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302화 (302/303)

〈 302화 〉 외전) 황제의 우울

* * *

"문득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야옹."

무릎 위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플로라가 말했다.

방에는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음에도

플로라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조용히 고양이 애니의 귓가에 대고 말한다.

"나 여자가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나면 고양이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들어 플로라의 팔을 한번 핥더니

다시 몸에 힘을 빼고 무릎 위에 몸을 말고 축 늘어진다.

"아니, 그렇게 대충 넘길게 아니라..."

이미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축 늘어진 고양이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들고

작게 울더니 가르릉대며 꼬리만 흔들 뿐이었다.

"내가 널 만나기 이전에 여자 노예를 많이 사 봤거든. 그리고 뭐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황궁에도 여자가 많이 있잖아?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보다 더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래도 뭔가 아쉽단 말이야. 아쉽다랄까? 완벽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잘 없는 것 같아.

아무래도 이상이라 그런 걸까?"

그렇게 말하고 플로라는 화려한 자신의 침대에 폭 드러누웠다.

은빛 머리칼이 침대 위로 흐트러진다.

검은 시스루 네글리제의 옷 사이로 한껏 부푼 가슴을 한쪽 팔로 가리면서

플로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물론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여긴 미라타엔이잖아?

아이야 뭐 연구소에서 만들면 되는거고. 유전자 반반씩 섞어서.

내가 뭐 때문에 비싼 돈 주고 걔들을 거기 앉혀놓고 관리시키는데?"

"야옹."

팍 하고 앞발을 날려 실없는 소리를 하는 황제의 이마를 때린다.

말랑말랑한 육구가 이마위로 폭신하게 얹힌다.

"어휴... 알아 나도. 그래도 개인적인 소망 같은건 있는 법이잖아?"

"애옹..."

"너 자꾸 이럴거야? 난 너를 믿고 이야기해 준거란 말야."

애니는 말 대신 사뿐하게 침대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몸을 둥글게 만 채로

플로라를 올려다보며 하품을 했다.

바닥에 퍼져있던 그림자들이 한곳으로 퍼져간다.

화들짝 놀란 플로라는 곧장 침대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 후에 이불로 제 몸을 둘둘 말아 가리고는,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옷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잖아!"

"...."

시선을 피한 채로 앞발을 쭉 뻗어 뒤로 엉덩이를 쭉 뺀 애니는 꼬리를 살랑이더니

폴짝 뛰어 자신을 위해 준비된 쿠션 위로 몸을 얹는다.

"알았어 미안해 애니. 내가 변태같은 소릴 했어.

옷은 돌려줘. 나 네가 만들어준 그림자 옷 아니면 잠을 못 잔단 말이야.

너도 알잖아. 널 데려오고 나서 내가 옷이라고 있던 건 대부분 버려버린 거.

나도 알아. 그렇게 보지 마."

"애옹."

그제서야 플로라를 돌아본 애니는 다시 사르륵 그림자를 모아 그녀에게 옷을 만들어준다.

애니가 만드는 그림자만큼 부드럽고 가벼운 옷감은 없었으니

한번 체감하고 난 이후로 플로라는 다른 옷은 잘 입지 않았다.

더러워지거나 때가 타지도 않았고, 디자인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다.

너무 과격할 때는 하악질을 하며 놀란 애니가 반발하는 탓에 포기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플로라는 애니의 그림자 옷을 애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애니, 들어봐. 내 머리색은 은색이잖아?"

"냥?"

"그러니까 금빛 머리칼이었으면 좋겠어. 음, 적어도 웨이브는 조금 들어간 단발?

내가 긴 생머리잖아. 그리고... 음, 나랑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지적이었으면 좋겠고...

가슴은 좀 작아도 돼. 음, 아니지... 가슴은 작은게 좋겠다. 큰건 나 하나면 충분하잖아?

그리고 너무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알잖아. 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은 정말 많이 휘둘리고 지쳤던 거.

엄마도 얼마 안 있다가 가셨으니까. 그런 쪽으로는 예민해서."

애니는 조용히 플로라의 옆으로 다가와 옆구리에 머리를 비비적대며 앉는다.

플로라가 애니를 들어 다시 끌어안고 그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면 기분이 좋은지

낮게 갸릉대다가 귀를 쫑긋거린다.

"유능한 비서? 아니면 연구원 같은 거면 더 좋을 것 같아.

그래야 유전자를 반씩 섞어서... 아... 미안해 애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바라는 욕망은 그런건데.

너도 알다시피 욕망을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어.

그리고, 내가 절제하는 상대도 너 뿐이잖아.

그러니까 이정도는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황제라고.

내가 살면서 이제 누구 눈치를 보겠어? 너 말고는 없단 말이야."

"야옹."

"아무튼...! 원하는 건 그런거였어.

그리고 음... 내가 생각하기에 날 이끌 수 있는 매력있는 사람?

나를 이끌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아주, 아주 다재다능해야겠네.

아! 홍차도 좋아했으면 좋겠어. 얼마전에 홍차를 새로 납품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 상인은 입맛이 싸구려인지, 아니면 날 우롱하려고 했던 건지. 너도 알지?

그래, 그 절반 이상은 버린 홍차. 정말 최악이었어.

짜증이 나서 바로 속박마법을 걸고 화가 풀릴 때까지 그 홍차를 먹였었지?

처음에는 궁 바닥에 오줌을 싸길래 옷을 벗겨 닦게 만들었다가,

나중에는 더이상 게워낼 게 없을 때까지 토해서, 입으로, 코로, 홍차만 줄줄 흘리다가

결국 식품 사업을 접어버린 그 바보같은 여자 말이야."

"야옹..."

"너무했다고? 하지만 어떡해. 그정도는 해야 더이상 거지 같은 홍차를 진상하지 않을텐데.

덕분에 담배랑 마약보다 홍차값이 비싸져버린건 안타깝지만."

"애옹. 애~애옹"

"뭐? 홍차든 뭐든 다 좋으니까 네가 마실 우유를 밀크티로 만들지 말아달라고?

너... 그런 말 하니까 꼭 진짜 고양이 같다?"

"캬악!"

"알았어... 진짜 고양이지 뭐. 못 먹는 것도 없으면서 까탈스럽게.

너도 처음엔 좋아했잖아?"

"애옹! 애~옹."

"아, 넉달 내내 밀크티를 달라는 말은 아니었다고?

알았어. 앞으로 밀크티는 뺄게. 이러다가 정말 삐쳐서 한동안 알몸으로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몰라?

아무튼 그런 여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지 내 말은.

그렇다고 나처럼 권력에 욕심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다시피 이 자리는 꽤 피곤하기도 하고,

결국 권력은 언제 내 등을 치게 만들지 모르니까.

사실 그런 거 없어도 나랑 같이 다니면 서운하지 않게 챙겨줄테니까?"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고 꺄르르 웃었다.

이런 모습만 보면 정말 영락없는 소녀였다.

그렇게 웃다가도 금새 베시시 웃으면서 몸을 베베 꼬고는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넣는다.

"아, 생각했더니 달아올랐어."

애니는 잽싸게 옆으로 몸을 피한다.

플로라가 이런 반응을 보일때 주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막 일을 끝낸 손으로 쓰다듬어져 털이 축축하게 젖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으면서 몸에 힘은 빠져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애니를 부둥켜안고 마구 쓰다듬으며 여운을 즐길게 뻔했다.

순진하게 생겨서 성욕은 그렇지 않은지 어떤 날은 정말 한나절을 몰두할 때도 있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천재라는 수식어가 모자라지 않은 그녀라서인지,

결국 일에 차질이 생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애니는 그럴 때마다 착잡한 심정으로 이불 끝을 물고 조심스레 그녀에게 덮어주곤 했다.

침대 옆에 준비된 수건과 프레그런스 오일로 손을 닦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애니도 그녀의 말에 무감각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플로라가 믿고 따를 만한,

그리고 여차할때 자신을 대신해 플로라를 중재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플로라 대신 알아채줄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플로라는 가끔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것들을 배제할 정도로

잔혹해지고 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생기기야 한다면야 플로라가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니가 바라기를 그런 일을 맡을 사람은 적어도 40살은 넘은,

인생을 어느정도 겪은 사람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아주 어렵고 또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아주 절륜해서 플로라의 성욕을 모두 받아낼 수 있거나,

아주 순수해서 성욕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할 것이다.

나이가 40이 넘는 사람이 위 조건을 모두 만족할 경우는 정말 플로라를 위해 내려온 천사라도 되지 않은 이상,

절대로 없으리라 생각하며 애니는 조용히 쿠션위에 몸을 뉘였다.

하지만, 만약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어쩌면 플로라보다 자신이 더 의지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애니는 분명 알고 있었다.

미리타엔이라는 나라는 아주 일그러진 윤리의식을 가진 국가다.

이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어쩌면 영영 바뀌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만약 플로라에게 정말 바라는 이상형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플로라를 개화시키는데 성공했다면,

정말 이 나라는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곧 머리를 털어내며

애니는 이 나라는 이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고,

어느새 손에 들어온 이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피어오른다.

아직 걱정이 많아서 문제였다.

애니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뺨을 붉게 물들이고 백옥같은 피부를 적시며

허리를 과격하게 흔들고있는 플로라를 바라보며 한숨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게 어쩌면 제일 어울리는 약간의 모자람, 여백의 미가 아니겠느냐며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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