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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94화 (294/303)

〈 294화 〉 출진

* * *

콜로 떠나기 하루 전, 그레이스가 악몽을 꾸던 날.

그레이스에게 그 하루는 상당히도 바빴다.

북부지방은 춥다고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레이스는 걱정이 앞서 아밍더블렛 밑에 솜을 더 받쳐 넣었다.

갑옷이 얼어붙을까 걱정하며 미리 기름칠도 새로 했다.

얼지않도록 부동액을 바르며 브리아나에게는 새 털옷을 사 입혀주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 그레이스는 털옷을 입은 기억 자체가 없었으므로

어느정도가 적당할지 몰랐고 이는 두꺼운 외투를 껴입은 브리아나가 뒤뚱뒤뚱 걷는 결과를 유발했다.

당연히 그레이스도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브리아나에게 이런 저런 옷가지를 입히고서는

만족할때까지 그녀에게 맞는 옷을 입히기 위해 노력했던

그레이스의 마음은 확실히 브리아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당일, 그레이스는 유분기가 있는 크림을 브리아나에게 발라주고

그녀를 병사들에게 맡겼다.

무사히 콜 까지 와 주기를 바라면서 말에 올라 선두에서 병사단과 그 수레를 지켰다.

길게 늘어선 병렬과 군수물자를 실은 수레는 그녀의 뒤를 길게 따랐고

그 수는 국경경비의 명목으로 파견된 군인이라기에는

어딘가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카를로 공작의 추진으로 별 이의없이 진행된 회의의 결과였다.

따각거리는 길을 지나 수도 바라하를 지나며 넓은 평야 사이로 드러난 길 끝에는 숲이 있었고

종종 짐승을 비롯한 마물의 아종이 나오곤 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왕성이나 바라하에 습격한 일은 없었으나

바라하 외곽의 주민이나 통행객을 습격해

재산상으로나 인명의 피해를 입히는 일은 잦았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공포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배척하기 위해 왕이 세운 다르말록의 가호라는 이름의 방어벽을 이유로

그들의 구역이 나뉘어진 이후로 대륙의 길게 이어진 숲과

수도 바라하 서부지역의 바다를 나누는 군사지역 또한 생기게 되었고

사실상 교전이 거의 없는 그 지역은

병사들이나 장군들이 말년에 휴가차원에서 부임되는 지역이 되기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어째서인지 콜로 향하는 경로가 젤데리스 숲을 지나게 된 것이다.

안전한 장소를 두고 어째서 그런 루트를 택했느냐는 항의도 다소 있었으나

한마디의 게멘데르 공작의 승인이라는 압도적인 권력의 앞에서는

그들 모두가 의문을 뒤로하고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숲을 앞에 두고 긴장하고 있는 그레이스의 어깨를 툭 치며

긴장을 풀라고 조언한 것은 같은 성기사인 베스였다.

"아, 베스. 고마워. 별건 아냐. 그냥 조금 떨려서."

"평소같으면 등뒤의 메이스부터 휘둘렀을 녀석이

우두커니 서서 손가락만 빨고 서있으니 내 어이가 없어서 그런거야.

정신차리고 진입해."

"평소에는 동료들이 있어서 긴장을 덜 했던것 같아.

선발로 우리가 둘이서 병대 하나를 이끌고 가는 지금은 윌펫씨도 안계시고.

내가 직접 선두에서 지휘한 경험이라곤 구역순찰정도니까."

"평화로운게 좋은건데 말이지.

그렇다고 이제와서 이 군대를 돌리자고 하기에도 늦었다고.

겁먹을것 없어.

국경수호전도 몇번이나 해봤잖아. 등에 몽댕이도 맞아가면서.

안그래? 괜히 여기서 회군했다가는 반역이 되기도 할테고.

내가 먼저 들어갈게. 너는 저 겁먹은 병사들을 추스려서 통솔해와."

그러고는 그레이스로부터 랜턴을 받아든 베스는 말 고삐옆으로 랜턴을 걸어달고

불굴마법을 걸어 자신의 흥분한 말을 진정시켰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나아가며 베스가 말했다.

"하여튼 제대로 된 놈들이 하나도 없잖아. 오늘따라 단체로 맛이라도 간거야?"

갑옷을 슬쩍 들여다보다 그레이스는 후방전열을 돌아보고 외쳤다.

"방패병 산개해서 병사및 물자를 엄호한다!

지금부터 언제든 전투태세에 임할수 있도록!"

"방패병 산개하고 전투태세로!"

병사들의 되돌아오는 고함소리와 함께 대열은 숲으로 진입했다.

군대의 행렬은 조용한 군화소리.

그리고 갑옷과 방패가 부딫히는 소리뿐이었다.

그들이 나아가는 숲은 흔한 지도 하나조차 없는 숲이었다.

대삼림이 우거졌다던가 하는 그런건 아니었지만

길을 잃어버리기는 쉬운 지역이어서

곧장 직진으로 나아가며 나뭇가지를 비롯한 각종 걸림돌이나 방해물을 잘라내며

돌을 부숴 길을 만들었다.

긴 군행렬이 지나가면 이미 다져진 길로 변모되는것은 시간문제였다.

"성기사님들, 그 콜 지방까지는 얼마나 걸리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병사대장이 말을 붙이려고 하는 것을 그레이스는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한 4일정도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그동안 병사들과 물자를 무사히 잘 지킬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습니까. 4일이라. 그것은 분명 젤데리스 숲을 상정한 것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숲은 어느정도 시간을 소요할 것으로 보고 계십니까?"

"아무래도 위험요소가 있는것도 사실이고 워낙에 지형이 험하고 복잡하기에

해가 지고나면 이동에 무리가 있을것으로 보이네요.

예상으로는 3일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어느정도까지 해주시느냐에 달렸다고 봐도 무방할것 같습니다."

"장난하는거야 그레이스? 우리는 소풍가는게 아냐.

국경수비를 위해 그 추운 콜 까지 가는거라고.

적들이 우리를 기다려줄것 같아? 한시가 급하다고.

어차피 길은 뚫으면서 가고있어.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헤멜일도 없는 상황에서 해가 지면 쉰다고? 우리는 직진한다."

"하지만 베스, 우리 병사들이 안전히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잖아."

불편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은 베스는

한숨을 쉬고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그래, 그럼 네가 나머지를 다 통솔하고 지휘하던가. 나는 그렇게 느긋하게는 못가.

병사는 어차피 전쟁중에 소모되게 되어있어.

저 사람들중 누구도 휴가가는 기분으로 우릴 따라나선게 아니라고.

죽으러 나온 병사들이 언제 죽느냐는 다 지휘관에게 달린거고

너는 콜 지방의 북부경비를 위해 저들을 사지로 내몰은 사람이야.

이제와서 무슨소릴하는지 알기나 하니?"

"그래도 저 사람들도 가족이 있을텐데

너무 그렇게 말을 심하게 하는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다 기다리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나온거야."

"그래, 너는 그럼 저 병사들을 살려서 집으로 돌려보내주면 되는거야.

그때까지는 너의 명령이 저들의 모든걸 결정한다고. 알아?

이미 저들은 편안한 집과 가정을 두고 따라나왔어.

이제와서 잠을 조금 줄인다고 해서 저들이 불편하다고 너에게 항의하지 않아.

물론 여기서 쉰다고 저들이 너에게 감사하지도 않을거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차마 모른다고 대답할 수 없었고

손에 든 말고삐를 당장이라도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싫었다.

성기사를 맡으면서 지금껏 한번도 그만두고 싶다거나 불만을 가진 일은 없었다.

은혜로운 일이었고

누구보다 백성을 지킬수 있는 고결한 직업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므로.

그 위치를 즐기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빨리 도착해서 쉬는 편이

자신에게도 병사들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나

그것보다도 뭔가 그 이야기를 인정하고 싶지않았다.

가끔은 효율과 정론보다도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다.

"그래, 결국 지휘관은 나지?

그럼 내가 전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저사람들은 안전하게 늦더라도 쉬어간다."

그레이스의 성격이 좋아서 성기사와 잘 맞았느냐고 하면 그것도 틀린말은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출신이 어떻던 직업이 어떻던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고

그를 위해 방해요소를 적극적으로 배제할수 있는 결단력 또한 있었으나

그건 역시 지켜야 할 대상에 한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상냥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자신만은 지켜주리라 믿고있었고

그러기를 바랐다. 그레이스는 그 눈빛을 뿌리칠수가 없었다.

병사들 하나하나에 개인적인 관심은 없었으나

그들이 자신의 휘하로 들어와 통솔해야 하는 이상

그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말없이 애꿎은 말을 재촉했다.

침묵속에 행군은 계속되었고 하늘이 어두워지게 되었다.

늦은 저녁이 되어가고 있는 숲은 스산했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 말을 보고 당황하며

진정시키려다 숲길 가운데서 자신과 병대를 바라보는 해골을 발견했다.

"어..?"

표정없는 해골이었지만 분명히 당황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스켈레톤이라는 괴물에 대해 듣기는 들었으나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해골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본 그레이스는

놀라 등뒤에서 메이스를 뽑아들고 전투태세인 병사를 뒤로 대기시켰다.

그리고 임전상태가 되자마자 베스가 메이스를 들고 해골을 향해 걸어가더니 몸통을 후려쳤다.

해골의 머리가 툭 떨어지더니 데굴데굴 굴러서 그레이스의 발치로 다가왔다.

당황한 그레이스는 놀라 뒤로 주춤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에 당황했다.

자신과는 다른 태연함을 보이는 베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무언의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메이스를 들어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위협은 배제하고 싶었다.

"미안합니다만 성기사는 언데드편이 아닙니다."

억울하다는듯 해골은 푹 턱을 뚜둑거리며 움직이더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베스가 때려 부순 몸체가 달그락대며 모여들더니 머리를 주워 조립하곤 반대방향으로 도망치듯 가버렸다.

스켈레톤이 어디론가 가버리자 긴장이 풀린 선두대는 전투태세를 풀고 주저앉아버렸다.

"뭐였지 방금 그건."

"스켈레톤인것 같은데. 왜 싸우려들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우리로선 다행이지.

성기사의 메이스를 두번이나 맞고도 재생되는 지능적인 스켈레톤이라니.

일반적인 수준은 아닐거야 분명."

"예감이 안좋은데"

"이런 상황에서 콜까지 쉬지않고 가는건 무리야. 오늘은 이 주변에서 야영하자."

베스를 설득한 이들은 군 막사를 치고 숲 가운데 공터를 만들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브리아나를 찾아가고 싶은 그레이스였으나

후방부대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다.

별수없이 배급된 식량을 가지고 포타주를 끓여 저녁을 떼우고 막사에서 쉬었다.

병사들이 각 분대별로 나누어 포타주를 끓이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외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습격입니다! 테러보어떼입니다!"

"테러보어?"

그레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에서 메이스를 뽑아들고 병사들을 향해 지시했다.

"침착하게 보어를 막아내라! 방어를 위주로 하고 군수품과 물자를 보호해!"

테러보어는 야생 멧돼지들이 변종 정령을 먹고 저주받은 것으로,

실상은 미쳐버린 돌연변이 멧돼지와 별반 다를것은 없으나

그 크기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멧돼지보다 위협적이고 파괴력이 있었다.

그래서 테러보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포타주를 끓인 고소한 냄새가 숲에 퍼지면서 냄새를 맡은 보어들이 찾아온 것이다.

테러보어는 막사를 짓밟고 병사들을 들이받으며 난동을 부렸고

군수품의 식량을 먹어치웠다.

선발부대의 성기사 두명으로는 이 돼지들을 모두 막는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베스와 그레이스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도망칠 수가 없었다.

거대한 테러보어 한마리가 그들을 향해 콧김을 내뿜으며 걸어오고 있었고

그레이스는 병사들을 침착하게 하나씩 뒤로 후퇴시켰다.

메이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를 모아 한번에 후려치겠다는 생각으로

보어를 노려보고 서있자니 덜컥 겁이 났다.

두려움은 빠르게 전염된다. 그녀는 억지로 표정을 구겼다.

설령 피를 흘리더라도 눈물을 흘려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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