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화 〉 낙오
* * *
그레이스는 이후로 전투를 피하며 말 없이 군을 이끌었다.
더이상의 손실은 스스로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확신이 없다는 것은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밤낮이 변해가는 것도 겨우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 조각으로 알아야 했고
옆에서 묵묵히 자신이 지시하는 사항을 따라주는 베스는 이미 한참 전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이는 얼굴로 병사들을 수시로 흘끔거렸다.
한참을 나아가던 와중에도 신경써야 할 것들은 너무나 많았다.
브리아나가 잘 있는지는 수시로 확인하고 싶었고 피로를 호소하며 쉬어가고 싶다 말하는
병사들의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사주경계를 소홀히해서도 안되었고,
그 와중에 들었던 윌펫과 카를로의 흉계는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고 갑시다. 죄송합니다. 더 쉬었다간 일정에 맞추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이미 상당히 뒤쳐졌습니다. 정말...정말 무능한 지휘관을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이제는 300여 명 정도 남은 군사들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거절의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마저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레이스는 진정으로 자신의 무능을 탓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자신, 희망을 놓지 못하는 자신.
그러면서도 더 끌어안으려고 노력할게 분명한 한심한 자신.
그녀는 점차 말수가 줄어갔다.
그런 모습을 바라본 베스는 침착하게 그녀를 뒤로 물리고 앞장섰다.
베스는 능숙하게 지휘를 했고, 군을 통솔하면서 전진했다.
신성력을 불어넣은 무기로 눈 앞의 나무를 후려쳐 꺾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마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것처럼.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 광경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베스의 방식은 모든것에 신물이 나 지쳐버린 것 같았다.
최속으로 돌파하는 루트를 향했고, 안전함을 고려하지 않은 길은 점차 험난해졌다.
다행히 마물을 마주하지 않은 것은 운이 좋아서였다.
군마가 없는 병사들은 사실상 짐덩이와 마찬가지였고 계속되는 행군에 탈수로 쓰러지는 이들도 나왔다.
군마가 남은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 지친 병사들을 말 위로 걸치고 말을 끌어야 했다.
그들은 마치 정말 죽음으로부터 겨우 도망쳐나온 피난민의 모습이었고
누가 보더라도 군대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아..."
"그레이스, 지휘관이 함부로 한숨을 쉬어서는 안돼.
네 뒤에 딸린 목숨을 생각해."
"냉정하네."
"이것보다 거지같고 더러운 일들도 많았어.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어."
"베스, 대체 넌 어떻게 버텨온거니...?"
"넌 너무 밝게 살아서 모르겠지. 날때부터 지렁이였다면
땅 속에 쳐박혀도 개의치 않아. 너처럼... 용이었다면 몰라도."
"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니퍼 그레이스. 그 이름에 붙은 그레이스는 누군가 평생 노력해도 갖지 못할 가문이야.
누군가는 그 아래를 닦았을 거고, 너는 명예를 생각해서 자원한 군도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지원한
어쩔 수 없는 도피처였다고. 나야 그런 식으로 낙관적인 삶만 경험해본 네가 이제와서 투정 좀 한다고
짜증이 치밀거나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적응을 할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는걸 기억해둬."
"...."
"그 죽은 눈도 치우라고. 짜증나니까."
"죽은 눈..."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얼굴로 하던대로 웃어.
되도않는 희망이라도 저 사람들 눈 앞에 들이 밀어주라고.
나는 그런거 못하니까."
그레이스는 어색하게 웃어보였지만, 도리어 그 표정을 본 베스가 저지했다.
"됐네. 너도 이제 글렀나보다. 때려쳐."
그들은 말을 그만두고 다시 행군했다.
행군 기간이 길어질수록 부상자는 속출했고, 더는 식량이 없는 수준에 다다르자,
마침내 이들은 타고 온 말을 하나씩 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마들의 최후는 식량이었다. 허투로 구웠다가는 질겨서 제대로 씹을 수도 없었고,
산불을 야기하기라도 했다가는 금새 마물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들은 피 냄새를 철철 풍기는 애먼 말의 사체를 뜯어먹었다.
그레이스는 그 사이에서도 브리아나를 챙기기 위해 짐칸에 숨어 오들오들 떠는 아이를 껴안아
밖으로 빼와서는, 지휘관에게 배부되는 특식을 먹였다.
그 특식이라고 해봐야 딱딱하게 굳은 호밀빵 두 개가 전부였지만,
냄새를 풍길 수도 없었기 때문에 침으로 녹여서라도 먹으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집을 나올 때부터 필요하겠다고 생각해 따로 챙겨온 조금의 커피와,
사탕 두개도 함께 브리아나에게 먹였다.
당분을 조금이라도 공급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피냄새를 맡고 모여든 늑대와 맹수들이 어슬렁거릴 때면 병사들은 억지로 그들을 덮쳤고
겨우 잡은 짐승을 칼로 해체해 고기를 구워먹었다.
점차 그들의 생활에 품위가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걸 탓할 사람은 없었다.
"정녕 이게 내가 바란 군대였나...? 내가 원한 행군은..."
"괜찮아. 이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모두 말이 살아있었을 때 빨리 콜에 도달해야 했어.
아니면 거기서 휴식하면서 테러보어를 마주치지 않았어도 괜찮았겠지.
애초에 400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식량으로 출발했으니까."
"그게 무슨... 하아..."
"오히려 그 사실에 지금은 감사해야겠네.
저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었거든."
"무슨 소리야?"
"그걸 몰랐다면 그 원망이 누구를 향했겠어?"
까드득 갈리는 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벌써 며칠을 헤맨건지도 모른다.
이 숲에서 말이다.
이아에르 왕조에서 국가를 통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배운 이들은
결국 대륙에 숲을 조성하면서 그 경계를 나눴다.
이때 콜, 서지스와 같은 구역들이 생겨났다.
본격적으로 젤데리스 왕조에 협력하지 않는 구역들.
차라리 비 공식적으로는 국가 외 지역으로 치부하고,
명목상 보호는 하지만, 사실상은 국외 추방과 다르지 않았다.
그 결과가 지금의 현실이었다.
왜 그레이스는 콜로 향해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본질적인 해결책은..."
그레이스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벌써 사흘 밤낮을 쉬지도 않고 행군한 군사들을 휴식시키며 불침번을 교대로 세웠다.
시간이 더 지체되겠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행군을 강행한다면 정말 죽는 이가 나올 것 같았다.
아침이 밝은 후에 다시 행군을 이어가던 그레이스의 앞에 나타난 벽.
돌이다. 아주 단단한 돌로 지어진 산을 마주했다.
석산이다. 드디어 마주했다.
결국 자신의 눈 앞으로 높이 쌓인 산들을 바라보며 드디어 자신이 콜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았다.
눈 앞에 보이는 산을 넘지 않으면 결국 콜로는 도착할 수 없었다.
"모두 대열을 정리해주세요. 이제 다 온 것 같ㅇ..."
그레이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처참한 모습. 이제껏 외면해왔던 병사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푸석푸석한 피부에 퀭한 눈. 그리고 처참할 정도로 늘어진 다크서클,
눈에는 원망이 가득 들어차있엇고, 총기라고는 없어보인다.
아마 오랜 행군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 상처들과 진흙, 피따위가 굳은 군장.
그럼에도 자신의 말에 고개를 들어 반응해주고 있었다.
이미 저들에게 충성심이라고는 없을게 뻔한데도.
그저 같은 처지라는 이유로.
그레이스는 그들에게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아닙니다. 콜이 눈앞입니다. 빠르게 진입하죠."
산을 빙 에둘러 들어가는 일은 결코 간단한 행군이 아니었다.
그들이 마을 입구를 찾음과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마치 좀비와 같은 모습에 경계하는 마을사람들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그레이스는 베스를 데리고 이장을 찾았다.
이장은 이미 낯선 이들의 등장에 경계하며 날서린 눈을 하고 있었다.
"돌아가시죠."
"그, 이장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그... 저희는 중앙에서 파견된 경비병으로,
콜을 지키기 위해서 먼 곳까지 힘겹게 걸음을 옮긴..."
"필요 없소. 돌아가 주십시오."
"ㄴ...네?"
당혹스러움.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표정에 이장이 말을 이었다.
"콜은 이미 버려진 마을입니다. 적습도 없을게 뻔하고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적습보다 당신네들이 더 두렵습니다.
보호를 명분으로 고혈을 짜내고 우리를 착취할 당신들이..."
"아...아니 그런게 아니라..."
베스는 말 없이 자신에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현 상황의 판단을 넘기겠다는 것이겠지.
그레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장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건 성기사로서, 그리고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군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받아주세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알아요. 신뢰할수 없다는 걸요.
하지만 저희는 정말 이게 마지막이에요. 저희도 버려졌어요...
갈 곳이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이장은 가만히 그레이스를 바라보다가 그 뒤에 있는 베스에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성기사가 무릎까지 꿇고 하는 말입니다. 거짓말일리가 없죠."
그 뒤에 있는 병사들마저 머뭇거리다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이장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음식을... 준비하지요. 의원도... 조그마한 마을이라 오래 걸리겠지만 참아주시지요."
요리를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군인들은 자신들의 몇 남지 않은 군마를 넘겼다.
몇 남지 않은 말들은 탕국으로 고아져 푹 끓여졌다.
모두에게 고기를 배급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뿌연 고깃국에 둥둥 뜬 말고기 조각을 바라보면서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포기했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싸울 의지조차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저 눈 앞의 음식에 굶주려 목 뒤로 스프를 넘길 뿐이었고
그 와중에도 서로의 음식을 빼앗지 않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건 분명 같은 처지의 서로를 위로함과 동시에 그들을 동정하는,
함께 버려진 동지로서의 배려였다.
분명 복귀명령은 내려오지 않는다. 이건 사실상 유배와 다르지 않다.
그레이스는 그들에게 섞여들었고, 겨우 작은 집을 얻었다.
작은 마구간을 개조한 창고식 집은 가구라고는 막 들여온 엉성한 것 뿐이다.
집은 그레이스, 브리아나, 베스 세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날 저녁 겨우 속을 달랜 이들은 겨우 간이식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말했다.
"난 잘 한걸까."
"몰라. 묻지마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지친 몸을 뉘였다.
그 옆으로 브리아나가 그 투박한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레이스는 좁은 침대에 잠을 설칠 뻔 했으나 피곤함은 이기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병사들은 오랜만에 느낀 휴식에 안도하며
마을을 위한 일을 하나씩 처리하고 있었다.
병사들 중에 기혼자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혹은 가족 모두가 이미 죽었거나.
가족이 있는 이들은 정부에 거스를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바위산을 깎아내 마을을 증축하고, 집을 새로 지었다.
남쪽으로 길을 낼 수는 없었으므로 북쪽으로 북쪽으로 뻗어갔다.
북쪽에는 과거부터 대륙을 갈라놓은 거대한 삼림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지나온 숲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였지만,
의도적으로 그 안을 기피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도 그 안으로 발을 들일 이는 없었다.
시간은 늘 쏜살과도 같이 흘렀고 브리아나는 점차 성장했다.
작은 마을에서 살던 모두는 몰랐다.
이미 크델리샤 항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크델리샤, 젤데리스 동쪽으로 이어진 대륙의 작은 국가였다.
앞으로 만 년 정도가 지나면 아라카스트라는 새로운 국가가 들어설 그 자리에는
막 이주해 정착한 하이엘프 종들이 있었다.
뛰어난 마력 적성과 너무나 긴 수명으로 젤데리스를 잠식해가는 엘프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젤데리스는 피해를 수복하며 동시에 콜로 사람을 보냈다.
모든 원군을 이끌고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었다.
그레이스가 그 편지를 받았을 때는 이미 젤데리스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시점이었다.
그레이스는 그 편지를 받고 고민했다.
이 많은 이들을, 이제 막 행복을 면전에 둔 이들을 자신이 사지도 내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편지를 가지고 온 사절이 자신을 바라보며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잘 생각하십시오 제니퍼 그레이스. 본디 성기사는 왕하 성기사 아닙니까?
왕의 명령에 부복하는 것은 곧 반역이고, 그것이 이 콜을 더욱 위기로 내모는 것입니다!
당신은 성기사요!"
그 말에 고민하던 그레이스가 바르르 떨린 손으로 편지를 붙들고 있으면,
그 옆에서 그걸 바라보던 베스는 그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고는 북북 찢어버렸다.
"개소리야 씨발 뒤질라고. 이 나라에 성기사가 어딨어.
신성력도 하나도 없구만. 확인 해보고 팽한거 아니었냐?
좆이나 까라고 해."
"ㄴ...너...베스 네 이놈! 기어이 왕실을 배신하고 네가!!"
"그레이스."
"ㅇ...으응...?"
"나가있어. 브리아나 데리고. 이장님댁에 가서 내가 부탁한 것 받으러 왔다고 해."
브리아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그레이스는 이장의 집으로 향했고,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본 베스는 곧장 그 자리에서 메이스로 사절의 머리를 깨 부쉈다.
사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베스는 시체를 질질 끌고 나가서는 콜 북쪽 숲이 보이는 곳에 묻었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을테니까.
"후우... 씨발."
그레이스는 이장에게서 작은 종이를 받았다.
이미 베스와 상당히 이야기가 진척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적힌 서류는
공식으로 마을의 이름을 바꾼다는 문서였다.
"이건...?"
그레이스가 의아해하자 이장이 말했다.
"다른 성기사분께서 그러시던데요. 곧 나라에서 반역죄를 물을지도 모른다고.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달라고요."
"아..."
콜은 국가에 반기를 들어버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찢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서류상으로 콜이었던 마을명을 바꾸면, 사실상 말장난이지만,
혼란해진 젤데리스 중앙정부에서는 이걸 따질 여력이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는 시점에서 국가 존폐의 위기일테니,
그 시기만 무사히 넘기자는 의미였던 것이다.
"베스..."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너무 어색하지 않게 Coll이라고 쓰인 마을명에 'n 하나를 추가했다.
"이제 콜린이에요."
"허... 이렇게 대충 정해도 되나 싶은데, 뭐 알아서들 해 주시겠지요."
그렇게 정리하고 나서 베스와 그레이스는 만나서도 눈을 마주보지 않았다.
한명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잘 했다는 눈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이었을까 하는 부담과 자책이 섞인 눈이었다.
"사절은...?"
"돌아갔어. 말하니까 적당히 잘 이해해주던데."
"그래?"
"그렇다니까. 다 같은 사람이잖아?"
"그렇...구나..."
그레이스는 까득 이를 갈았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