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 기억에 없는
* * *
아르간티아는 다르말록을 마주하고 있었다.
존재해서는 안될 인물을 차지하고 그 몸을 빼앗은 모습에 아르간티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분명 조금만 기다리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주먹을 꾸득 쥐었다.
"뭘 기다리고 있는거냐 아르간티아."
"시기? 뭐든 우선 널 잡을만한 덫을 기다리는 중이다."
"덫? 덫이라... 그래. 그럼 누가 덫을 설치했지?
여기 있는 넌가? 아니면 필멸자가 된 악마인가? 그것도 아니면 봉인된 정령?
아! 여기 코빼기도 비추지 못하는 네 아비일수도 있겠군?"
아르간티아는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분명 그 말이 맞는데, 자신은 무엇을 믿고 있었던 걸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홀로 막을 수 있었나? 아니,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여기에 온 걸까. 멜타이트를 찾아냈어야 했는데.
그리고 에스트로를 챙겼어야 했는데.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그걸 스스로 깨달은 것 뿐이다. 이제껏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늘 돌아올 것이고, 너는 다시 패배해 쫒기게 될 것이다.
보이느냐? 여기 넘치는 이 추종자들이 뿌리는 공포는 곧 존재하는 두려움에 대한 신앙과도 같지.
내 영향력은 이시간에도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뿌드득 소리를 내며 다르말록은 사기를 모은다.
기록 자체를 다루는 이에게 마력은 필요 없는 것이다.
어두움 그 자체를 손에 말아쥐고 한걸음 내딛는 체헤게를 바라보면서 아르간티아는 한숨을 푹 내쉰다.
대체 누가 저 자를 막겠느냐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때였다.
"윽...!"
한쪽으로 휘청이며 기울어지는 균형을 억지로 붙드는 체헤게와 당황한 다르말록.
분명 최적의 조건이라 생각했던 그의 전제가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이럴리가...!"
역사가 변했다.
에리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체헤게는 주술로 부활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 주체는 네메시스에서 영혼을 끌어낸 셰릴 린이었던 것으로 변해 있었는데,
셰릴 린은 다른 차원으로 빨려넘어간 상태였다. 그 매개가 사라진 이후
해백과 반쯤 뒤섞인 것을 제외하면 그가 신의 육체로 적합한 까닭은 사라지고 만다.
기계였던 순간, 영혼이었던 순간, 다른 무언가를 허락하던 순간 모두가 날아가버리고
그저 남아있던 빈 해백의 그릇마저 영영 도서관의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더는 체헤게는 특별한 자가 아니었다.
그런 몸은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심각하게 내상을 입게 되었다.
"이럴리가 없다! 분명 완벽하다고 판단한 몸이었는데!"
결속은 영혼으로 붙드는 것이었고, 강신의 그릇이 깨져버린 순간, 털썩 무릎꿇은 체헤게는
픽 쓰러져버리고 만다.
아르간티아의 입장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그리고 이제는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덫의 발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르간티아... 네놈... 덫을... 무슨 짓을 한거냐...
안된다... 이대로는 안된단 말이다..."
다시 일어서며 마력을 빨아당기는 그 모습은 기괴한 수준이었다.
고개를 돌려들고 입으로 검은 마력을 벌컥대며 마시는 모습.
공기중에 퍼져있는 공포와 절망을 빨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게 너의 신성이냐?"
"이... 버러지들이... 난... 나는 신이거늘..."
"신성은 어디에서 오는지 아나?"
콱 하고 발로 그 턱을 짓밟은 아르간티아는 마력을 끌어올려 발에 힘을 싣는다.
힘을 다루는 그의 마력은 중력과 함께 콰직 소리를 내며 턱뼈를 밟아 부순다.
턱이 떨어진 다르말록은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턱 아래로 줄줄 새는
사기를 억지로 끌어막으려고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손을 위로 어떻게든 뻗어보려고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에서 사기를 흘리는 그를 내려보며 아르간티아가 대중에게 말했다.
"이 자가 진정 그대들이 믿으려고 했던 신이 맞습니까!"
대중의 망설임을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아르간티아는 다시금 강한 어조로 외쳤다.
"무능한 신과 전능한 인간 중에 누구를 믿으실겁니까?!"
웅성대는 목소리는 서서히 가라앉는다.
아르간티아는 사람들을 고무하며 말했다.
"샤인, 저 사람들을 대피시켜주십시오.
그리고 마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주실 수 있습니까?"
아르간티아의 말에 그들 역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그 모습에 수긍하며
쓰러진 체헤게에게 마법을 시전한다.
마카 다미아의 테트라큐브.
거기 담겨있던 봉인 마법은 시전한 존재가 사라지며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이제 그 마법은 다르말록을 향하고 있었다.
사기와 마력 모두를 잃고 땅을 기는 신에게는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주변에 넘치는 사기를 사용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봉인!"
땅에서 사슬같은 것이 솟아오르고, 발을 묶어 아래로 끌고 내려가는 것 같은 모습.
강대한 마력으로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체헤게가 피를 토해낸다.
쿨럭이는 피는 검붉은 빛의 연기를 흘렸다.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신이거늘..."
이제는 입조차 움직이지 않고 사념으로 대화하기 시작한 신의 말은 거기서 멈추었다.
"커헉...!"
신의 심장. 아무도 손대지 못했어야 할 물건을 손에 쥐고 그곳에서 신성을 뽑아내는 자.
아무도 허락받지 못한 존재의 죽음을 거스르는 자. 그런 자가 있을리 없었다.
다르말록은 당황하며 체헤게를 버리려고 했으나, 봉인에 묶여 무엇도 하지 못한 채
피를 덜덜 흘리며 바닥에 얼굴을 묻어야 했다.
'대체 누가...'
상황은 변하고 있었다.
짐작하지 못한 방향으로.
다르말록은 스스로 생명을 짜내 내뱉었고, 그 기운으로 기록을 다루고 있었다.
봉인을 스스로 끊어내고 죽은 육체의 체헤게를 내버렸다.
바닥에 초라하게 떨어진 그 몸을 두고 자신의 육체를 돌아본다.
다르말록이 봉인된 만데라파 호 밑바닥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웃고있는 형체.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거냐."
"언젠가 다시 만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쪽은 그럴 준비도 안했었나보지?"
"정령따위가... 대체 어떻게 봉인을 푼거냐!!"
"하기사, 너도 여기 박혀 있는데 내가 먼저 풀고 나오면 배알이 꼴리기는 하겠지.
근데 그렇게 말해도 말이야, 나도 잘 모르겠다. 착각? 환상? 잘 모르겠다.
미친 건지도 모르지."
"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거냐... 이런 미래가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있을리가 없다...
그럴리가 없단 말이다!"
뚜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르말록은 스스로의 봉인을 깨기 시작한다.
모두가 아르간티아를 상대하던 다르말록을 보았다.
본 사실을 인식하면 그 존재를 믿기 마련이다.
신앙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그 존재를 모두가 믿어버렸다.
신이었던 자는 다시 신이 되고자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발 아래 놓인 모든 것들이 머리 위로 놓인다.
똑바로 섰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이 딛고 있는 것이 제일 높은 것이라 믿었을 때,
자신이 마주하는 것이 타인의 발목임을 느끼고 만다.
출발선이 달랐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천장을 밟고 거꾸로 자라난,
결국 바닥에 쳐박힐 운명임을 직감해버리고 만다.
단 한순간도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쇠퇴할 뿐인 반신은 그렇게 자신보다 먼저 생명을 띄웠던
테라시아를 기억했다.
"왜... 왜 나는 안되는거냐! 나는 너희에게 은총을 내렸고! 너희의 욕망을 긍정했다!
자유를 가르쳤고! 오직 신앙만을 대가로 받았다! 모든것이 좋았을텐데! 어째서냐!
왜 아직도 발 아래 기고 있는 너희 벌레들이 어느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거냐!"
"고드름은 아래로 떨어질 운명이고, 결국 해가 떠오르면 녹아 없어지는거다."
"그 해가... 해가 날 막아선다... 그 해가... 왜!!"
빠득 소리를 내며 깨지기 시작한 신의 심장에서 푸른 빛이 연기와 같이 스며나온다.
"이 기록은 너에게 벅찼던 모양이구나."
"안돼... 안돼!!!"
다르말록은 뛰쳐나오듯 만데라파 호를 뒤집어 엎고 솟구친다.
그리고 다르말록의 오랜 시간 녹슬었던 몸이 일어선다.
푸른 색으로 날아가던 기록을 억지로 다시 몸으로 끌어안은 채로.
거대한 눈이 달린 구체, 그리고 거대한 손이 세 쌍 달려, 공중에 부유하는 형태.
그 아래로 촉수와 같은 것들이 꾸물대며 지상을 흩었고, 쓸어내는 것은 생명력이었다.
죽음을 흩뿌리듯 휘젓는 촉수와 앞으로 나아가는 몸체를 바라보며
멜타이트 역시 씨익 웃는다.
정령왕. 그 존재는 모든 정령의 합과 같다. 정령이 존재하는 이상 죽지 않으며
정령은 그가 존재하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몸은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그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곧 정령 그 자체이고, 정의 반쪽이었던 거인이다.
다르말록의 사지를 꽉 틀어잡고 바다 한가운데로 내리찍은 모습은 허우적대는 것 같은
불쾌하고 진득한 무언가를 억지로 씻기는 것 같았다.
연녹색 빛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그보다 거대한 눈이 달린 촉수를 내리꽂았다.
그리고 동시에 바다 한구석이 붉어진다.
"내가 뭘 하겠다고 이렇게 모은건데, 맛은 보고 가야지.
안그렇습니까?"
한구석에서 점점 퍼져가는 붉은 빛. 바닷물을 피로 바꾸고 있었다.
바다는 빠른 속도로 피로 뒤덮히고, 그 중앙에 빠져든 다르말록에게 닿는다.
"피는 곧 생명이고, 생명은 곧 그 존재지.
내가 환생하고 에스트로로 태어나기까지 걸린 시간 1723년.
25000년 동안 모아온 피와 생명 763억 9421만 2431명의 생명은 결코 가볍지 않을거다."
에리아가 존재하지 않은 시간. 구원받을 수 없었던 남자는 오로지 복수에 칼을 갈았다.
지킬 대상도 사라져버렸으며 그를 구원할 대상도 없었고, 그를 사랑해준 이도 없다.
그 오랜 시간을 견딘 것은 오직 대량학살 뿐이었다.
교국에서도 유레크로스에서도, 전역에서 그저 공포로 불린 뱀파이어는
악명이 퍼져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피로 뒤덮인 바다에서 꾸물대며 신음하는 죽어간 생명들의 절규는 꾸덕하게 늘어붙는 것처럼
다르말록을 옥죄고 있었다.
"공멸하자 다르말록!"
"멜타이트... 이 쓰레기가...! 감히 날..!"
빈틈이 늘어간다.
기록을 아무리 건드려도 본질적인 무언가가 없다.
다르말록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록은 곧 차원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
차원이 빠져 사라지고 나면, 그저 단어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그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치명적인 패인으로 다가오는 것.
신을 만든다는 원초적 조건. 미지의 공포, 그것이 지금 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아르간티아가 떨어진다.
그 주먹이 거대한 눈을 부순다.
"아직...아직이다... 아직...!"
다르말록의 발악과 절규에 소름끼치는 소음이 퍼진다.
교국, 미리타엔, 유레크로스 할 것 없이 다르말록의 존재를 확실히 마주한다.
존재하는 것 만으로, 그저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 만으로 강해지는 것.
그것이 신이었다.
그 신격이 만들어내는 절망과 공포는 다시 그를 강화하는 촉진제와 같았다.
아무리 해도 닿지 못할 것 같은 그 순간이었다.
딱 한번. 한번의 기적이 절실하던 때, 모두가 눈을 감고 그 끝을 희망할 때.
"삐이익!"
하늘 위로 날아드는 반찍임. 무언가 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아래로 뛰어드는 존재.
너무나 희다. 그리고 맑다.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던, 그리고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이,
덩어리져 그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마력이다.
아주 따스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온기로.
다르말록의 주위를 부유하던 사기를 한번에 씻어내듯 몰아낸다.
쾅 소리를 내며 그 머리위로 착륙한 여자의 존재에 당황한 아르간티아가 묻는다.
"ㄷ...당신은...?"
"사상 최악의 마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에리아는 아르간티아에게 마력을 전해준다.
생명, 빛, 그리고 순수한 모든 것.
그리고 확실히 보이는 한 점.
다르말록의 눈 아래로 크게 이어지는 선으로 번지고,
아르간티아가 그 점을 다시 주먹으로 때려부술 때, 갈라지는 것은 면으로 번진다.
번지는 기록이 공기중으로 흩어진다.
그 기록을 향해 손을 뻗는 에리아는 오랜 시간 그래왔던 것처럼. 아주 능숙하게,
점을 찍는다. 시작을 알리듯 찍힌 점에 기록 자체가 와해되어 부서진다.
"기록은 절대적이지 않아."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한다. 어느새 하늘을 빛내던 금빛 용 역시 에리아의 옆으로 내려앉는다.
모두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다르말록은 네가 잡은거야 아르간티아."
그렇게 말하는 여성에게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아르간티아를 뒤로하고
에리아는 그 뒤로 나아간다. 피로 덮인 바다위를 마치 땅 위처럼 걸었고,
그 뒤로 거대한 천각룡이 따른다.
멸종되었다고 전해진 용을 길들인 그녀의 행방은 당연히 주목을 모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바다를 건너 멍 하니 선 남자를 바라보고 눈물 한방울을 흘리더니
그대로 악명 높은 범죄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다녀왔어."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에스트로는
눈만 깜빡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다.
난데없는 상황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그녀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하던 에스트로가 눈을 감고
그녀를 마주 안으며 혀를 섞기 시작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혀를 섞던 둘의 입이 떨어지고 나서 마녀가 말했다.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해."
"루트 8147점이나 받았는데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고 에스트로는 씩 웃어보인다.
키스에 섞인 마력. 거기 담긴 기억. 에리아가 이루어낸 모든 것들.
그리고 그녀가 고생했던 시간을 담았다.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에스트로는 웃음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품에 안긴 여자를 믿었다.
자신의 확실한 기억보다 마력에 담긴 그녀의 기억을 믿었다.
그 믿음은 견고하고 순수하게 남았다. 왠지 모르게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에 멋쩍게 웃는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 같은 시간이었으니까.
자신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신보다 눈 앞의 작은 여자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걸, 알아버렸다.
"고생했어. 에리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