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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99화 (299/303)

〈 299화 〉 강림

* * *

젤데리스의 패배 이후 콜린을 규합하려는 시도가 무산되고,

젤데리스는 더이상 국가를 온존할 수 없게 되었다.

혼란해진 국가에서 왕의 권한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였고,

각 지방에서 들고 일어난 귀족들이 저마다 영지에서 높은 세수를 걷어냈고

아무도 그 일을 제지하지 않고 도리어 각지에서 그 행위에 불을 지피니

국가는 혼란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왕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게멘데르의 부재가 그들에게 심각하게 다가온 시점,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그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모든 국적과 권리를 포기하고 새로운 대륙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새로운 국가를 설립해버리고 말았다.

게멘데르는 젤데리스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 필사적으로 다른 국가로 떠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건 망국을 버리는 일과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늘 욕망은 수요의 시작이다.

욕망과 수요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계가 언젠가 다가오게 된다.

누군가의 사치가 곧 필수적인 수요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듯,

그가 만든 국가는 점차 번영해, 마침내 그 위치를 대체할 수 없게 되어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가 곧 엠페레스였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것은 게멘데르 뿐만이 아니었다.

기회를 보고 있었던 이들이 또 있었으니, 영웅이라 불린 남자였다.

성녀의 진실과 헌신을 아는 이들은 젤데리스에 남아있지 않다.

그 말은 곧 젤데리스를 향해 내렸던 모든 가호의 결과물이 차디찬 비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르말록에게 모두가 반기를 들었던 순간이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순간을 노린 아르간티아는 자신이 거두었던 기적을 내렸다.

다르말록의 기적이 흩어져 사라진 것과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다르말록이 신인 이상, 신을 치기에 최적인 시대는 곧 신격이 떨어진 순간.

그리고 신의 발목을 인간이 잡아챈 순간이다.

아르간티아는 기적을 이루고 인간의 힘을 강조했고

다르말록의 국가가 패전했으며 약속된 성녀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보고에

하나 둘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이들이 늘어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교국에서 보였던 브리아나의 행보는 성녀가 아닌 제니퍼를 위한 기도로

사람이 그토록 신실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작용했고

사람들은 신을 위한 기도보다 인간의 기도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를 다르말록은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교국에 침투한 인원이 하나 더 있었으니 신을 믿지 않는 성기사 베스였다.

비록 싸 보이지는 않았으나 처녀가 아니었던 그녀의 신성력이 미약하게 남아있었고

그 신성력이 약 3달에 걸쳐 사라지기까지 그녀는 단 한번도 신을 긍정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자신이 성기사를 그만두지 않았으리라는 자조적인 웃음에 담긴 말을

사람들은 놓치지 않았다.

모험가 길드가 크게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였다.

그 누구도 신을 믿지 않으니 인간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모두를 위한 것. 그 이름을 함부로 깎아내릴 수 없었던 이들은

숭고함을 내세워 인간의 정의를 세우기 시작했다.

교국에서는 이 혼란을 잠재울 수단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르말록은 그들에게 적절한 대처를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내려온 말은 하나 뿐이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단들을 척결하는 것은

나아가 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며 땅에 뿌린 기적을 붙들어놓는 일.]

그 말로 인해 본격적으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이단을 필두로 하는 척결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

신이 허가하지 않은 인종, 그리고 종족을 처참하게 학살하기 시작하는 이들은

전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명분이 세워진 것은

수년간 딸을 찾겠다며 돌아다녔던 본노르제라는 남자가 마녀에게 살해당한 순간이었다.

자신들의 악행에 명분이 부여되자 이들은 자제력을 잃었다.

그들의 행동에 당위성이 부여되었고 그들의 주머니에 수급으로 만들어진 금화가 쌓였다.

점차 신을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점차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존재들이 인간의 손에 사라져간다.

그렇게 마물이 제거되고 마력을 다루는 이들이 희미해지며

마법을 다루던 이들의 세계가 소마법과 영기술로 줄어만 갔다.

마력의 총량은 같은 것. 푸른 별의 연구에서 제시된 것 같이

퍼진 마력은 온전히 대기중에 퍼져있었고, 다르말록은 이를 신성으로 치환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걸 가로챈 것이 바로 아르간티아였다.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드는 이와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이.

얼핏 보면 같아보인 둘의 성향이 상충했고 쉽사리 승부를 겨룰 수 없을 것 같았으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다르말록의 신자는 인간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녀사냥이라는 명목하에 죽어갔고,

도망쳐 살아남은 이들도 이단 심문관과 그 종교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다르말록의 패인이었다.

가장 강하고 용맹했어야 했을 신은 총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절반을 그리워했다.

테라시아의 후손이 자신을 막아서는 것이 불쾌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오랜 기간 만들어진 반 다르말록 체제와 기도는 그가 쉽게 무너뜨릴 수준이 아니었다.

"기록이... 그 절반의 기록이 있어야 했다. 그게 내 것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너의 시대는 끝이다. 신은 존재해서는 안된다.

신이라는 사상 아래 묶여 부정당한 모든 인간의 가능성은

점차 예리하고 날카롭게 목을 노리고 있다."

"해를 따라 빛나려 해도 결코 해가 될 수 없는 것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빌어도 결코 스스로 빝나지 못하는 달이여...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그의 심장에 봉인의 문양이 선명히 떠오르면 다르말록은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그들이 자신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도망쳤고, 그 누구도 찾지 못할 자리를 찾았다.

영원의 마력을 집어넣으며, 자신의 기록을 찢어 개념을 그곳에 집어넣으며

다르말록은 울부짖으며 피신해야 했다.

영원히 어두운,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의 끝. 그곳을 천천히 채우며 말이다.

그곳은 점차 주변을 어둡게 물들였고 지반을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움푹 파이는 곳에서 아래로 치고 들어간 깊은 곳.

세상의 핵이 잠든 그곳을 원한다는 듯 치고 들어간 그곳에서

깊은 그리고 어두운 것이 솟아올랐다.

심장을 봉인당한 다르말록이 피를 토하는 것이었다.

토해낸 피가 점점 그 공간을 메우고, 깊은 암굴은 그렇게 호수가 되어간다.

에리아는 이 호수를 기억했다.

"만데라파 호..."

누구도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떤 생물도 그곳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깊숙한 끝에 존재하는 건, 죽어버린 신의 심장 뿐이다.

"찾았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마치 빨려들어가듯 한 점으로 시야가 모인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블랙홀이 그랬듯 모든것이 빨려들어간다.

그곳에 에리아와 삐삐까지 휘말려들어간 순간 바라본 것은 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눈.

봉인된 공간을 가득 메운 개념들은 도르테우스가 가지지 못한 반쪽이다.

그 기록에서 알지 못한 개념의 존재가 이 호수에 혼재해 있었다.

에리아는 차분히 그것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죽음, 영원, 봉인, 망각, 회귀... 모든 저주의 기원과 개념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끝에 닿은 본질이 반짝거렸다.

존재의 앞에 이어지는 기록과 기록의 앞에 이어지는 개념, 개념의 앞으로 이어지는 창조.

그리고 그 창조마저도 존재하기 이전에 남은 것. '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순간부터

이 기록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과정이 머릿속으로 굴러온다.

이해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에리아가 그걸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은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마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모든걸 가져갈 수는 없지만 반쪽이 온전한 하나가 될 때 만들어진 하나의 개념을

에리아는 분명히 발견했다.

"삐삐야."

"응."

"순수함이라는건 본질의 변화겠지?"

"본질의 변화...?"

에리아가 삐삐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한손으로 그 개념 끝에 존재하는 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꾸드득 움켜쥔 심장에서 밝은 빛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접근할 수 없는 권한에 접근하는 것처럼 그 손끝이 서서히 검게 변하고 있었다.

팔에 느껴지는 통증은 참아내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마력 반응에 놀란 도르테우스가 공간을 열고 말했던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에리아! 멈춰!! 이미 충분히 했잖아!!"

"아직 더 할수 있어요."

이를 악물고 코피를 흘리면서도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뽑아낸 빛을 점차 끌어당기면서 말이다.

"과거의 개념이고, 다른 차원의 개념이지만,

그저 내가 이 존재를 알아낸 것 만으로도

무언가가 변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요?

내가 접근한 이 과거의 존재가 무언가를

크게 근본부터 뒤흔들 수 있다면 어쩔래요?"

"하지마! 이미 무리하고 있어! 여기서 죽으면 존재를 남길 수가 없어!

기록 세계 밖의 범위라고. 차원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

천사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야 그건!"

"에이, 천사랑은... 쿨럭! 연 끊은거 아시잖아요.

저쪽에서 원하는대로, 이제는... 마녀...라고요.

그리고 딱 한 점. 지금 여기 허점을 찾았어요."

빛의 끝.

그것을 순수하게 움켜쥐고, 그 눈에 담는다.

빛무리가 깃들어 빛나기 시작하는 눈으로

에리아는 점을 바라본다.

점의 끝. 선으로 이어져 면이 되고 마침내 차원의 개념을 일그러뜨리던 순간의 끝.

다르말록이 끝내 놓지 않았던 것을 뽑아냈다.

천천히 공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균열은 커져가고, 그 사이로 뜨거운 열풍이 불어온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하지만 그 끝에 분명히 존재하는 무를 마주한다.

와장창 깨져버린 공간들을 뒤로하고 마침내 에리아는 손을 뺀다.

그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려있다.

"후우.. 후우... 후우..."

"마마...?"

"점은 차원이야. 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차원은 움직여."

에리아는 다시 손을 뻗는다.

손가락 끝에서 크게 가로지른 공간이 열린다.

그 모습에 도르테우스가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 말한다.

"너..."

"기록, 부수러 갈게요."

태초부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근간에게 도전하는 마녀를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도르테우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이래야 마녀지."

공간을 찢는다.

차원을 찢고 이어붙인다.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

도르테우스가 관리하던 것과 다르다.

'내'가 이동하는 것과, '공간'이 이어지는 것은 다르다.

그 공간의 범위를 차원으로 확장시킨 순간 그녀가 우선 시도한 것은 하나였다.

모든 차원의 영역에서 자신을 배제하는 것.

그녀가 그리는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라도 결점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다르말록은 이길 수 없을테니까.

하나씩 하나씩 자신을 지워나간다.

아르간티아, 그리고 멜타이트, 헬브람, 도르테우스와 지낸 순간에서,

천사 엘타리스의 존재를 지운다.

세상에 천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원래부터 영웅 아르간티아의 신화에는 넷 뿐이었던 것으로.

도르테우스와 함께했던 순간의 존재들마저 마지막으로 지워버리면서 말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으로 세상이 변해갔다.

엘프의 존재는 신성력을 받았던 시절의 인간으로,

플로라는 스스로 노력해 정적을 배제하고 황제의 자리를 쟁취한 여자로,

게비디는 순수하게 킬레리였던 그녀와 사랑해 맺어지고

그녀의 이름을 발레리아로 만든 것으로,

에리아와 삐삐의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던 미래를 만들며 시대는 변해간다.

그리고 그 존재들이 지워짐과 동시에 에리아는 삐삐를 안아들고 맨 처음 자신이 들어오기 전의

다르말록이 깨어난 세계로 뛰어들었다.

"삐삐야."

"응."

"무슨 말을 할지 알겠지?"

"알아. 난 마마 믿어!"

"앞으로 많이 힘들겠지?"

"괜찮아! 삐삐가 있잖아!"

미리타엔 동부의 도르테우스의 제단에서 눈을 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시작할까?"

"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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