이스가 죽어갔고
또한 브리아나가 울다 지쳐 쓰러져 말라가는 모습을 돌아보다
피눈물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그레이스의 옆에서는 브리아나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울먹이고 있었고
그레이스 자신또한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옅은 열이 있는것 같았으나 굳이 의식하거나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명받은 북부 국경선, 콜로 향했다. 군마의 고삐를 쥐면서도
그녀는 이미 성기사나 국방의 수호보다 한 아이의 안전을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휘하의 병사들에게 브리아나의 신변을 부탁하며 짐칸에나마 공간을 작게 만들고
거기에 그녀를 태웠다.
병사들에게 브리아나의 안전에 대한 당부와 기도를 하고
성호를 여러번 그은 뒤 콜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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