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303화 (303/303)

〈 303화 〉 외전) 내가 널 원했거든.

* * *

"그게 뭐야."

시덥잖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입을 샐죽 빼고 투덜댄 꼬마는 영 이야기의 결말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 믿고 말고는 네 마음이지만 말이야.

믿어서 손해보지는 않지?

어차피 한 몇 년 지나면 까먹을텐데 적당히 넘겨도 돼.

네 기억력을 그렇게 믿지는 않으니까."

"누나 혹시 소설가야?"

"아니."

"그럼 어디 방송작가라도 되는거야?"

"그것도 아니."

"그럼 어디서 본 거야?"

"아냐."

옅은 미소가 이어진다.

"그래도 책으로 내면 재밌겠다. 웹소설 같은거 요즘 잘나가잖아.

웹툰으로 내도 될 거같은데.

별점 1점에 무플 받고 1달만에 조기 연중하면 딱이겠다."

"맞는다?"

"아니 근데 진짜 책으로 내면 잘팔릴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냄비 받침 정도로는 하나 살게! 두껍게 나오게 많이 써서 내."

"그래도 뭐 아무한테나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굳이 책같은 걸로 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지금은 변했다지만, 이야기 했다시피 나는 좋은 사람도 아니었잖아. 자랑할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냄비받침으로 쓴다는데 굳이 내고 싶지도 않고.

누가 만약에 진지하게 읽어본다고 하면 그것도 문제고."

"에이, 그걸 누가 믿어. 픽션이지. 나이가 3만6천 3백살이 넘었다는 말을 진지하게 믿는 바보가 있으려고?"

"누가 한명이라도 믿었다간 또 쫒겨다녔을걸?

나 도망다니는 건 별로 안좋아해.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냥 내가 다 쓸어버리는게 편할것 같아."

"흑염룡 뭐 그런거야?"

"흑염룡은 아니지만 용도 한마리 있기는 해."

"또 또 그런다. 허언증 심하네."

"뭐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라니까?"

"외국인은 다들 그렇게 거짓말을 잘해?"

"아니."

"그럼 마술이라도 보여주고 믿으라고 하든가!"

"마술? 보고싶어?"

"응."

"무슨 마술? 뭐 비둘기라도 날려주리?"

"아뇨, 비둘기 그거 어따써.

좀 실용적인게 좋지.

음... 글쎄, 여친 생기면 좋겠다!"

"여자친구?"

"응."

꼬마는 웬일로 눈을 빛내며 그렇게 되물었다.

"할 수 있어? 해주면 믿을게."

"그래 뭐... 해 줄게. 대신 딱 20년만 기다려."

"거짓말쟁이!"

"아냐, 진짜라니까? 앞으로 딱 20년 뒤에 네 여자친구...

아니지, 아내될 사람이 이 세상에 나타날거거든."

"나이차 31살? 말이 돼냐 그게?"

"넌 몰라도 되겠다 꼬마야."

"꼬마 아니야. 나도 이름 있거든?"

"그래. 너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말해준 적 없는데."

"이름 뭐냐고. 한대 맞을래?"

괜히 주먹을 들어보이는 시늉을 하면 꼬마는그제서야 이름을 대답했다.

"류진영."

"아, 가만보니까 너 말이 짧아?

아까부터 말이야. 내가 너보다 나이를 먹어도 3만 하고도... 아무튼 많이 먹었어."

"정신병 있어?"

꽈앙. 주먹이 꼬마의 머리에 떨어진다.

별이 보일 정도로 강하게 때린 탓인지

양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문지르면서 꼬마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는

여자를 째려보고 있었다.

"아씨...! 존나아퍼..."

"존나?"

"너무 아퍼..."

"옳지.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류진영이요."

"그래 진영아.

아무튼 여친이고 아내고 간에 이 누나가 알아서 잘 해 뒀으니까,

기다리면 반드시 생겨."

"우리 엄마도 그 소리 했다 뭐. 대학가면 생긴다고?

공부나 하라고 그러면서 내 나이대에 공부해야 한다고 할거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할거거든요?"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 해."

"그 나이차 나는 여자랑 결혼 안할거라고요.

내가 무슨 페도필리아도 아니고. 범죄야 그거."

"하게 되어있어. 나이차는 별로 안나겠지만. 어린 놈의 셰끼가 말이야,

어디서 페도필리아 같은 소리나 배워가지고서는.

아마 너아들도 낳을걸? 아주 말 안듣고 사고만 치는 놈으로다가.

하긴 말 안듣고 사고치는 걸로는 너랑 꼭 닮기야 했다."

그렇게 말하며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몸을 바르르 떠는 여자에게 꼬마는 다시 대들기 시작했다.

"봤어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아요?"

"다~ 보고 왔다~ 안봐도 비디오인걸 굳이 확인까지 해보고 왔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알겠습니다 해.

꼬박꼬박 말대꾸하기는. 뭐 나이차도 얼마 안나는데 부부 금슬도 좋고 할거니까 걱정말고 들어."

"이랬다 저랬다야. 아까는 나이차이가 난다면서요."

"내가 언제?"

"치매에요?"

"시끄러 요 맹꽁아!"

금발머리 여자는 꼬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알아?!"

뒷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삼켰지만 그 눈은 거짓말 같아 보이지 않았는지

꼬마는 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대꾸했다.

"나한테 왜 그러는데요!"

"감사한 줄 알아!"

그렇게 말하고 금발의 여자는 주머니에서 금화를 두 개 꺼내 아이의 손에 올려주었다.

"피해 보상이라고 생각해. 그 이상은 못 줘."

"도금이죠? 누굴 속이려고."

"못믿겠으면 가서 팔아보던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버스 한대가 그들의 앞에 멈춰섰다.

문이 열리고 꼬마가 지갑을 꺼내 들었다.

아마 꼬마가 기다리던 버스였던 모양이었다.

"에이씨... 버스왔다. 나 갈게요. 안녕!"

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정류장에는 여자 혼자만이 앉아있었다.

"참 그 지랄같은 성격 어디 안가네."

그렇게 말하고 여자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면서 여자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마 말해줘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점의 마력을 통해 그녀의 위치를 추적했다.

수백의 차원을 넘나들었고, 수십개의 차원을 지켜보았다.

수백개의 신분과 수천개의 관계속에서 하나의 차원을 찾아 헤맸다.

물론 그녀라고 말한 것은 도망친 마지막 미련을 말하는 것이다.

죽이고 싶었고, 그러지 못했지만 이제는 감정보다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셰릴이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물론 그녀가 도망친 차원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여자는 결국 알아냈다.

아무래도 그 세계는 원래 지내던 세계와 차원문으로 연결되는 빈도가 생각보다 높은 것 같아보였다.

무언가의 유사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찾아낸다는 것은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도 아직 맺지 못한 매듭의 하나였다.

그녀의 위치를, 이 세계를 알아내고 나서

여자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평생 갈 일이 없을 네메시스로 찾아가 거래를 하고한 남자의 영혼을 빼내기도 했다.

영혼을 내 주는 조건으로두번 다시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상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오랜 동료이자, 어쩌면 조금 다른 운명을 가진 오빠였다.

침묵속에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했다.

고작 100년 남짓한 시간에 앞으로의 미래를 건다는 것에 조금은 불쾌했지만,

그녀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스스로가 이제 규격 외의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떤 차원에도 속하지 않고 동시에 어떤 차원에나 속할 수 있는 것은

곧 그 수명을 단죄하지 못함을 의미했다.

이제까지도 그렇게 살아왔지만 죽지 못한다는 것은 마냥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자신에게 그 선언을 담담하게 고하는 이에게

자신이 죽은 이로 여겨진다는 것. 없던 인간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쓰리게 다가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비루한 영혼을 일으켰다.

계약끝에 받아낸 영혼은 과거의 영광에 취한것처럼 비틀거렸다.

그 나이든 마녀 사냥꾼의 영혼을 받아들고 주먹안에 꽉 쥐면서

다시 이 영혼이 자신의 손을 떠나게 한다는 사실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겨우 진정시킨다.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굽힌다.

"쓸모없는거니까. 그래서 버리는 거야."

영혼은 이미 험하게 구른 탓인지 수월하게 운용할 수 있었다.

많이 바라지는 않았다.

그녀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뿐이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 그 둘이 만날 수 있도록 지켜볼 뿐이다.

"건방지게... 내 거였는데..."

한숨을 가볍게 뱉어내고는 다시 입꼬리를 올린다.

많은 것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녀가 도착할 그 세계에, 조금 빨리 왔을뿐이다.

그리고 그 영혼이 품을 기연을 상상하며

한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게 했을 뿐이다.

별 것 아닌 행동같아보이지만, 이건 세계의 가능성을 한 축으로 비틀어버리는 일이었다.

없던 생명이 태어나고, 없었던 인연이 이어졌으며

또한 없었던 사건들이 무수히 탄생한다.

고작 하나의 생명은 그렇게 많은 연결점을 갖는다.

그리고 끝내 그 운명에 따라서 차원을 넘어 그녀와 닿겠지.

여기까지, 40년 걸렸다.

정확히는 41년 3달 하고도 2일.

셰릴이라는 여자가 이 세계에 도착하기까지 정확히 30년 11달 6일.

고작 하나의 커플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세계의 운명을 뒤흔들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원래 자신이 겪을 운명으로 이어진 피와 불꽃, 마법과 저주로 얼룩진 세상이 아닌,

평화롭고 조용한 세상에서 자란 사냥꾼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이의 부모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세계의 뒷면에서 계속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 아이가 입에 담은 말을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한테 왜 그러는데요...라고...? 나한테 왜 그러느냐라...."

버스 정류장을 천천히 떠나는 그녀는 어느새 시야에서 천천히 멀어져갔다.

바람을 타고 작은 목소리만 남아있었다.

"내가 널 원했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