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 처단
* * *
크델리샤 항전은 47일간 이어졌다.
젤데리스가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크델리샤의 엘프들은 화려한 마법을 퍼부었고 젤데리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나
크델리샤는 젤데리스를 멸망시키는데 주력하지 않았다.
포로로 노예를 들이기 시작했고, 그들을 일꾼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크델리샤로 팔려간 일꾼은 주로 그곳에서 광산에 투입되었고,
죽기 직전에 미리타엔으로 팔려갔다.
지속적인 수탈에 바토리오와 텔베드는 젤데리스를 버리고 투항했고
바토리오는 크델리샤의 귀족으로, 텔베드는 크델리샤의 백작의 첩으로 들어갔다.
바토리오는 그곳에서 권력을 잡아 오히려 젤데리스의 수탈에 가담했고
자신을 욕하는 이들을 비웃으며 권력에 아첨했다.
그는 그곳에서 끌려온 노예들 중 미모가 수려한 이들을 따로 빼내 밤놀이를 즐기다
결국 암살자에게 목이 따여 거리에 매달렸고, 텔베드는 첩으로서 사랑받던 시절이 지나고,
새로운 첩이 들어오면서 점차 밀려나 마침내 지하실 어딘가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졌다.
잊혀지다 못해 미쳐버린 그가 지하실의 석벽을 손톱으로 긁어대며
사방에 '살려줘'라고 글씨를 새긴 것을 보고 백작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서 그에게 애정을 품을리는 없었고,
텔베드는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와, 제 멋대로 빠진 손톱, 그리고 굽은 등을 한 채로
크델리샤 거리에 내몰렸다. 그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다 바토리오의 목을 마주한 이후로
그는 비틀비틀거리다 말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눈에 반쯤 뒤덥여 몸이 굳은 채로 앙상하게 말라 마치 미라와 같은 모습이 된 채로
어느 가정집 벽에 기댄 채 발견된 그는 허망하게 잊혀지고 말았다.
전쟁을 끝낸 것은 시즐디였다.
그는 단신으로 크델리샤에 찾아가 엘프의 여왕과 담판을 지었다.
연이은 전쟁은 단지 소모전이며 이득이 없다고 말하는 그의 호소에
여왕은 수긍했고, 조공을 바치는 형태로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카를로는 군권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전 이후로는 상당히 큰 손해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손해를 감수하고서도 그는 여력이 남아있었다.
도리어 군사를 비축하며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조용히 암시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마자 카를로는 여세를 몰아 콜로 출발했다.
분노의 대상을 돌린데 지나지 않았다.
그 지원이 온다고 해서 전세가 얼마나 뒤바뀌었겠냐만은 그 명령에 부복한 것 만으로도
이미 그에게 명분은 충분했다. 왕하 성기사단의 윌펫을 필두로 군대가 조성되었고
이들은 콜에 방치된 병사들과 더불어 콜에 있는 주민들까지 모조리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가능하다면 그곳을 수탈하며 영토를 넓힐 생각이었으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비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강행한 행군에 카를로는 상당한 포상을 내걸었다.
콜을 정복하는데 성공한 경우 기여도에 따라 그 부지를 재분배함과 더불어
전쟁으로 인해 공석이 된 귀족 자리를 내리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렇게 카를로가 모은 군대는 무려 30만이었다.
콜이라는 작은 마을을 상대로는 과할 정도로 많은 병력이었다.
그마저도 만족하지 못한 그는 고가의 용병을 미리타엔에서 끌어왔고
그들을 선봉에 내세웠다.
콜을 향해 진군하는 것은 간단한 일임에 분명했으나 동시에 치명적이기도 했는데,
여기서 패퇴하게될 경우 젤데리스의 명맥을 잇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카를로는 게멘데르 공작에게 물었다.
"공작님, 여기서 저희가 콜을 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나야 아무 걱정이 없네."
"아무... 걱정이 없다...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네. 모든 대비가 철저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야.
자네는 자네가 할 일을 하게. 나는 오직 더 넓은 탕을 밟는데 모든 관심이 쏠려있다네.
그리고 그걸 위해서 준비를 차곡차곡 하고 있다네. 아마... 그래, 한 4일이면 충분하겠군.
이미 나와 함께할 이들도 준비를 마쳐뒀네.
자네는 내 눈치를 볼 것 없이 하고 싶은걸 '마음껏.' 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카를로는 그 말에 전적으로 용기를 받아 북부로 출발했다.
그리고 다르말록의 가호를 넘어 바깥으로 나갔다.
그들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즉시 숲에 불을 질렀고, 병사들은 불타는 숲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달렸다.
수천, 수만개의 화전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수천의 군마가 달렸고
이는 금새 콜에도 전해졌다.
"중앙에서 기어이 군대를 파견했어."
"쫄지마 그레이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잖아."
"몰랐던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무려 30만이야.
이겨낼 수 있을리가 없어."
"무슨 걱정이야? 우리한테는 최종 병기가 있잖아?"
"최종 병기?"
베스는 픽 웃어보이며 브리아나를 들어올렸다.
"성녀님 말이야."
"브리아나가 성녀라니 그게 무슨 농담이야."
그레이스는 픽 웃어넘겼다.
그러나 동시에 본인 스스로도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기에
조금은 긴장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설마..."
"설마든 아니든 관계없어. 지금은 이 꼬마에게라도 기도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
"말로 풀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말이야."
"별 수 있어?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는 갚아야 할 거 아냐?"
"때가 되기는 했지."
그녀들은 오랜만에 묵혀뒀던 성기사단의 갑옷을 꺼내입었다.
"이거 오랜만이라서 잘 될지 모르겠네. 그레이스 넌 어때?"
"글쎄, 일단 오랜만이라서 어색하긴 하네."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두려운 눈빛으로 브리아나가 말했다.
"언니, 꼭 싸워야 해?"
"걱정 마. 대화로 풀어볼게."
"안될 수도 있잖아!"
"언니는 말이야, 널 지키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안죽어."
"아냐... 난 성녀같은게...!"
"그런게 뭐가 중요해 브리아나, 내가 널 믿고 네가 내 희망인데.
모두의 성녀가 아니어도 돼. 이미 나한테 성녀는 너밖에 없거든."
"언니..."
"언니 믿지?"
"응..."
"그래. 그거면 된거야.
너만 믿어주면 절대 지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그레이스의 머리를 탁 하고 치며 베스가 웃는다.
"아주 주접은. 제일 순수한 성기사 납셨어."
"성기사 아냐. 네가 그랬잖아. 성기사엔 안어울린다며."
"그럼?"
"그냥 브리아나 언니 제니퍼 그레이스야."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메이스를 집어들었다.
"후우... 홀리 인첸트."
오랜만에 한 것치고 깔끔하게 은백색으로 빛난 메이스에
살짝 웃어보이며 그레이스는 심호흡을 했다.
"아직 쓸 만하네."
"나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홀리 인첸트."
그렇게 말하면 베스의 메이스에도 그레이스보다야 미약하지만 빛이 깃든다.
그 모습에 베스는 붕붕 메이스를 돌리며 말했다.
"이게 되네."
"아직 완전히 게으르진 않았나봐 베스?"
"게으른 건 둘째치고 타락하지 않은게 신기하다."
"그런가..? 나름 착하게 살았나보지."
멋쩍게 웃어보이는 베스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레이스의 눈을 피했다.
그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하다.
"그레이스 있잖아."
"응?"
"...아냐."
"왜? 뭔데 그래?"
"아니야. 그냥 말이 헛나왔나봐."
그레이스는 잠시 베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말해주고 싶을때 꼭 말해줘."
"어... 그래. 그럴게."
그레이스는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휘하였던 병사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콜린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빌려줄 사람을 모았다.
말도 없고, 갑옷과 검은 손질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 지났다.
이들은 전쟁을 원하고 있지도 않았고, 이미 마을에 녹아들어 가족을 만들었다.
그들의 시큰둥한 눈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그레이스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랐다.
"해 보자고."
"그래. 어깨 펴 그레이스. 지휘 제대로 하라고. 개죽음은 사절이니까."
"버텨는 봐야지."
그레이스의 소망은 기적을 부르고 있었다.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래. 네가 얼마나 이 마을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키지 않으면 내일이 오지 않을테니까."
"저를 믿어주세요."
"말 안해도 말이지, 여기서 온갖 정은 다 든 사이잖냐고.
좁은 마을에서 이제 다 가족이지 뭘."
그레이스는 그들의 그런 말이 좋았다.
잊고 지냈던 따스함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온전히 신뢰받고 있다는 실감이었다.
"후우...."
그레이스는 각오가 섰다.
저 멀리서 뿌옇게 번져오는 연기는 숲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기어이 오는구나."
"저건 숲을 불태우는 것 같은데 그레이스."
"한방 먹었네. 숲에 몸을 숨기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해 히트앤 런을 할 수는 없겠네."
"그렇다고 저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서 전면전을 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결국 그렇다는 건..."
"마을로 들어오기 바로 직전, 어귀에서 싸워야 할거야. 마을의 피해를 방지하려면."
"후우... 저들의 수를 줄일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레이스의 중얼거림에 브리아나가 물었다.
"언니, 나는 뭘 하면 돼?"
"부담 갖지 마 브리아나, 너에게까지 뭔가를 시킬 정도로 나쁜 사람은 없어."
"아냐 언니.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어... 그럼 말이야, 정 그러면 마을을 위해서 기도해줄래?"
"그래. 알겠어!"
브리아나는 곧장 자세를 취하고 기도를 시작한다.
늘 보았던 기도 자세, 익숙한 자세를 한 번도 한 적 없는 브리아나가 하고 있었다.
성기사로 싸워왔던 날들은 늘 바쳤던 기도였는데.
그걸 브리아나에게 전해주다니. 어쩐지 기분이 착잡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시작되자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전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저것 봐라!"
"무슨 일인데요?!"
"숲이 불타면서 안쪽에서 마물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쏟아지고 있어!
아마 물같은 걸 찾아서 불을 견딘 모양이지?
저것 봐라, 테러보어 부대와 매시키나, 그리고... 와각수다!"
와각수.
그것도 화가 잔뜩 난 와각수라면 분명 상당한 공격력을 지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숲에 불을 지른게 누구인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제히 달려오던 군마를 들이받아 엎어버린 테러보어를 필두로
콜린을 향해 달려오던 군대가 흐트러졌고, 선봉이 뒤집어지면서
대열 전체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낙마하는 자들은 늘어만 갔고, 그 사이를 늑대들이 휘젓는다.
빠른 기동성은 말 없이 대체하기 힘들 뿐더러, 말을 탄 채로는 테러보어의 공격이 버겁다.
게다가 그 뒤에서 매시키나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뛰쳐나오면 감당하지 못할 크기에
하나둘 쪼이기 시작한다.
잠시 후퇴하려는 듯 거리를 벌린 군사들이 대열을 재정비하려고 하지만,
쿵 쿵 울리는 땅에 공포를 느낀 말들이 하나 둘 미쳐버린 듯 거품을 물고 발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잔뜩 분노한 와각수가 4마리 있었다.
그 넓은 숲에 어떻게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던 와각수의 균형이
와장창 깨져버린 이후로 와각수는 그 두꺼운 피부를 내세워 화살따위는 모조리 무시하고
쿵쿵대며 그 앞까지 기어갔고, 두려움에 질린 병사들이 전열에서 버티는 동안 고가의 용병들은
제각각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카를로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빠르게 지휘 명령을 바꾸고 일점으로 길을 내서 뚫어버리기도 했다.
그런 앞을 막아선 테러보어들은 '푸르륵' 소리를 내며 질척한 침을 흩뿌리고 있다.
"이 썩을 돼지새끼들이..."
몇 합의 격돌이 반복되었고, 눈에 화살을 맞은 테러보어가 앞을 보지 못하고 날뛰면서
카를로는 병사를 크게 잃었다.
큰 손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을 보고하는 척후병의 말에 그레이스는 멍하니 꿈뻑이는 눈을 하다가
브리아나를 꼭 안아주고 말했다.
"역시 네가 나의 성녀인가봐."
동시에 펑 소리가 화려하게 터진다.
폭발음에 다시 시선을 돌린 척후병이 충격에 젖어 실없이 말을 흘린다.
"이런 시발...."
베스가 그 말에 다시 긴장하며 묻는다.
"무슨 일인데?"
"저새끼들... 대포부대가 있어. 그냥 보더라도 20포는 될 것 같은데."
"대포...라고...?"
폭발력으로 짐승들을 억지로 밀어낸 것이다.
거대한 말뚝과 같은 포탄이 짐승들의 두꺼운 피부를 뚫고 나아간다.
관통된 구멍 사이로 피가 터지고,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와각수에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군마들은 늑대를 피해 산개하기 시작했고,
늑대를 검과 창으로 잡아내기 시작한 부대는 꾸준히 피해를 누적시켰던
테러보어의 복부를 잘라내며 하나 둘 진형을 갖춰갔다.
확실히 처음 출발할 당시보다는 그 수가 확연히 줄었지만
여전히 그 군대의 수는 많아보였다.
19만 4700정도의 병사들이 다시 행군을 강행한다.
때마침 내리는 비가 축축하게 그들을 적신다.
갑옷 사이로, 그리고 부츠 사이로, 찰박이는 소리가 스며들 때마다
그들은 이 행군의 목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콜린을 둘러싼 작은 석산들.
그리고 오직 하나뿐인 좁은 입구.
거기서 최후의 승부를 보겠다며 베스와 그레이스, 그리고 200남짓한 병사들은
숨을 고르며 매복했다.
마침내 한 층 피로해보이는 이들이 산 앞에서 멈춰서 말을 걸었을 때,
베스와 그레이스가 먼저 그들을 맞았다.
"콜의 쓰레기들. 지금이라도 투항한다면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콜은 없습니다. 이곳은 콜린입니다.
왜 찾아왔는지부터 확실히 하시죠."
"씨발 말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베스, 그레이스!
비켜. 나 윌펫이야! 알아? 씨발 윌펫이라고!"
"어, 알아. 내가 씨발 내 처녀 빼간 새끼 얼굴도 모를 줄 알았어?
신성력 빠지고 나서 잘도 단장 행세를 하는구나?"
"너...너 이 미친년이..."
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그레이스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말했잖아? 신성력이 왜 아직 안떨어지는건지 모르겠다고.
우리 여기 오기 하루 전에, 저 놈이랑 한판 했거든."
그레이스는 질리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고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런데도 신성력이 나온단건, 아직 기회는 있다는 소리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그레이스?"
"나중에 나랑 이야기 좀 해."
"살아남으면."
"후우..."
둘의 대화를 가만히 바라보던 윌펫이 말했다.
"다 죽여버려!"
그렇게 전쟁이 또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