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EP.3 끊어진 사슬 (3)
* * *
우용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가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단언컨대 이 세계에서 그녈 모르는 자는 없다.
"당신이 마왕. 오필리아 드 메리아..“
철컥…
원활한 대화를 위해 철창문을 열고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서니 그 꼴이 더욱 처참하다.
사지가 잘린 것도 모자라 온몸이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다.
“아아. 아쉬워라. 수십 년 만의 사내이건만… 쩝”
처참한 꼴로 묶여 있는 주제에 우용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고 있다.
이 어찌 천연덕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대. 이름은?”
“강우용. 우용이라고 불러”
“호오.. 이 몸을 보고도 기죽지 않는구나”
“남자답게 허세 좀 부리는 거지”
역시 마왕은 마왕이다.
쇠약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마기였다.
“거두절미하고 말할게. 당신에게 전달할 게 있어서 왔어”
우용이 품 속에서 오필리아의 오른팔을 꺼냈고, 냄새를 맡은 오필리아가 입맛을 다셨다.
“웬 사내가 이 몸의 오른팔을 가져오다니… 재밌다 재밌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우용은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유리아와의 만남부터 죽음까지.
그리고 이 오른팔을 전하라는 그녀의 유언도.
“아아.. 유리아였군! 정말이지 착한 아이야. 기특하다 기특해!”
“…역시 유리아는 군단장이었어”
“그래. 그 아이의 보직은 ‘나태’였지. 가여운 유리아. 결국 갈 곳을 잃고 헤매다가 외롭게 죽었구나. 이토록 멍청하고 안타까운 죽음이 어디 있을까”
“멍청하다고? 그녀를 욕하지 마 오필리아. 그리고 그녀는 죽지 않았어..아마도”
발끈하는 그의 목소리에 오필리아가 흥미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오…”
우용이 유리아가 남긴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임종 직전, ‘언젠가 꼭 다시…’라는 유리아의 중얼거림을.
“후우..오필리아”
가까스로 화를 가다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그가 이곳에 온 건 어디까지나 유리아의 부탁을 지켜주기 위해서였지만, 직접 상황에 당면하니 이해가 안 가는 점들이 많았다.
“이 오른팔을 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조금이나마 힘을 되찾겠지”
“그렇다면 유리아는 당신의 부활을 원하는 건가?”
“물어서 무엇하겠는가? 생각보다 머리가 안 돌아가는 남정네 군”
오필리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유리아는 마왕의 부활을 원하고 있다’
우용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문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토록 평화를 원했던 유리아가 어째서 마왕의 부활을 도모하는 것인가.
애당초 어떻게 그녀가 마왕의 신체 부위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나머지 팔다리는 어디에 있지?”
당연히 이곳에 마왕을 가둔 인간들이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봉인하는 과정에서 힘을 줄인다던가 하는 이유로 사지를 절단했을 것이 분명했다.
허나 오필리아의 답은 심히 예상 밖이었다.
“군단장들이 하나씩 나눠가지고 있다”
“뭐..뭐라고..?”
그녀의 대답이 너무나도 뜻밖이라 웃음이 살짝 나왔다.
“허허..”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무지를 견디지 못하고 초조해진다.
“여러모로 혼란스럽네. 오필리아.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을까?”
다행히도 마왕, 오필리아는 자유로운 성격의 여인이었다.
“못해줄 것도 없지. 그도 그럴게 오랜만에 만난 대화 상대 아닌가!”
오히려 신이 난 듯 보였다.
재미없고 외로운 수감 생활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더니, 이내 이야기를 본론으로 이끌었다.
“자아. 먼저 질문이다. 이 몸이 어째서 여기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째서냐니..”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녀는 약 20년 전, 로덴 만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 결과 인간들에게 생포당했다.
마물들은 분노했고, 그날을 기점으로 마물과 인간의 갈등은 더욱 극적으로 치닿았다.
미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오늘의 다툼을 만들었다.
이는 어린아이들도 아는, 세상에 공공연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었다.
“대단하다 강경파 군단장들! 사실을 완전히 은폐해 버렸구나!”
“은폐..?”
“너희들은 이 몸을 너무 얕잡아 봤어. 설마하니 진짜 자기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을 줄이야”
“무슨 소리야?”
"언제나 우위를 점하던 마족이다. 그 마물들의 수령이 그리 쉽게 붙잡히겠느냐"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다.
그렇다면 일부러 붙잡힌 건가?
공교롭게도 예상은 한 번 더 빗나갔다.
“몇몇 군단장들의 반란이 있었다. 이 몸은 갑작스런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두 눈과 팔다리를 잃어버렸지. 조무래기들도 다섯이나 모이니 버겁긴 하더군”
사지를 잃고 나약해진 오필리아는 반란 주동자들에 의해 전장에 내던져졌다.
그것을 인간들이 손쉽게 받아 갔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로덴 만 전투의 실상이다”
“마계의 군단장들이?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그들에겐 명분이 필요했다. 인간 남성을 좀 더 자유롭게 착정할 명분이”
20년 전이라 함은.
남성 개체 수 보존 협정이 이제 막 추진되고 있을 시기였다.
한창 전쟁 중이긴 했으나 서로 의미 없는 소모전임을 깨닫고 공존을 위해 첫 발을 내딛던 시기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야"
그대로 흘러가다 협정이 체결되기라도 하는 날엔, 제약이 생기는 만큼 자유로운 인간 남성의 착취는 불가능에 가까워졌으니.
"협정의 체결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
협정을 방해하기 위해선 마물과 인간의 갈등을 고조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반란 주동자들은 고민했고, 그 결과 기가 막힌 시나리오가 탄생했다.
일부러 인간에게 마왕을 빼앗기고 그것을 빌미로 다툼의 심화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빼앗긴 마왕’은 최고의 통치 재료였다.
마물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통치권을 쥐어잡은 군단장들은 마물들의 분노를 돋구었고, 협정은 자연스레 무산되었다.
남성을 자유롭게 착취할 수 있는 명분과 환경이 마련된 것이었다.
그것이 계속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흑막...이라는 건가"
어딜 가든 똑같다.
세계를 입맛대로 움직이는 소수의 세력이 있는 법이다.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그 누구보다 평화 협정을 추진하던 온건파 군단장이었고, 요령 좋게 신체 부위를 훔쳐낸 끝에 마족령을 도망 나온 것이었다.
인간령에 도착했으나 있을 곳이 없었다.
여타 마물들처럼 지상에서의 은둔 생활이 불가능했다.
통제 불가능한 힘 때문에.
그래서 설원의 깊은 지하를 택했다.
"오필리아. 넌 어느 쪽이지? 역시 온건파인가?"
"이 몸은 어느 쪽도 아니다"
조금 의아했던 점은 오필리아의 가치관이었다.
"강경파건 온건파건, 내겐 중요하지 않아. 이 몸은 그저 교미에 진심이었을 뿐이다“
오필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착정을 많이 한 여인이었다.
다만, 결코 목숨을 빼앗진 않았다
“죽일 때까지 착정한다니.. 그야말로 어리석은 행위지 않는가. 이 몸은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착정하고 회복시키고, 또 착정하고 회복시키는 방식을 택했지”
“…”
"서큐버스란 대게 그러한 족속들이다. 유리아는 이 몸을 좋아하지 않았어“
오필리아와 유리아는 인간 남성과의 공존을 원했다.
허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달랐다.
오필리아는 그저 인간 남성과의 교미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진심으로 개체 수를 걱정하게 된 경우였다.
좀 더 오랜 세월, 좀 더 자주, 좀 더 강렬하게 교미하기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도. 남성을 본인들의 전유물로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 몸은 그저 진심으로 걱정했을 뿐이다. 인간 남성이 사라질까 봐“
“정치엔 관심이 없었군”
“하하하하! 어떠한 포부가 있어서 마왕이 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치적 수완 따위 가지고 있을 리 없었지. 관심도 없고!”
“어째서 마왕이 된 거야?”
“강한 자가 위로 올라가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계의 사회구조는 꽤나 단순한 편이지”
여하튼, 마왕은 중립이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유리아가 그녀를 부활시키려는 이유는 역시…
‘오필리아 말고는 군단장들을 막을 자가 없다’
우용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다툼이 이렇게 극적으로 치닿은 원인과 흑막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유리아의 목적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용이 바라는 바와 맞아떨어졌다.
‘인간과 마물의 공존’
그리고 이를 위해선 오필리아의 힘이 필수불가결하다.
앞으로의 방향성을 잡기엔 충분했다.
“오필리아. 나와 손을 잡자”
“호오…?”
“내가 널 여기서 꺼내줄게. 신체 부위를 모아 오면 되는 거잖아”
오필리아가 흥미를 보이다 이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재밌는 건 환영이야. 허나…한낱 남성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놈이”
“그건 걱정하지 마. 난 곧 자유의 몸이니까”
“흐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어떤 수단이든 간에, 난 널 꺼내면 되는 거고 넌 마계의 수뇌부를 뒤엎으면 되는 거야”
너무나도 자신에 찬 우용의 목소리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재밌다 재밌어!! 좋다. 받아들이기로 하겠다”
성공과 실패는 중요하지 않다.
우용의 제안은 지루한 나날을 조금이나마 즐겁게 만들어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 네놈에게 힘을 나누어 주겠다”
“힘?”
우용은 그녀의 요구에 따라 입가에 오른팔을 가져다 주었고,
오필리아가 기다란 혀를 내밀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인간의 것보다 족히 세배는 길어 보이는, 핏기 없어 창백한 혀의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기괴하구만..'
먹어치움과 동시에 일순간 마기가 짙어지고 오필리아의 오른팔이 재생되었다.
그녀는 재생된 팔로 우용의 목덜미를 붙잡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우웁..!!”
기다란 혀가 구강을 빈틈없이 채우며 밀고 들어왔다.
꿈틀거리는 기다란 연체가 제멋대로 구강을 휘젓다 이내 쑤욱하고 목구멍 깊숙이 들어왔다.
“커헉..!!
순간 의식을 잃었다.
동시에 안구에서 연분홍색 빛이 일었다.
쭈우웁
“푸하…커허억…!!”
“쩝…”
특수한 행위를 마친 오필리아가 입맛을 다신다.
“이걸로 힘을 전달했다. 이 몸이 완전체가 아닌 만큼 대단한 힘은 아니지만”
“이것이…커헉…”
“그래도 앞으로의 모험에 있어 도움이 될 게야”
우용이 가쁘게 기침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확실히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다.
연상하는 족족 마법이 튀어나갈 것 같은 가벼운 느낌.
“네놈이 남성인 이상 진심으로 착정하려 들 텐데.. 과연 버틸 수 있을지”
“…”
그야 상대가 군단장이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을게, 유리아..”
우용이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후후후…반대로 네놈이 착정하지라도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마물을 반대로 착정한다라..”
그것도 군단장을.
정신 나간 소리지만 해야 할 수밖에 없다.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오해의 매듭을 풀기 위해선.
우용은 그 어느 때보다도 끓어오르는 의욕을 주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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