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인간의 시대
* * *
다르말록이 쓰러지며 뱉어낸 기록들이 부서진다.
불가능이라 믿었던 단어들은 가루처럼 흩날렸고, 하늘을 수놓듯 흩날렸다.
절대 완전해질 수 없는 기적은 그들에게 더이상 범접할 수 없는 공포가 아니었다.
기록을 아는 이들에게도, 기록을 몰랐던 이들에게도 그 순간은 한없이 놀라운
신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르말록이라는 신을 죽인 시점에서 공포는
그들에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호기심의 원동력이 되었다.
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믿어왔던 진리마저 부서지고 만다는 사실.
그러나 동시에 의지할 대상을 잃었다는 상실감 역시 그 빈자리를 적적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들이 마주한 것은 원죄를 쌓은 이들이었다.
거대한 정령과 바다를 물들이는 뱀파이어, 신을 부순 남자와 빛으로 하늘을 덮은 여자.
그 조합은 낯섦과 동시에 그들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처음 입으로 꺼낸 사람이 나타나면 걷잡을 수 없게 사고는 이어진다.
"아르간티아..."
그 말이 기폭제가 된 듯 모두가 하나같이 아르간티아의 이름을 외쳤다.
"아르간티아! 아르간티아! 아르간티아!"
이제껏 아르간티아와 가깝다고 여긴 교국의 신도들은 실체를 알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교국은 교황과 왕 모두를 잃었다. 잘못된 믿음의 대가는 혹독했다.
교회의 악행을 설명하지 못하는 사제들과 상위층이 비어버린 집단의 도망자들은
시민으로 섞이며 도망치는 꼴 밖에 할 수 없었다.
미리타엔도 비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신에 대한 거부감과 다르말록에 대한 혐오.
신에게 종속되었던 이들이 희생되었다.
데레코즈라는 이름을 안고 있었던 대공의 죽음과 광신도로 인한 피해,
연구실의 피해와 엘프들의 반파까지. 가깝게만 보더라도 상당한 전력의 손실이었다.
더 새로운 무언가를 들여와야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유레크로스는 이제껏 다르말록과 교국이 가려왔던 진실을 마주한다.
이제껏 자신들이 추적해온 마녀들과 악마가 다르말록을 뒤엎어버린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목격해야 했고, 교회는 처음으로 오판을 인정해야 했다.
유레크로스에서는 정식으로 교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엠페레스는 직접적으로 휘말린 국가였고, 수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보았다.
예술가였던 이들은 교국에서 유포한 마약으로 인해 뒹굴고 있었고,
경기의 침체로 인한 불경기는 심화되었으며, 아직 모건이 했던 폭로의 여파도 끝나지 않았는데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며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고 있었다.
종교는 사람들의 믿음만을 잡고 있던 것이 아니다.
처음 아르간티아 초국이 생겼을 당시부터 손으로 붙들던 것이 자신들의 목줄임을
이들은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신화로 남아오던 과거의 믿음으로 회귀하기 시작한다.
신의 죽음으로 모든것이 부질없다 믿은 순간부터 말이다.
교국의 학자 하나가 말했다.
"아르간티아시여! 당신을 뵙습니다!
무지했던 우리가 당신을 배척한 것을 용서하시고 부디 다시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우리는 보았습니다! 당신이 진짜 신이라는 것을!
당신이 그리는 인간의 길에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르간티아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품으며 다르말록을 내려다보았다.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저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저는 당신들을 이끌 재목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당신입니다!
지금도 불가능에 대항한 것은 당신이고, 행동한 것도 당신이며!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든 것도 당신입니다 아르간티아!"
"그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능성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은 당신뿐입니다! 이제 의지할 곳은 당신 뿐입니다!"
"무능한 신과 전능한 인간 중에 누구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르말록보다 당신을...!"
그 말은 끊겼다.
아르간티아의 눈을 마주한 순간 이어지지 않는 말에 입을 닫은 것이다.
"무능한 신과 전능한 인간 중에 누구를 믿을텐가?"
다시 단정적으로 묻는 어조.
"인간의... 가능성을 믿겠습니다..."
아르간티아는 빙그레 웃으며 화답했다.
"지켜보겠습니다. 늘 그랫던 것처럼."
에스트로가 그 모습을 보면서 픽 웃는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실컷 즐기고 계시네요."
"인간의 일이거든요. 악마는 이해하지 못하는게 당연합니다."
둘 사이의 연결점은 조금 많이 변해 있었다.
헬브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르간티아에게 에리아라는 접점이 없다면
에스트로는 그저 살인귀일 뿐이었으니까.
"인간이었던 시절이 없어서. 어째 기억하던 때보다 성격이 나빠졌어 아르간티아?"
그걸 제지한게 나였다.
"에스트로. 그만."
"아, 그...그래... 미안해."
그 모습에 웃음을 잔뜩 품은 아르간티아가 되묻는다.
"그래서 그쪽 분은 누구신가요?"
에스트로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묻는다.
"저 친구한테도 마력을 옮길거야?"
"아니, 넌 흑요석 반지가 있었으니까 가능했던거야.
자신을 잃지 않으니까. 그리고 기억이 혼재되지 않으니까.
내 기억을 받아들이고 미치지 않는건 너밖에 없을거야."
"하긴, 기억에도 없던 아내랑 딸이 갑자기 나오면 미칠 만도 하지."
"그래서, 싫어?"
"너무 좋아."
"그래?"
"아무도 없는 줄 알았거든. 26000년 동안 날 사랑해준 사람이 있었다는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를 걸?"
"오늘따라 귀여운 말을 많이 하네."
"나도 내가 이렇게 귀여운 남자인줄 몰랐어."
나는 아르간티아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냥, 이 남자 마누라에요."
벙 찐 아르간티아를 보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희 부부는 여기서 실례할게요.
고마웠어요."
나는 에스트로와 삐삐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돌아갈 곳은 없었지만 할 일은 많았다.
우선 먼저 교국 바닥에 쓰러진 초라한 남자의 사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게 그 체헤게군."
에스트로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편히 쉴 수 있기를."
나는 그 뜬 눈을 감기고, 그를 조용히 마력으로 덮어 묻어주었다.
하늘하늘 마력이 퍼져가고, 그 아래 있던 남자는 흔적 없이 사라져있었다.
"기어이, 잡고 싶어했던 마녀를 역사에서 지워버렸어.
축하해. 소원대로 됐네. 네가 시작이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의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미리타엔으로 돌아가면서 바라본 세상은 내가 있었을 때보다
더 평화로워 보였고 더 조용해 보여서, 정말 결심이 확실히 섰다.
미리타엔의 국경 성문을 바라보고 처음 이 문을 넘었던 것도 생각하니
왠지 픽 웃음이 나왔다.
삐삐는 폴리모프를 한 채로 내 옆에 붙어서 나란히 손을 잡고 있었고,
에스트로는 먼저 가서 블러드엘프들의 상태를 봐야겠다고 말했다.
내가 이어주지 않았더라도 엘프들은 그를 만나 강해지겠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좋은 일이었다. 또 에스트로를 미리타엔에서 만나지 못하게 되면 골치아픈 일이니까.
에스트로가 먼저 들어간 이후 내가 미리타엔으로 들어서면 기다렸다는 듯
노예시장의 브로커들이 달라붙는다.
"아가씨, 미리타엔은 처음이신가?"
"언니! 숙소는 잡았어?"
그렇게 들리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걸으면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집적거리고 나와. 술 마시는데 방해된다."
"검...검은 망토다..!"
누군가 그 별명을 말하면 내게 접근하던 이들의 시선이 뒤로 돌아간다.
술잔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목을 축이고 있는 모습을 저지하는 이는 없다.
도리어 취한 그 목소리에 다들 주춤대며 뒤로 물러난다.
"구스온...?"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나를 슥 돌아보며 묻는다.
"날 아나?"
내가 죽였던 사람인데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사라지고 그의 운명또한 변한 것이겠지.
그의 애인이 내 가게에 찾아와 푸념을 늘어놓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를 살아서, 이렇게 적대하지 않은 채로 다시 마주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아주 낯선 일이었다.
내가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띄우면 그는 내 눈을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강하구나. 나와 다르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지나쳐 뒤로 걸었다.
익숙한 거리. 내 상담소가 있었던 곳으로, 그 골목으로 걸었다.
아마 상담소는 이미 그 자리에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로변을 따라 걸으면 내가 잘 아는 그 공간에 한 명의 여성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발레리아였다.
"발레리아 이모...?"
삐삐가 먼저 반응하고 달려나가자 발레리아는 삐삐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어서오세요!"
삐삐는 당연히 발레리아를 알지만, 발레리아는 그저 손님을 응대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일 뿐이다.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나는 발레리아가 하고 있는 가게의 간판을 보았다.
카페였다. 나는 삐삐의 옆자리에 앉아서 발레리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생명을 연장하지 않아서인지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아마 시한부라는 걸 알면서도 여기서 일하면서 게비디를 기다리는 거겠지.
"저기요."
"네, 주문하시겠어요?"
"고화수 한 잔 주시겠어요?"
내 주문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고화수요..?"
나는 빙그레 웃고 그 레시피를 설명했다.
내 말을 잠자코 듣던 발레리아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 재료가 없는데요... 테즈불이 없어요..."
"마침 제가 가지고 있네요."
나는 가방에서 오래 전 받았던 테즈불을 꺼냈다.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이에게 받은 것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에게 선물한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저었다.
"이걸 받을 수는 없어요..."
"받아주세요."
나는 그 손을 마주잡고 조심스레 마력을 흘려넣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그녀도 당황한 것 같았지만, 내가 손을 놓지 않자
당황하면서도 결국 몸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 같다.
내가 약속한 것들은 지켜줘야 했다.
"맛있게, 만들어주세요 발레리아."
"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서 삐삐도 코코아를 주문했다.
마쉬멜로우를 녹여달라는 요청도 함께.
그리고 음료가 나오기까지는 30여 분이 걸렸다.
고화수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레시피를 충실히 따르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하번 설명한 것 뿐인데 능숙하게 만들어온 것으로 보아 역시 천재는 천재였다.
그녀는 나와 삐삐에게 잔을 내밀고 그 앞에 앉아 물었다.
"그럼 이제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뭘 듣고 싶은데요?"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죠?
그리고, 고화수는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음료수가 아니던데요."
"그냥, 오랜 시간 당신을 지켜본 사람일 뿐이에요."
"저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에요...?"
"아마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상당히 많이요.
오늘 찾은 이유는 그냥 당신이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건강상태를 점검했으니까 한동안 꽤 오래 살 수 있을거에요."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나한테 뭘 바라는 거죠?"
"그냥, 언젠가 죽기 전에,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주겠다고 말해줘요."
"죽기 전에요?"
"정확히는 죽은 후에죠.
오늘 온건 그 이야기에 대해 확답을 듣기 위해서에요."
"날 죽일 생각이에요?"
"그런 거였다면 몸을 고쳐주지 않았겠죠.
알고 있잖아요. 유전자 조작과 약물 남용으로 수명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던 것.
앞으로 적어도 40년은 더 살 수 있을거에요.
그 몸의 한계가 그정도였어요. 당신이라면 누가 위협한다고 해서 쉽게 당하지도 않을테고.
그냥 행복한 삶을 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죽고 나서, 누가 물어보면
제가 찾고 있다고만 말해주세요."
"당신이 찾고 있다고요?"
"네. 그러면 알아서 안내해 줄거에요.
그 몸에 채워놓은 내 마력을 봐서 말이죠."
나는 잔을 비우고 화끈하게 붓는 목을 쓰다듬었다.
고화수를 왜 마시는지 알 것 같았다.
아주 고급스러운 향, 그리고 목에서 피어오르는 고통.
추억은 아주 감미롭게 다가와서 상처를 만들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화수는 ???, 목메이는 고통을 거두어들인다는 이름이었다.
거 이름 참 잘 지었다.
내 고통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마 그도 비슷한 이유로 나에게 고화수를 주문한 것이겠지만.
잘 사는 걸 봤으니 됐다.
나는 웃으며 가방에서 책을 여러 권 꺼냈다.
"선물이에요."
"네? 대체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나중에 알게 되실 거에요."
데릭이 남긴 책과 뼈의 저택에서 챙겨온 과거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내가 정리한 미리타엔의 연구소에 낼 목적이었던 보고서들도 있었다.
삐삐 역시 차분하게 코코아를 다 마시고 나서 빈 잔을 앞으로 밀었다.
"이모, 다음에 또 코코아 타줘! 기다릴게!"
"ㄴ... 네..."
어리둥절한 모습을 한 발레리아를 뒤로하고 가게를 나왔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래서는 망설임만 늦출 뿐이었다.
과감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게비디와 플로라는 만나지 않았다.
머뭇거릴 것 같아서, 다시 현실에 안주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테니까.
내가 끼어들 틈은 이제 없는 거니까.
개인적으로 조사해보니 이곳에서 플로라는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본격적으로 각성해, 마력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악마와 계약을 했다.
그리고 그 악마가 바로 미리타엔에서 죽은 앤이 환생한 것이었다.
여전히 검은 고양이를 기르는 가학의 여제는 같았던 것이다.
어색하게 웃었지만 결국 그 큰 흐름은 변하지 않은 듯 해서
괜히 더 씁쓸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게비디는 여전히 콜로세움에서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지 않아도 크게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나를 대신해 인정할만한 사람을 꾸준히 콜로세움에서 찾는 모양이었다.
나를 처음 발견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무령으로 만들어 보였던
그 열정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인재를 찾고 있었다.
에스트로와 다시 합류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인사는 다 했고?"
"그럼. 여기서도 사실 나는 겉돌던 느낌이 강했으니까.
내가 널 두고 어떻게 혼자 남아있겠어."
"말하는 것 좀 봐. 너 진짜 나랑 같이 추방당했던 것 같다?"
"그랬으면 네가 말하는 이야기들을 겪고, 함께 지낸 기억들이 있었을텐데."
"네가 날 찾아준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그런걸 신경써. 이제 만났잖아?"
"그렇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삐삐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한다.
"파파, 업어줘."
"그럼, 업어줘야지."
에스트로의 등에 폴짝 뛰어오른 삐삐를 업어주면
그제서야 편안한지 삐삐는 눈을 감는다.
"이제 어디로 갈거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인식저해가 걸렸던 그 쥐색 후드다.
이제 이것도 쓸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유레크로스로 내려갔고, 콜린으로 향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불이 들어온 작은 집. 얼핏 보면 별다를 것 없는 기름냄새 나는 그 집의 창문을 바라본다.
콜린에서, 나를 만나지 않아서. 그래서 여전히 티격태격대며 말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먹먹한 가슴을 끌어안았다.
"아 또 그 미친년이야? 그냥 무시하라니까!"
"그래도 나랑 겨룰 정도로 몇 안되는 실력자였잖나.
미친년이라는 말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아니 그 헤세리티는 왜 유부남한테 자꾸 편지를 보내?
남의 인생 조지는게 취미래?"
"허허, 대장간으로 돌아오라는군. 이번에도 별다른 내용은 없으니
내 선에서 찾아가지 않으면 그만이지. 아, 결혼... 축하한다는군?"
그렇게 말하며 마르커스가 편지안에서 꺼내든 반지는 금, 다이아몬드 따위가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보석 반지였다. 내가 알던 세상과 너무 달라서
괜히 정말 내가 만악의 원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릿한 미소 끝에 철맛이 섞였다.
"마마, 저 사람들이 누군데 그래? 아, 저 여자는 알아. 헬렌이지?"
"응."
"옆에 있는 사람은...?"
"마르커스라고 하는 사람이야. 엄마가 만든 헬라레소라는 커피를 좋아했어."
"인사... 하고 올래?"
"아냐, 됐어. 저대로가 좋아."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 뒤에서 웃으며 파이를 구워 나오는 재클리나가 보인다.
결국 세 명이 모인 모양이었다.
그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잘됐네."
다시 이동했다.
셰릴 린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버리며, 이제 없던 사람으로 취급된 것 같았다.
유레크로스에서는 교회만 살짝 훔쳐보는 것으로 끝냈다.
내 존재를 눈치채고 달려나온 꼬마를 피해 몸을 숨겼다.
여전히 애 같지 않은 꼬마였다.
데니스는 분명 일을 낼 것 같은 재목이다.
달려나온 데니스의 뒤를 따라나온 제임스가 데니스를 안아들고 말했다.
"왜 또 밖을 나오셨을까. 공부하기 싫은건 알겠다만은, 오늘은 어떤 핑계를 댈 거니?"
"누가 분명 교회 안쪽을 훔쳐보고 있었다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선생님도 다 안다. 들어가서 공부할까?"
"아니 변명이 아니라요! 그리고 저 공부 오늘치 다 했거든요?!
진짜 지친다니까요! 누가 11살 짜리한테 10시간을 논스톱으로 공부를 시켜요!"
"배움에는 끝이 없는 거다 데니스."
"신부님!!"
그렇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나는 발을 돌렸다.
"다 본 것 같네."
"이제 미련 없어?"
에스트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네 계획은 들었지만 너무 무모하지 않아? 마력이 없는 세계로 가겠다니."
"괜찮아. 차원 이동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한 세계에서만 사는건 낭비지.
그리고, 마녀가 그런 거 아니겠어? 쫒기는것도 익숙하거든.
애초에 맨 처음 느꼈던 것도 그거였고."
"뭔데?"
"아주 평화로운 세상에서, 더는 쫒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유롭게 지내는 삶."
"후... 그래, 그럼 출발할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라본 풍경은 말 그대로 아르간티아가 바랐던 모습이었다.
인간의 가능성이 충만한 인간의 시대.
그래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떻게 해도 이기지 못했던
인간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내가 오랜 시간 지낸 산 속의 낡은 나무집이 있던 공간.
아무도 살지 않아 풀이 우거진 빈 공간에 생기는 백색 차원문.
정말 '차원' 문으로 작동하는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삐삐와 에스트로의 손을 잡았다.
"가자."
그리고 나는 그 밝은 빛 속으로 들어갔다.
"빵빵!"
눈 앞에 보이는 건 처음 서지스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모습.
석유 잔여물로 깔린 바닥, 그리고 사람들.
저마다 손에 작은 기계를 들고 걷는 모습과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
그리고 고층으로 늘어선 빌딩들.
당황한 것은 삐삐와 에스트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까 내 앞으로 네모난 거대 차량이 멈춰선다.
"거 아가씨! 안 타실거에요?"
"네..?"
"버스 안타시냐고!"
"어...버스요...? 네, 죄송합니다."
푸시식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버스라고 부른 차량이 멀어져간다.
뒤를 돌아보면 거대한 건물이 있다.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에 통역마법을 사용한다.
[중앙대 병원]
"재밌는 곳으로 온 것 같네."
새로운 곳으로 도전하는, 붉은 여왕의 옷자락을 붙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마녀의 또 다른 모험이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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