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EP.2 설녀의 눈물 (2)
* * *
“끄으으응..”
가슴 깊숙이 끓어오르는 신음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살아있는 건가’
아무래도 떨어지기 직전 전개한 방어진이 제대로 작동한 모양.
요령이 좋았다.
‘아니…역시 죽은 건가’
허나 우용은 이내 자신의 생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계의 하나님. 여긴 천국이군요”
한참은 떨어진 거 같은데.
깊은 지하에 이런 호화로운 궁전이 웬말인가.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온갖 아름다운 조각상들이었다.
‘전부 푸르댕댕한 빛을 띄는 게 마치…’
얼음 같다.
조금 의아한 건 생각보다 몸이 따뜻하다는 것.
우용은 자신을 둘러싼 황금빛 보석들을 바라보았다.
이 반투명한 돌맹이로부터 따스한 열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푹신하다.
“안녕하세요 천사님”
웬 아리따운 여인이 무릎 베개를 해주고 있었으니까.
*
비몽사몽한 상태를 가까스로 벗어난 건, 그로부터 삼일 뒤였다.
아직도 몸이 뻐근해 마음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되도록 움직이지 마세요”
“…”
확실히 잠은 깼는데.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깊은 지하에 이런 화려한 곳이 있다는 사실도.
목전에서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요리를 하고 있는 여인도.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하기엔 정신이 너무 또렷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백발과 창백한 피부색.
마찬가지로 핏기 없는, 밝은 청색의 입술.
하늘하늘거리는 반투명한 옷무새는 마치 선녀의 비단옷을 연상시킨다.
인간이 아니다.
“천사…”
“네..? 또 그런 말씀을..”
조금 허둥대는게 마치 볼을 붉히는 듯한 행동거지.
허나 핏기가 없어 그런지 정작 볼이 붉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덕에 무척이나 어색해 보인다.
당황한 듯 꿈뻑이는 새하얀 속눈썹은 마치 부드러운 눈송이 같다.
“많이 배고프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완성되니까”
“…”
척 보기에도 얼음장같이 추워 보이는 곳이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은 그 존재만으로 부조화스럽다.
모든 것이 저 반투명한 황금빛 돌멩이 덕이다.
난로의 역할을 하던 녀석은 지금 수프를 끓이는 열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연소석이에요. 이렇게 요리에도 사용할 수 있답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목숨을 앗아가는 무기가 될 수도, 생활을 도와주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죠”
신기하게 바라보는 우용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그녀가 설명을 늘어놓았다.
“궁금한 게 참 많은데…일단은 식사부터 할까요?”
*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건 허겁지겁 접시를 비운 뒤였다.
최고의 반찬이라 일컫는 공복 때문인지, 단순히 그녀의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평범한 버섯 수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맛이 좋았다.
“어떻게…입맛에 맞았을까요?”
“네. 아주 훌륭한 요리 솜씨군요 천사님”
“에잉…또...”
검지로 수줍게 머리칼을 빙글빙글 꼰다.
“제 이름은 '유리아 나이아펠트'.부디 편하게대해 주세요.”
“어..음..그럼 사양말고 편하게 말할게?”
"네..!"
초면에 반말이라고, 개념 밥 말아먹는 행위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남성이 귀한 사회인만큼 이런 가부장적인 양상은 자연스런 사회 분위기였다.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우용은 딱히 거리낌없는 말투로 유리아를 대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굳이 지구에서의 상식을 고집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이번엔 우용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유리아가 고갤 끄덕였다.
“저기 우용 씨…”
“유리아..”
두 남녀의 말이 겹치며 일순간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하하..”
“...”
우용이 어디 모자란 듯 쑥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제아무리 말재간 좋은 우용도 조금은 버거웠다.
‘외모가 너무 무자비한데..’
이 세상의 섭리를 아득히 벗어난 유리아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먼저 말해 유리아”
“네…!”
이윽고 그녀가 궁금한 것들을 늘어놓았다.
“어째서 이곳에 남자가 있을까요?”
우용이 검지로 연소석을 가리켰다.
“폭발에 휘말렸어”
“역시 그렇군요. 어쩐지 굉음이 들리더니…싸우고 계셨던 거죠?”
그가 고갤 끄덕였다.
“역시 미끼셨군요”
"...맞아"
이런 무식한 폭발이 동반하는 전투는 마물과 인간의 다툼 말고 떠올리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미끼’로 이어졌다.
"이번엔 또 무엇 때문일까요"
그가 사건의 전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으니까.
유리아에게 적의가 있었다면 진작 우용을 모종의 방법으로 처리했을 것이었다.
“그런... 먼저 인간령 여인들, 그리고 웨어울프들의 명복을 빌게요"
유리아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성녀같네'
특이한 광경이었다.
'마물'이란 욕정에 사로잡혀 허구한 날 정액을 탐하는 발정난 작자들이 아니었는가.
유리아가 보여주는 모습은 신선하다 못해 솔직히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믿는 신이라도 있는 걸까.
잠시 후 기도를 끝마친 유리아가 이번엔 보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법에 관해서요”
“응?”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확신에 가깝게 말한다.
"우용 씨.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그건 좀 있다 물어보려 했는데"
“지상으로부터 12 로디아 정도 떨어진 아주 깊숙한 지하에요”
“뭐..뭐라고?”
지구의 익숙한 단위로 치환하면 5km 되겠다.
한 마디로 어떻게 살아있냐는 물음이었다.
유리아는 자신의 은신처로 떨어진 우용을 발견했을 뿐, 떨어지고 있던 그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아니, 상식적으로 너무 깊은데…지반이 무너졌다고 이렇게 깊은 곳까지 떨어지는게 말이 되냐고”
거짓말 아니냐는 의심 가득한 눈빛.
유리아가 우용이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했다.
“니케르 설원엔 다량의 연소석이 매장되어 있어요. 그만큼 자연적인 폭발도 잦아요. 원래부터 지반이 상당히 불안정한 곳이라.. 이런 기다란 굴이 생기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물론 막힘없이 이곳에 도달한 건 기적과도 같지만.."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마법을 쓰신거죠?”
우용이 끄덕였다.
만약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생존은 불가능했다.
함께 떨어지는 바위에 부대껴 낙사하기도 전에 사망했으리라.
“제가 알기로 인간 남성은 마법의 습득이 불가능한 걸로 아는데…대체 어떻게 쓸 수 있는 걸까요?”
“수감된 마물들의 도움을 받아 몰래 공부했어. 이 족쇄를 풀려고”
그가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지 위로 자지를 가리키는 것뿐이지만 상대가 절세미녀라 묘하게 짜릿하다.
“흐응…재밌네요 우용씨. 발상도 신선하고. 행동력도 대단한걸요”
유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덕분에 이후 이어지는 질문 공세는 전부 마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우용은 그녀의 요구에 따라 몇 번이고 스파크를 튀기며 마법을 내보여야 했다.
*
"하하..좀 부끄럽네 미숙해서"
"아..아니에요..! 독학으로 이 정도면 대단한 걸요"
머리가 지끈 거린다.
두뇌를 혹사한 나머지 두통이 밀려왔다.
마나가 부족하다는 표현은 집중력이 한계에 달했음을 의미한다.
“후우..유리아. 이번엔 내가 좀 물어도 될까?"
“네..! 얼마든지!"
이윽고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고민하는 우용.
역시 이 얼음 궁전의 존재 자체가 의문이다.
대체 이 지하 깊숙한 곳에 이런 엄청난 구조물을 누가 만들었단 것인가.
심지어 금방이라도 관리한 듯 말끔했으니.
의심되는 자는 하나다.
“설마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거 다 네가 만든건 아니겠지?”
“푸흡…그게 궁금하셨어요?”
유리아가 천상 여자애 같은 미소를 지으며 우용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비단옷이 나폴거렸고.
“에잇!”
쿠구구구
대답대신 멋들어진 조각상 하나를 순식간에 만들어 보인다.
“…!!”
입이 떡 벌어진 채 멍청한 표정을 짓는 우용.
‘마법…인가?’
단시간에 이렇게 정교한 구현이 가능한 것인가.
아무리 마나의 은총을 받은 마물이라 하더라도 과연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연상력이었다.
찰나의 스파크가 튀었을 뿐. 전류로부터 변환하는 과정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냉속성은 난이도가 높다.
안그래도 까다로운 수속성에 상태 변화를 추가한 만큼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었다.
우용이 알고 있기로 얼음으로 이러한 짓거리가 가능한 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설원의 마녀…?”
벙쪄있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이 읊조렸다.
‘에이..설마..’
추궁하려다 그만두었다.
여러모로 앞뒤가 맞지 않았으니까.
군단장이 인간령, 그것도 이런 구석진 지하에 숨어 있을리 없었다.
“…”
그러나 유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다.
별생각없이 순수하게 중얼거렸을 뿐인데.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다들…그렇게 부르는 군요…”
무언가 건드리면 안되는 지뢰를 밟은 것 같다.
“이야..왜 유독 멋있나 싶었더니. 내 모습을 본 딴 조각상이네!”
“…”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우용이 허겁지겁 무마하려 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서투른 처세는 오히려 독이 되었고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천사가 아니에요. 악마에요..”
복잡한 표정의 유리아.
“무슨 소리야. 내가 아는 악마는 이렇게 사람을 구하고, 상냥하게 보살피지 않아”
“아니요. 당신은 진정한 제 모습을 몰라요”
고개를 숙인 그녀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심신이 조금만 불안정해져도. 이 힘을 주체할 수 없게 돼요”
“힘?”
“모든 것을 얼려버리거든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어붙는 게 문제였다.
그녀가 발을 딛는 곳은 급격하게 온도가 내려갔으며 나무는 이파리를 잃고 앙상하게 말라붙어갔다.
그나마 피해가 덜할 설원을 골랐고, 그것도 모자라 지하 깊숙한 곳으로 은신했다는 말 되겠다.
오로지 무고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
“가까이 있는 난 이렇게 멀쩡한데..?”
“제 힘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지금은 무척이나 평온하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지하는 에르마가 부족하니까?”
“잘 알고 계시네요. 그만큼 힘의 발현이 약해지거든요. 후후...”
유리아가 애써 웃어보이지만 눈가에 진 그늘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진 표정에 덩달아 공기가 서늘해졌다.
확실히 그녀의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힘이 발현되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졌다.
“유리아..이곳에서 지낸지 얼마나 되었어?”
“글쎄요..대략 10년 정도 된 거같은데”
예측을 벗어난 너무나도 긴 세월.
“10년…?”
우용은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하.. 설마 혼자서..? 혼자는 아니겠지…동료는 지금 어딨어?”
너무나도 안타까워질거 같아서.
제발 아니길 빌었다.
그러나 진실은 야속하게도
“맞아요. 혼자에요”
별일 아니라는 듯, 너무나도 무덤덤한 대답.
“유리아…”
갑작스레 목이 매는 바람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자세한 정황은 몰랐다.
그녀가 ‘설원의 마녀’이건 아니건.
어쩌다 인간령에 오게 되었는지도 고사하고.
그저 오랜 세월 홀로 외롭게 지냈을 유리아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많이 외로웠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입을 열어 위로를 건네 본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괜찮다고 말하는 여인의 눈에서 또르르하고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어라..? 왜 눈물이…하하...이게.. 이게 왜 이러지?”
그조차 시원하게 흘러내리지 못하고 이내 얼어붙어 그녀의 볼가에 머물렀다.
“유리아…”
차마 넘어갈 수 없었다.
우용이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떠..떨어져요..추울텐데”
“아냐 괜찮아”
“우..우용씨…흐..흐윽..”
엄청난 냉기가 몸으로 전해졌지만 어째선지 춥지 않았다.
“울어 울어. 맘껏 울어”
“흐윽..흐윽…흐아앙~”
급기야 참았던 울음을 쏟아내는 유리아.
그녀의 가녀린 등을 토닥이며 우용은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
‘인간과 마물은. 금방까지 서로를 죽이려 들지 않았던가’
이 아름답고 연약한,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여인은.
오로지 남들을 향한 배려심 하나로 이 지하 깊숙한 곳에서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대체 얼마나 마음씨가 고와야 이런 성인(?人)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마물은 닥치는 대로 인간 남성을 착정하고 있던 게 아니었는가.
대체 우리는 누구랑 싸우고 있는 것인가.
*
“우..우용씨…그…죄, 죄송해요! ”
“하하..아, 아니야아~괘,괘, 괜찮어~”
마음껏 껴안은 덕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히잉…연소석을 좀 더 가져올게요”
“괜찮다니까 그래~하하..부, 분명 안 추웠었는데..”
유리아가 몸을 배배 꼬며 고개를 조아렸다.
허둥대는 그녀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던 우용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유리아. 조금은 솔직해질 필요도 있어. 실은 외로운 게 싫은 거잖아”
“…”
“솔직해져 봐”
유리아가 살며시 끄덕였다.
이에 우용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리아. 자유의 몸이 되는 날엔… 내가 꼭 다시 찾아올게. 우리 함께 알아보자. 네가 자유로워질 방안이 분명 있을거야”
“우용씨…”
유리아가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또다시 울먹거렸다.
“마..말씀이라도…너무 감사해요..”
“난 진심이야. 이런 극단적인 방법... 난 납득 못해. 내가 꼭 구해줄 테니까”
오래간만에 만난 대화상대.
마법을 쓸 줄 아는 이 별난 남성은 자신을 위해 진정으로 울어주었고, 제멋대로 납득을 못하겠다며 씩씩거렸다.
“…”
여태 살아오며 이토록 마음이 따뜻해진 적이 있었던가.
설령 그가 먼 훗날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라도.
우용이 건넨 위로만으로 유리아는 이미 충분한 보답을 받았다.
“우용씨”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슬픔과 감동에 절어있던 그녀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제가 혹시 그것 좀 봐도 될까요?”
그 창백한 손가락은 우용의 고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