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95화 (295/303)

〈 295화 〉 배제

* * *

눈앞의 괴물은 생각하던 것보다 더 거대했고

수도에서는 이런괴물을 상대해 본 적이 없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자신에게 달려온 테러보어를 보자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메이스는

그 거대한 괴물의 머리 오른쪽을 가격했고 묵직한 진동이 그녀의 손에서 울렸다.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고꾸라지기까지

철갑옷을 입은 그녀의 손은 묵직하게 울린 진동에

힘을 주고 무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손끝에 들린 메이스의 철구는 조금 찌그러져 휘어있었고

그 끝에 피와 보어의 침이 어지럽게 묻어있었다.

역한 상태가 된 메이스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돼지는 다시 일어섰고

그러는 중에도 병사들은 계속해서 돼지들에게 죽어나갔다.

베스는 이미 그레이스를 뒤로하고 다른 보어를 막기에 급급했고

그레이스는 일어나며 발버둥친 돼지에게 걷어차여 뒤로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육중한 보어에게 밟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갑옷채로 찌그러져 뼈가 부러질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일어선 그녀에게

푸르륵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괴물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은것처럼 보여

그녀는 계획을 바꿨다.

달려나가 돼지의 눈을 찍어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달려나간 그녀에게 부딫힌 돼지는 그대로 그녀를 밀어내며 돌진을 시작했고

그녀는 그 순간에 그 테러보어의 눈을 찔렀다.

돼지가 찐득한 점도높은 침을 쏟아내며 포효했고

그녀는 머리카락에 질척하게 늘어붙은 침을 한손으로 닦아내고

그 머리를 다시 내려쳤다.

크게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떨쳐내려고 발악하는 돼지는 그야말로 소름돋는 모습이었다.

떨쳐지면서 바닥에서 흙을 주워든 그녀는 돼지의 눈에 그걸 뿌렸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돼지는 균형을 잃고 군부대 막사를 마구 들이박아대며 날뛰었다.

닥치는대로 밟혀나가는 병사들의 시체가 터져나갈쯤

그레이스는 보어를 추격해 그 머리를 직격으로 다시내리쳤다.

잠시 기우뚱하던 돼지는 걸음을 멈추고 피로 번져 떡진 눈으로

그레이스를 돌아보며 발악했지만

그레이스는 말없이 그 보어의 머리를 몇번이고 내리쳤다.

그 무거운 움직임이 멈추고 그레이스의 다리에 힘이 빠졌다.

손에들어간 힘은 천천히 빠지고 등에서 땀이나고 있었다.

차가운 북부의 공기임에도 덥다고 느꼈다.

테러보어는 천천히 그레이스를 향해 걸어오는가 싶더니

곧 걸음을 멈추고 무거움 몸을 바닥에 쿵 소리가 나게 부딫히며 쓰러졌다.

아마 뇌진탕일 것이라고 생각한 그레이스는

침착하게 검으로 테러보어의 두꺼운 가죽을 찢고 목을 갈랐다.

칼이 목을 자르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본보기로 죽인 테러보어의 목을 잘라내고나서

또 다른 테러보어에게 습격당하는 베스를 향해 달렸고

테러보어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곧 피냄새와 죽은보어의 냄새를 맡은 겁먹은 테러보어들이

행동력을 잃고 우왕좌왕 하더니 달아나버렸으나

이미 군과 성기사단의 피해는 막심했다.

그레이스는 곧바로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렬시킨 병사들의 일부가 비어있었다.

갑작스런 습격으로 잡아먹힌 이들과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이들.

그 사이에서 두려움에 질린 브리아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식량은 전투중에 못쓰게 된 것이 절반가량이었고,

타고온 말이 죽어버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병사도 있었다.

"잘했네, 제니퍼 그레이스 지휘관. 살려보내겠다더니."

"내..선택이...틀렸어."

"그래. 완전히. 쉬더라도 우린 이 숲을 빠져나간 이후에

제대로 된 캠프를 쳤어야 했다고. 총원 400중에 72명이 부상이야.

11명은 사라졌고. 16명은, 너도 보이지? 저기 널브러진거.

숨이나 쉬는지 확인해볼 필요도 없어. 이미 목 위에 머리가 없잖아.

넌 쉬고있으라고. 내가 지휘하지.

우선 식량을 재분배하고 간단히 먹을만한 빵과 육포를 배포해."

베스가 지시하고 부대는 빠르게 정렬했다.

그레이스에게 말은 하지 않았으나 부대의 모두가

이 피해의 책임은 모두 그녀에게 있다는 듯한 그런 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죽은 테러보어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베스의 설득으로

이들은 테러보어를 묻어주고 나서 남은 포타주와 육포로 따뜻하게 속을 풀고

교대로 전투태세를 정비한 뒤 산양 뿔로만든 나팔을 배부했다.

그녀는 기사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금 휘청이더라도 이들이 자신을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이상과는 다른 현실에 그레이스는 말 없이 메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전원 태세 정렬 후 진군하겠습니다.

방금같은 사태가 없도록 미리 전투를 대비하고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베스가 메이스를 손에 쥐고 기도를 드리고 나서 다시 군은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젤데리스 왕국은 소국이었으므로 병과또한 보병과 기병 그리고 궁병 뿐이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마도병이나 공성전을 전문하는 공성병은 고사하고

그 흔한 머스킷병 조차 없었으며, 팔라딘조차 왕하 직속으로 둬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머스킷병을 유지하려면 탄과 화약이 필수적인데,

이미 잦은 전쟁으로 젤데리스는 이를 유지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팔라딘 역시 이미 수 대 전에 맥이 끊어져 겨우 일부만이 이어지는 형태였기 때문에

신성력이 있는 팔라딘, 성기사단은 귀한 병력이었다.

그랬기에 성녀가 더욱 절실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홀리 인챈트."

자신의 무기에 신성력을 부여하고 은은한 빛으로 반짝이는 메이스를

이리저리 붕붕 돌리는 베스는 어느새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진 듯 했다.

다만 어딘가 불편한 듯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그레이스는 왜인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베스는 원래 누구보다도 시민의 안전과 평안을 중시하던 여자였다.

지난 전쟁에서 간신히 승전하고 돌아온 집이 풍비박산이 나 있고

가족들이 모두 그 밑에 깔려 싸늘하게 누워있었다고 했다.

전장에서 수백 수천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정작 그 가족 하나 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지

이후로 사람이 완전히 변해버렸던 것이었다.

믿고 뒤를 맡긴 병사는 정작 위험한 상황에 백성을 등지고 도망쳐버렸고

적의 창에 목숨을 잃은 부모님과 언니를 보면 이성을 유지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두를 구한다는 이상론보다는 가혹한 현실론을 제시하며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효율적인 방식이긴 했다.

그래서인지 그레이스에게 화를 내면서도 베스는 꾸준히 브리아나를 확인하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기억해 그레이스. 이상론은 보기엔 아름답지만 결국 이상론인 이유가 있는거야.

이룰수 없는 희망은 실패로 이어지는 도전을 부른다는걸 알아둬."

"이룰수 없다고 단정짓는게 실패의 시작일거야."

"한결같아서 부럽지만 닮고 싶진 않아. 세 번씩이나 뒤통수를 얻어맞기는 사절이라고.

물론, 두 번까지는 실패했지뭐야.

결국 돌려받지 못하는 기대와 희망은 누가 보상해주는건데?

그런건 희망이 아냐. 희망으로 위장한 절망이지."

그레이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 출발해."

그레이스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우선 숲을 지난 후에 근처 마을에서 식량이나 말을 재정비하고

계속 나아가야 할 것 같다는 베스의 말에 반대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이미 결과가 보였기 때문이다.

숲은 고요했고 오직 병사들이 든 횃불만이 숲을 비추고 있었다.

이따금씩 산짐승이 나타나긴 했으나 테러보어를 경험한 병사들은

한두마리의 각개로 움직이는 산짐승을 어렵잖게 잡아냈다.

그렇게 얼마 지나서 숲 길 사이로 도랑이 흐르는 곳에서 베스는 멈춰섰다.

"도랑이야."

"도랑이 어쨌는데?"

"도랑은 문제가 아냐. 우리 뒤에 따라오는 병사들이 문제지."

"병사?"

"테러보어와의 접전으로 저들중 일부는 말을 잃었어.

물론 식량과 물도 다수 손실된 상태고.

탈 것이 없는 상태로 걸어온 사람들은 이 물이 절실하겠지."

"그렇겠지."

"한명이라도 기강이 흐트러져 여기서 쉬고싶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나태는 순식간에 전염된다."

"그러면 어서 지나가야지 멈춰선 이유는 뭐야?"

"이 도랑물, 생각보다 깊고 넓어.

군마가 지나가기에 어렵진 않지만 이 뒤에 짐수레와 마차는 지나갈 수 없어."

듣고보니 도랑은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짐수레에는 식량과 침낭을 비롯한 생필품이, 마차에는 옷가지와 브리아나가 있었다.

옷가지와 침낭이 여기서 젖어버리면 물을 먹은만큼 무거워 질 것이고

마를 때 까지 사용도 어려워질 것이며,

물을 건넌 이후 행군행렬 뒤로 물을 질질 흘리며 축축한 행군을 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차와 짐수레를 옮기는 것 부터가 난관이었다.

"돌아가야겠다. 그레이스. 콜로 가는 지도를 줘."

"그래."

지도를 받아든 베스는 턱을 몇번 만지더니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우측으로 300M 정도 돌아가면 길이 나오는데, 별 수 없네. 거기로 가자고."

군대는 방향을 돌려 나아갔다.

최 전방에서 나무를 쿠크리로 잘라내는 베스는

나뭇가지나 흙이 이슬에 젖어 튀는 것을 맞으며 나아갔다.

성기사단의 흰 갑옷이 나무조각과 흙으로 더러워지고 있었다.

"그레이스."

"응?"

문득 말을 걸어오는 베스에게 그레이스는 흠칫 놀랐다.

"너는 역시 성기사단에는 어울리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성기사단에 제일 어울리는 건 너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지금 젤데리스엔 그런 성기사는 없어.

너처럼 순수하게 모두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진 녀석은 이미 떠나버렸다고.

윌펫 그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기사단장님 말이야?"

"이번 일로 마지막이라고, 우리를 그냥 콜에 박아놓을거라더라.

게멘데르에게 돈을 받았어. 사실상 평생 놀고먹을 돈이지.

그 남자는 성기사단 전체를 팔아버린거야. 이야기는 들었어.

너 카를로 대신에게 따지러갔다며?"

"아... 이야기가 퍼졌구나,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단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브리아나 때문이지?"

"어..."

"그것 봐. 너는 역시 이 일에 어울리지 않아.

이번 경비가 끝나면 성기사를 그만두도록 해."

"그렇지만, 나는 이 일 말고 할 줄 아는 일이 없어."

"하게 될거야. 이미 너는 혼자가 아니잖아."

조금 지친 얼굴로 베스가 선두를 비켜섰고 그레이스가 쿠크리를 넘겨받으며 그 자리를 메웠다.

쿠크리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앞길을 막는 나뭇가지와 덩굴을 계속 잘라냈다.

"아까도 그랬지. 너는 모든 병사를 편하게 해 주려다 실패했고 큰 희생을 치렀어.

너로서는 부족한 일이야. 이제껏 순찰이나 전투말고 지휘를 해 본 적은 없잖아.

전투라고 해도 너는 당장 눈 앞의 적을 넘기는데 주력했을거고.

너는 성기사를 그만두더라도 교회에서 수녀로 일할 수 있잖아.

너의 신성력은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때 묻지 않았으니까."

"다른 기사들도 모두 그정도는 하는 거잖아."

"너 왜 내가 너랑 같이 최북부인 콜로 파병을 나왔다고 생각하는거야?

이미 성기사단의 대부분은 신성력을 다룰수 없어.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게 나 정도인 거고.

윌펫이나 모리스 같은 녀석들은 거의 1년 전부터 신성력은 커녕 세례도 받지 않았을걸."

"말도 안돼."

"녀석들은 그래서 늘 신성력을 가진 널 외부 순찰로 빼버렸지.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되니까.

너를 방해되지 않는 곳으로 보낸거야.

이런 말 하고있는 나도 신성력이 몸에 가하는 부담이 점점 커지는 것도 사실이고.

너처럼 그렇게 무기에 상시로 빛을 깃들게 할 수도 없다고. 웃긴 일이지?

성기사단인데 성스러운 힘이 없다는게."

그렇게 말하며 베스는 웃어보였다.

웃음 너머로 어딘가 쓸쓸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의 뒤로 따라오는 병사들은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번 루트에 숲이 있는 이유는 알고있...을리가 없지.

너는 착하고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니까. 이 숲은 말 그대로 함정이야.

콜은 이미 십여 년 전부터 경비가 없어.

단지 우리를 이 숲으로 발 붙이게 하려는 목적이겠지.

우리가 만약 정말 콜에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복귀명령도 없을테고

무엇보다, 이런 형편에 브리아나를 딸려보낸다는게 상식적으로 당연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최근 몇 년간 젤데리스 숲에 테러보어는 비정상적으로 증식하고 있어.

멧돼지가 변종정령을 먹고나서 뒤틀려 버린 괴물이지만

저런 괴물이 군집을 이루어서 습격할 정도로 많이 나오는게 흔치는 않아.

아무래도 돌연변이이기도 하고.

애초에 정령 자체가 오염되기가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여기는 이미 방치된 숲인거야."

"그럴리가 없어. 분명 북부 수비대를 보낸 거라고 했는데? "

"국경선에 적이 침입하는걸 막기 위해서 보내는 병사가 400명.

지킬 생각이 없는거지.

사실상 여기 모인 병사는 게멘데르 공작의 파벌이 아닌 병사들이야.

왕의 수하에 있던 병사들이지. 자기 편에 붙지 않은 사람들이니 없애버리는 거고.

아마 저 사람들도 어느정도는 수긍하고 따라온 거겠지."

"죽을걸 아는데 따라나온거라고?"

"정말 저들이 국경을 수호할 생각이었다면

네가 테러보어습격때 보인 행보를 보고 아직도 우리 뒤를 쫒고 있을리는 없지.

설마 저게 널 죽이기 위해 추격하는게 아니라면.

네 부탁대로 브리아나도 잘 돌봐주는 모양인데? 알잖아.

이미 이 젤데리스는 상관이나 부하로서의 명령이 절대인 나라가 아니라는거.

너도 수긍하고 있잖아. 바보도 아니고.

이정도로 말했는데 군을 돌리지 않은것도 그런 이유 아냐?"

그 말대로였다.

이미 재정상태가 혼란한 국가였고 왕의 눈이 없는 이런 숲에서

400명이나 되는 인원이 지휘관 한명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는 것은

단순히 상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틀린다면 그들이 성기사 둘과 어린 소녀 한 명을 묻어버리고 입을 맞추는건 일도 아니었다.

"이미 아는거야. 너나 나나 모두 왕에게서 버려진 사람들이라는걸."

그레이스는 이를 꽉 악물었다. 괜히 애먼 말고삐를 더 당기며 앞길을 재촉했다.

앞으로 계속 튀어나오는 나뭇가지를 쳐내면서 눈물도 흘렸다.

베스의 말에 너무나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미 알고있었다.

어렴풋이 그냥 그런게 아닐까 했던 이야기들이 정면에서 그레이스를 깊게 찔렀다.

괜히 쿠크리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진정해 그레이스! 칼을 휘두르는데 집중해서 경로를 이탈하잖아!"

"그럼 왜 그런거야? 왜 테러보어때 저들을 살린거고 쉼없이 콜을 향해 가고있는건데?

의미도 없는 일이잖아. 자살행위잖아?"

"내게 떨어진 명령이 그거라서....

이미 그런걸 안다고 거부하기에는 나도 썩어버렸다는거지.

진정해 그레이스. 그 쿠크리 다시 나에게 넘겨. 내가 앞장설게."

"나쁜년."

"미안해."

쿠크리를 넘겨받은 베스는 그렇게 말없이 선두에 서서 나무를 베어갔다.

가끔 거미줄이 들러붙거나 나무에서 뭐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도 무덤덤하게 지나가곤 했다.

"그게 다야?"

그레이스의 물음에 베스가 짧게 대답했다.

"뭐가."

"알고 있는건 그게 전부냐고 묻는거야. 윌펫, 카를로, 게멘데르 모두에 대해서."

"굳이 듣고 싶다면야 못해줄 것도 없지."

"그럼, 그러면... 내가 널, 너는 믿어도 되는거야?"

"믿으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뭐하네. 그냥 적당히 흘려들어.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도 덤덤한건 아니라고.

나도 버려진 입장인데 하필 옆에 배정된게 너라서 더욱이 조금은 짜증도 난단 말이지.

너처럼 순수하게 착해빠져서는 나 착한년이다 광고하는 멍청이를 보고있으면.

너무 맑아서 희망론이 모든걸 해결할거라고 믿는 그 낙관적인 면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언제 또 널 속이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뭐, 만약에 속게되면 어리석고 착해빠져서 의심할줄도 모른 널 탓하라고."

"멍청이 답게 한번 더 속아 볼테니까 아는대로 이야기해줘. 나도 들어야겠어."

"그래, 뭐 이제와서 듣는다고 달라질건 없겠지만.

페르데이 국왕은 게멘데르 공작에게 전권을 위임했지.

나도 국왕의 현 상태에 대해서 아는건 없지만

지금 국민의 신임을 얻는건 왕이 아닌 공작이야.

왕하 성기사단은 국왕직속 기사단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위가 높아서 대수롭지 않은 일에는 출동 자체가 드문 편이었으니

점차 증명하지 않아도 보장되는 지위에 나태해진거야.

그리고 공작이 정치권 및 군 집결 지휘권, 성기사단의 통제권을 확인하게 되었지.

그러다가 뭐 일이 터진거지. 윌펫이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버렸어.

원래 윌펫의 약점을 잡아 성기사단을 통제하에 둘 생각이었겠지.

그렇게 윌펫에게 감시를 붙여둔거야.

그렇게 교회에도 나가지 않고 세례도 받지 않은 채 지내는 윌펫을 불시에 습격해

신성력을 보여달라고 추궁해버렸고 덕분에 성기사단의 신임이 곤두박질쳐 버렸지.

그 이후로는 네가 아는 대로 개개인에 대한 안부인사를 핑계로

성기사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기사단의 자격을 검토한거야.

뭐 이미 한번 걸렸으니 더 숨길 것도 없었지. 너한테도 물어보지 않았어?"

"그랬던가. 뭐 최근은 브리아나랑 보내면서 바빠서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거 봐. 넌 이미..."

"이제 그만. 알아들었다고. 그래도 아직은 나도 성기사 소속이야.

그만둘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

그레이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타고있는 말의 고삐를 더 세게 쥐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