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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98화 (298/303)

〈 298화 〉 헌신

* * *

군대는 마을을 향해 전진했고, 그 선두를 막고 있는 것은 두 명의 성기사였다.

그 뒤로 낡은 갑옷을 겨우 걸쳐입고 이제는 무기조차 변변치 못해

농기구를 들고 그 앞을 막고 선 이들은 오랜 기간 훈련을 게을리 한 이들이다.

그러나 왜인지 군대는 그 앞에서 머뭇대며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달라보이는 그 기백은 그들을 멈추게 했고

원인모를 자신감이 들어찬 눈에 카를로는 흠칫 윌펫을 돌아보았다.

"성기사단이었던 자로서 아는 것 없나?"

"유일하게 신성력을 다룰 수 있었던 여자입니다.

기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신성력은 인챈트로 부여할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조금... 많이 달라보이는군요."

그 말대로였다.

"화살을 쏴라."

카를로의 명령에 하늘을 뒤덮은 화살비는

수많은 벌레떼와 같이 그녀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레이스는 심호흡을 하고는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번뜩이는 빛이 퍼져갔고 날아오던 화살이 벽에 가로막힌다.

마치 힘을 잃은 것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화살들에 놀랄 시간도 없이

윌펫은 곧장 검을 빼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뒤로 따르는 병사들의 규모에 그 뒤에서 베스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우리도 가자!"

무거운 메이스가 갑옷을 우그러뜨리고

예리한 검은 틈을 벤다.

부딫히는 철붙이가 붉게 변해간다.

철로 뒤덮인 산에서 쇳덩이가 부딫히는 소리만 연달아 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전쟁은 꽤나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윌펫의 검을 유효하게 막아내고 있는 모습에서

어딘가 의아함을 느끼는 베스가 그녀를 돌아본다.

윌펫의 목에 선 핏대가 붉다.

"단장은 나다...! 그레이스! 반역에 대한 죗값을 치러라!"

"성기사단은 죽었어. 난 여기 제니퍼 그레이스로 서있는거야."

"그 애새끼 때문이냐? 그 브리아나...? 역시... 그년이 성녀였던 거야.

넌 그걸 빼돌린 거고."

윌펫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들거리던 팔을 확 위로 쳐올리고 윌펫은 주먹으로 그레이스의 중심을 흩뜨린다.

밀려난 그레이스에게 윌펫이 검을 꽂으려는 찰나 그레이스는 갑옷이 두터운 손으로 검을 잡았다.

두꺼운 가죽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꿀꺽 침을 넘겨본다.

물러난 그레이스는 뒤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던 검사의 옆구리를 메이스로 후려쳤다.

쾅 소리가 나며 갑옷이 박살났고, 검사는 그대로 날아가 벽에 쳐박혔다.

"브리아나... 그 년이구나..."

윌펫은 고개를 치켜들며 외쳤다.

"샅샅이 마을을 뒤져라! 브리아나 그레이스! 그년을 잡아 내 앞으로 데려와라!"

"아...안돼...!"

그때부터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길목을 틀어막고 정말 누구 하나 뒤로 넘기지 않겠다는 듯

꽉 쥔 주먹에 붙들린 메이스로 말 그대로 병사들을 후려치고 있었다.

한번 한번의 타격이 강해져서인지 그 앞을 뚫는 자가 없었고

점차 모래와 철로 뒤덮였던 산에 진한 철의 냄새가 배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신성력에 갑옷이 속수무책으로 박살나며 맨 복부에

후려맞은 병사들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 위로 금새 또다른 말이 달렸다.

또 다른 말, 또 다른 사람에게 짓밟히는 동료의 죽음에도 병사는 멈추지 않는다.

그럴 떄마다 그 앞을 굳건히 버티고 선 그녀는 견고해져갔다.

오히려 그레이스에게 끝없이 날아드는 화살과 검격에도 굴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군대에게 공포심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씨발... 뭘 하나! 윌펫, 어서 저기를 뚫어라!"

카를로의 고함소리에 그들이 길을 내면서 전황이 변해갔지만

결국 그 끝에 선 그레이스를 뚫을수는 없었고 그럴수록 그들의 눈에는

마을 한가운데서 벌벌 떨면서도 두 손을 모으고 그레이스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작은 소녀의 모습만 또렷하게 보였다.

저 기도는 온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고, 그레이스의 신성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내가, 내가 저 소녀를 주웠어야 했는데..."

윌펫은 그런 말을 하고 활을 주웠다.

시위에 매겨진 활을 보고 그레이스는 다시 보호막을 전개하기 시작했지만,

화살은 무심하게 빗나갔다.

그레이스가 방어벽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레이스! 방어벽을 내리지 마!"

베스였다.

쾅 소리가 나게 부딫히는 병사들.

일제히 방어벽을 깨부수기 위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레이스는 방어벽을 재빨리 치켜 올렸지만 그 충격에 뒤로 밀려났다.

발이 긴 선을 그으며 뒤로 끌리는 감각.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잠깐의 순간, 그 찰나의 방어벽이 부재했던 순간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녀의 발을 뒤로 밀어낸 순간, 그레이스가 이를 악물고 피를 흘리며

억지로 그 벽을 다시 앞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미친... 미쳤어..."

아무도 가능하리라 생각지 않았던 거대한 방어벽이 그레이스의 발과 함께

그곳에 박힌 듯 굳었다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좁은 협곡인 탓에 군대가 모두 힘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300여 명은 족히 채울 공간이었다.

여자 한명의 힘으로 뒤집을 수 있는 전력차가 아니었다.

"기적이라는 건가... 하지만 늦었다."

"뭐?"

그레이스의 동요.

자신을 보며 기분나쁜 미소를 짓고있는 윌펫을 바라보며

그레이스는 조금씩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불안감이 늘어간다.

조금씩 돌아본 뒤에 보이는 광경은 아까 날린 화살이

브리아나의 복부에 박힌 모습이었다.

"아..."

"성녀는 끝이다."

"안돼...! 안돼!! 브리아나!"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서면 도리어 브리아나와 마을을 지킬 수 없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으면, 브리아나의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

그레이스는 이를 까득 악물었다.

천천히 방어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베스! 브리아나를 부탁해! 브리아나를 데리고 피해줘!"

"뭐?"

"브리아나를 살려줘!"

"그레이스..."

"브리아나는 성녀니까! 브리아나가 날 믿어주는 한 나는 밀리지 않을거야!

여기서 죽으면 안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레이스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울분을 가득 담은 눈을 거절하지 못하고 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선을 이탈했다.

"하아.. 기어이... 세번은 안돼... 세번은 못 잃어..."

베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브리아나를 안아들고 미약한 신성으로

브리아나를 회복시키며 숲쪽으로 도망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훈련 좀 빡세게... 아니, 윌펫이랑 자는 게 아니었는데."

미약한 회복력은 점차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다.

브리아나는 손으로 그녀의 팔을 꼭 붙든채로 말했다.

"고마워요 언니."

"나한테 감사하지 마. 아무것도 못했고 그럴 것 같으니까.

감사는 그레이스한테 나중에 직접 해."

"그래야...겠어요..."

어색하게 바르르 떠는 브리아나의 몸은 점점 움직이기 버거워보였다.

살짝 혼란스러운지 제대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보이기도 했다.

"뭐해..! 빨리 그레이스한테 기도해줘!"

그 목소리에 잠시 눈에 초점이 돌아오더니 브리아나가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품에서 바둥거리며 죽어가는 몸을 일으켰다.

"아... 언니는... 돌아가야...돌아가야 해요!"

"누워있어! 잊었어? 약속했다며. 믿으면 돌아간다고.

그레이스는 네가 믿어주면 분명 돌아올거야.

걔한테 성녀는 너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아... 맞아요..."

브리아나도 눈물 한방울을 흘렸다.

"언니한테 성녀는 저밖에 없다고 했어요."

"다시 조용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붙든 브리아나가 허덕이며 말했다.

"베스 언니, 내 손 좀 잡아줄래요? 기껏... 낀 깍지가... 자꾸 풀리려고 해..."

"ㄱ...그래... 잡아줄게... 잡아줄테니까... 씨발... 씨발...."

숲속을 달리는 둘은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달려야 했다.

베스의 신성력으로는 겨우 생명을 붙들어 놓는 것이 한계였고

그마저도 조금씩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누구라도 살려줄 수 있잖아... 제발... 더는 잃기 싫은데...!"

그렇게 달리다 발이 걸려 넘어진 베스가 품에서 브리아나를 놓치고

브리아나가 숲 바닥을 구르며 쓰러졌다.

베스가 화들짝 놀라 브리아나에게 달려가보지만 이미 바닥에 흩뿌려진 피는

상황을 절망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안돼! 브리아나...! 브리아나!"

브리아나는 비틀거리며 눈을 뜨고 말했다.

"하...하하... 그 혹시 언니는 그거 알아요?"

"말하지 마... 브리아나..."

"우리 언니가... 내가 언니의 성녀라고 했는데,

사실 언니도 내 성녀였거든... 말을 못해줬네..."

"네가 말해주면 되잖아... 네가... ㄴ..."

베스는 힘 없이 팔을 떨군 브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베스가 방울방울 새어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 죽겠네 정말."

빠르게 베스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처음보는 남자가 있었다.

"도와주세요...!"

베스가 그에게 말을 거면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묻는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잠시만요."

그는 차분히 브리아나의 상태를 진찰하고 화살을 조심스레 뽑아낸 후 환부에 약을 바르고

그녀의 입에 조금씩 약을 먹여주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기절한 것 뿐이에요."

"가...감사합니다... 아까 그 약은..."

"미리타엔에서 왔거든요. 거기는 의약품 연구가 활발하죠.

다른 연구도 활발하지만."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나중에 사례할게요!

이름이...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전 그냥... 집나간 딸을 찾기 위해 나온 사람입니다.

딸이 어디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들고 나온 포션이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성함은 들어야 하는데..."

"본노르제. 본노르제라고 합니다.

혹시 검은 머리를 한 소녀를 발견하면...

여기 이 쪽으로 전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작은 쪽지를 넘겼다.

그 안에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네. 꼭 그럴게요!"

베스는 브리아나를 들고 비틀비틀 도망쳐 숲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미리타엔을 지나 교국까지 향했고

그곳에서 터를 잡아 정착하게 되었다.

베스는 더이상 힘 없는 자가 약한 자를 지키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말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작은 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상처받은 작은 이들을 위한 연합이라는 의미로 '길드'라고 불렀고

이것이 후에 모험가 길드가 되었다.

브리아나는 날마다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 교회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본 교황에 눈에 들어 수녀로 자라났다.

그러나 그 믿음은 교회가 아닌 한명에게 집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교회에서는 그녀의 수녀직을 박탈했고 후에 브리아나는 젤데리스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유레크로스가 새로 그 자리에 들어선다는 이야기에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베스는 자신이 일군 길드에서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으나

브리아나에게는 지원보다 언니를 만날 수 있는 페세티아 대륙이 더 좋았다.

그곳에서도 언니를 기다리며 날마다 기도했다.

지칠만도 하지만 그녀는 늙어 죽을 때까지 날마다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레이스를 기다리며 믿고 기도하는 모습 때문에 '트러스트'라고 불렸고

그것이 유레크로스의 가문없이 '트러스트' 라는 성씨를 가진 이들의 시작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눈을 감으며 한 말은 그것이었다.

"언니... 나는 언니를 기다렸는데... 아니었나봐.

또 언니가 날 기다려 주고 있었구나."

그리고 베스와 브리아나를 떠나보낸 그레이스는 전선에서 남아

콜린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점차 수적으로 밀려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성녀는 죽었다! 이제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야! 죽여버려라!"

윌펫의 말에 그레이스는 처음으로 눈빛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스스로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공포. 분노에 사로잡힌 충동성이

그 순간 그녀의 눈을 가렸다. 점차 뻗어나오는 신성력.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늘고 있었다.

그것들이 응축되듯 모여 단단히 뭉친 메이스는 이제 무겁다 못해 두려웠다.

휘두른 팔에서 뻗어진 메이스. 맞으면 죽는다. 그 생각이 모두의 머리를 메운다.

손을 놓으면 일직선으로 날아간 메이스가 콰직 소리를 낸다.

그건 윌펫의 얼굴을 으깨며 그를 낙마시켰고 콰직 소리를 내며

얼굴을 투구째로 부숴버렸다. 박살이었다.

그레이스가 분노로 치를 떨며 흘린 마지막 눈물 한방울에

그들은 깨닫고 말았다.

"씨...발..."

성녀는 브리아나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를 감싸던 성녀는 이제껏 눈 앞에서 빛나던 그레이스였다.

마을 전역을 감싸는 금빛 보호막.

이전보다 두텁고 강한 보호막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렀다.

콜린은 안전할 터였다.

그레이스의 머리가 흰 빛으로 불타오르는 듯 빛나고 있었다.

그걸 목격한 카를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일 큰 상처를 받은 처녀라는게... 이런 뜻이었나..."

그날 콜린은 피해 없이 전쟁을 넘겼다.

보호막이 감싸지 않은 모든 구역에서 짙은 농도의 신성력이 타올랐고,

불길처럼 번져 정화하는 빛에 병사들은 집어삼켜져 타오를 뿐이었다.

한마디 말도, 비명과 신음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

타오른 빛이 꺼져가는 자리에는 홀로 서 있던 그레이스만 처량하게 서 있었다.

휘청.

단 한번의 바람이 그녀의 갑옷을 흔들면 그대로 그녀는 옆으로 쓰러졌다.

이미 다 타버린 그녀의 뼈 위로 백색 갑옷만이 남아있었다.

뒤늦게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메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메이스는 그 자리에서 파사삭 소리를 내며 흩어져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레이스의 뼈도 영원히 흩어져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갑옷 아래 놓인 모래만이 뒤늦은 성녀의 헌신을 말해주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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