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수련회 밤 (5)
* * *
얼어붙은 바닥 때문에 한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눈꼬리 끝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내 피부에서 얼어붙는다.
죽음에 대한 불안함일까,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함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 때문에 한기 따윈 느끼지 못한 채 오열을 하고 있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내 오열은 하늘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마족에게 닿지 못했다.
[그렇게 오열하는 이유가 뭐지?]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한 소녀를 얼어붙게 만든 투명한 얼음조각을 말이다.
내 시선을 눈치챈 마족이 얼어붙은 소녀 옆에 내려갔다.
[흠.. 이 소녀가 너를 그렇게 분노하게 한 원인인가.]
마족은 얼어붙은 소녀를 쓸어내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가 문제지? 이 소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인 것을.]
그 말에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마족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내가 둘 중 한 명이 희생하면 다른 한 명은 살려준다고 했을 때, 소녀는 자신이 직접 나섰지만 너는 두려움에 아무것도 못 하지 않았나?]
[그런 주제에 분하다는 표정을 짓다니.. 소녀가 잘못된 희생을 한 것 같군.]
그 말을 듣고 나는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이 끊어지며 무작정 달려들었다.
얼음조각에 걸려 넘어져 아픔을 느껴도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거래는 거래니.. 꺼져라.]
하지만 나는 마족의 손짓 한 번에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날려졌고 그 충격 때문에 기절하였다.
정신을 차린 후 바로 일어나 원래 있던 장소를 찾아가보았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바닥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허무함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고 자신의 친구였던 소녀가 희생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이드. 넌 미소를 지어야 인기 많을 스타일이야.]
[뭐..?]
[그냥.. 웃으면서 살아가라고.]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얼어붙어 갔다.
****
숨겨놓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분노가 끓어올랐다.
옆에서 루크가 부른 것 같았지만 지금 끓어오른 화를 잠재우는 것이 먼저였다.
이 사태의 원인이자 화를 표출할만한 것이 마침 근처에 있지 않은가?
시체를 조심히 내려놓은 뒤, 뒤로 돌아 대장급 개체를 바라보았다.
"야, 쉽게 죽지 마라?"
자신은 바닥을 힘껏 차며 통제를 잃은 엔티아노들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대장급 개체를 향해 뛰어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자신을 눈치채지 못한 대장급 개체 머리 쪽에 우선 돌려차기를 박아주었다.
주제에 대장급 개체라는 것일까? 다른 엔티아노들처럼 표피가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이조차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파동]"
박아넣은 발에 마나를 진동시켜 대장급 개체 표피 안쪽에 있는 피부에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에 의한 고통으로 인해 대장급 개체는 머리를 강하게 흔들어 자신을 멀리 떨어뜨렸다.
딱히 어떠한 공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안전하게 착지한 네이드는 앞에서 몸을 떨고 있는 대장급 개체를 볼 수 있었다.
"아직 안 끝났는데."
네이드는 주먹을 든 상태로 자신의 옆 바닥을 내리쳤다.
그로인해 파편들이 튀어나왔고 그 파편들을 잡아챈 후, 파편 하나하나에 마나를 담았다.
"꽤 아플 거야."
한번 파편들을 위로 살짝 던졌다가 다시 잡은 후, 파편들을 대장급개체 관절 사이사이에 박아주었다.
"[파동]"
손가락을 튕기며 능력을 발동시키자 대장급 개체의 다리가 떨리더니 다리로 지탱을 하지 못해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으로 인한 비명은 덤이었다.
"방금 그건 뭐야?"
비명을 듣고 있던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루크가 물었고, 어느 정도 분노를 표출해내었기에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대답을 해주었다.
"내 신기술이야."
"신기술?"
"응, 이전까지는 상대의 마나를 역이용하는 거였다면 [파동]이란 내 마나 자체를 진동시켜 상대에게 충격으로 퍼지게 하는 거야."
네이드는 그리 말하며 쓰러져있는 대장급 개체를 가리켰다.
"내가 아까 던진 파편들 있지?"
"응, 거기다가 전부 [파동]을 사용한 거야?"
"그렇지, 이게 응용법이 좀 많더라고."
네이드는 설명을 끝낸 후 대장급 개체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쓰러져있는 대장급 개체를 내려다보았고 한치에 망설임도 없이 한쪽 발을 들어 대장급 개체의 머리를 힘껏 밟았다.
"[파동]"
파동을 추가한 일격까지 넣어 마무리를 지은 뒤, 남은 엔티아노들을 처리하기 위해 시선을 옮겼을 때는 이미 루크가 다 처리한 후였다.
"아, 이미 서로 공격해서 피가 별로 없길래 그냥 내가 다 죽였어."
"잘했어."
"그럼 이제 다른 애들이랑 합류나 하러 갈까?"
"그러자."
그렇게 두 사람이 청소년 클럽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불길한 마나가 느껴졌다.
그 마나에 반응하여 빠르게 뒤를 돌아보자 둘은 볼 수 있었다.
엔티아노 대장급 개체가 검붉은 색 연기로 변하고 그 연기 안에서 나타난 사람 한명을 말이다.
****
"반즈,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일까?"
"실패작이야."
"실패작이라니?"
"마인이 되지 못한 존재, 그런 존재들을 우리는 실패작이라고 불러."
반즈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실패작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붉은색 눈빛은 마인 이라는 표시지만, 진짜 마인은 저렇게 넋이 나가 있지 않아."
이르벨은 반주에 말을 듣고선 실패작이라는 존재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선명한 붉은색 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어딘가 넋이 나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르벨이 궁금해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도대체 왜 실패작이 대장급 개체에서 나온 건데??"
이르벨은 바로 전에 상황을 떠올렸다.
반즈와 옷가게에서 대장급 개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대장급 개체를 처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예전부터 합을 맞추어왔기에 손쉽게 엔티아노들을 처리하면서 대장급 개체까지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마무리된 대장급 개체가 연기로 바뀌며 그곳에서 실패작이라는 것이 튀어나온 것이 문제다.
이르벨이 실패작을 쳐다보고 있자 반즈가 입을 열었다.
"뭐.. 대충은 알 거 같지 않아?"
"그러네, 그런데 진짜로 이런 게 가능하다고?"
"가능사례가 바로 앞에 있잖아."
"그래. 인정해야겠네."
이르벨은 마나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괴수가 죽는 것을 제물로 삼아 급 높아 보이는 실패작이 나온다는 개소리를 말이야."
"[정령 구현회] [샤이크]"
물로 이루어진 상어가 이르벨옆에 생겨났다.
그것을 본 반즈는 이르벨에게 슬쩍 물었다.
"그거 이제 페널티는 없어?"
그 질문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당연하지, 그 대련 이후로 온종일 물만 마시고, 물만 만지고, 물에 관한 공부만 했다고."
"뭐.. 물론 아직 제대로 인정을 받은 게 아니라 제한시간은 있지만 말이야!"
손짓으로 [샤이크]를 날리자 [샤이크]는 실패작에 날아갔다.
"하.. 상대파악도 아직 안 끝났는데.."
반즈는 이르벨의 행동에 구시렁대면서 능력을 발동시켰다.
[순결 트리] [섬전점척(????)]
반즈는 [섬전점척(????)]을 발동시킨 채 [샤이크]를 따라 달려들었다.
[샤이크]가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로 실패작을 물었고 반즈는 실패작에 심장에 [순결]을 찔렀다.
"통했나?"
이르벨은 기대감을 담은 채 반즈를 바라보았지만, 반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이르벨은 곧바로 [샤이크]를 뒤로 내빼면서 능력을 발동시켰다.
"[바다의 흐름]"
물웅덩이가 만들어지던 순간, 무슨 일인지 반즈가 [샤이크]를 따라 뒤로 빼던 도중 스텝을 잘못 밟아 뒤로 넘어졌다.
반즈가 넘어지자 실패작이 넘어진 반즈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반즈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어, 반즈!"
소리를 외쳐면서 반즈를 불러보았지만, 반즈는 팔로 코를 막으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쯧."
이르벨은 만들고 있던 [바다의 흐름]을 다른 능력으로 바꾸었다.
"[물방울 난사]"
크게 부풀리던 물웅덩이를 허공에서 터트린 후, 그 물들을 전부 지름 3cm 정도 되는 구체로 바꾸었고, 손을 총 모양으로 바꾼 후 반즈에게 다가가는 실패작을 향해 쏘았다.
"빵."
소리와 함께 모든 물방울이 실패작에 쏘아졌고 30개 정도가 아닌 최소 130개 이상의 물방울이 미친 듯이 처박히자 실패작은 상처가 생기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회 삼아 이르벨은 [샤이크]를 이용해 반즈를 자신에게로 데려왔다.
[샤이크]가 데려온 반즈의 상태가 이상했다.
"반즈! 왜 그래!"
반즈의 혈색이 어두워졌고 팔로 코를 막은 상태에서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눈만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
"도대체 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알겠지만, 막상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허둥대고 있을 때, [샤이크]가 반즈앞으로 가더니 마음대로 이르벨의 마나를 사용했다.
샤이크가 이르벨의 마나를 사용해서 만들어낸 것은 작은 물방울 하나였다.
"[풍요의 물방울]? ...설마?"
[샤이크]의 의도를 알아챈 이르벨은 곧바로 반즈의 손을 내려놓고선 [샤이크]가 만든 물방울을 반즈의 입속에 넣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반즈의 혈색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고마워 이르벨, 아니지 [샤이크]"
"야, 쨌든 [풍요의 물방울]을 만들어낸 건 나거든?"
"그래그래 너도 고마워."
"...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이르벨은 반즈가 바로 전에 있었던 상황을 해명할 것을 원했다.
"간단해, 독이야."
"독?"
"응, 그것도 일반 독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독을 쓰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이르벨은 [물방울 난사]를 맞아 뒤로 밀려난 실패작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위험하네."
근접전을 주로 이용하는 반즈에게있어서 여러 독을 쓰는 실패작은 완벽한 카운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