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EP.3 끊어진 사슬 (4)
* * *
앞으로 찾아야 할 오필리아의 신체 부위는 4개.
‘색욕’이 왼팔.
‘오만’이 오른 다리.
‘식탐’이 왼쪽 다리.
마지막으로 ‘분노’가 두 눈.
오필리아가 알려준 대상들의 몇몇 특징들과 정보들을 곱씹으며 우용이 계단을 올랐다.
“갈 길이 머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이 지긋지긋한 요새를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이다.
이후의 일은 차차 생각해도 늦지 않다.
나선형 계단을 주욱 올라가던 우용이 샛길로 빠져 어느 독방 앞에 멈춰 섰다.
무쇠 팻말에 적혀 있는 숫자는 223.
퉁퉁퉁
주먹 쥔 손으로 철창을 두드린다.
“누..누구시죠?”
살짝 두려움에 젖어 있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아리에타”
“...우용 씨?”
먼지 구더기 속에서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아리에타.
조심스레 철창으로 다가오다 우용임을 확인하고는 한시름 놓는다.
“뭐가 그렇게 겁이 많아. 누가 괴롭히기라도 해?”
“아뇨! 그건 아닌데…”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긴, 바로 옆방에서 곡소리가 들려오면 무섭겠지'
그도 그럴게 방음이란 개념이 없는 감옥이다.
아리에타야 뭐, 우용의 부탁과 게브의 배려로 보다 나은 옥생활을 하고 있는 편이지만, 다른 방은 아니었으니까.
동료들의 비명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정도로 아리에타는 담대하지 않다.
"후우..."
순진무구한 아리에타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착잡해졌다.
참 신기하다. 무슨 불변의 법칙 마냥, 무언가를 얻으면 필히 무언가를 잃게 되어있다.
자유로운 몸이 되면 더 이상은 아리에타를 지켜줄 수 없게 된다.
우용이 사라지면 아리에타의 담당은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것이고, 그 작자가 제대로 된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지금으로서의 최선은 마음속으로 ‘기다려 달라’ 부탁하는 것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하하하..아냐. 그보다 줄 게 있어서 왔어”
“네?”
“선물이야 선물”
우용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두루주머니를 꺼냈다.
한 쪽 주머니당 하나씩, 총 두 개의 주머니를 아리에타에게 건넸다.
“어머. 묵직해라..이게 뭘까요?”
“별 건 아니고. 그 있잖아. 매일 주는 거”
“헤에~! 설마아~ 이렇게나 많이?”
주머니 입구를 열자 한가득 담긴 호박색의 보석들이 농염한 자태를 뽐내며 반짝거렸다.
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갈피 나무의 진액을 굳힌 것으로 꿀나방에게 있어 초콜릿과 같은 간식이다.
그동안 조금씩 모았던 것을 오늘로서 전부 그녀에게 전달했다.
“숨겨놓고 혼자 몰래 먹어”
“헤에…”
저게 그렇게 맛있나.
아리에타가 두 눈을 반짝이며 군침을 질질 흘린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마법 공부를 도와준 아리에타였다.
그 노력과 수고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보답이지만, 그래도 보잘것없는 선물에 저렇게 기뻐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야 아리에타.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부르지 그래?”
“에? 제가 어떻게 그런 상스러운..”
“뭘 이제 와서 내숭 부리고 그러냐. 저번엔 그렇게 오빠~옵빠앙~ 이랬..크헉..!”
“아 진짜!!”
우용이 발정기 아리에타의 말투를 흉내 내자,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우용의 입을 틀어막았다.
창살 사이로 낑낑대며 손을 뻗는 꼴이 너무 필사적이라 웃음을 자아낸다.
“발정기 마물은 가식을 부릴 수 없다는데.. 속내를 훤~히 드러낸다던데.. 그렇다면 그때 그게 네 본모습…”
“아아! 알겠다구요!”
쉽게 놓아 주지 않고 끈덕지게 심술을 부리자 아리에타가 체념했다.
“우..우용 오빠..”
“푸핫!”
분한 기색으로 입술을 질끈 깨무는 아리에타를 보니 절로 흐뭇해진다.
정말이지 놀리는 맛 하난 끝내주네.
“하하하하…하아…”
그렇게 덧없이 웃다가도 이내 가슴이 싱숭생숭해진다.
“아리에타. 언제나 정신 똑바로 붙들어 매고. 아무리 옥생활이 고되도 포기하지 않는 거야”
갑작스레 우용이 진지한 태도로 굴자 아리에타가 고갤 기울였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이 독방에도 언젠가 꼭 빛이 들 거야”
“…”
“크흠! 넌 일단 매사 겁먹는 습관부터 고쳐야 돼”
“흥! 저도 이제 다 컸는걸요”
“그래그래! 장하다 장해”
우용이 아리에타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쓰다듬었다.
황금빛 머리칼이 이리저리 꼬이며 잔머리가 튀어나왔다.
“후히히..”
“그럼. 다음에 보자”
그렇게 그녀를 뒤로하고 조금은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우용이 계단을 올랐다.
*
열쇠의 반납과 게브의 발치에 담배 한 보루를 두는 것을 마지막으로 지하 수용소를 벗어났다.
참 대단한 새끼다.
이제는 코까지 골며 꿀잠 자더라.
뭐, 워낙 팔짜좋은 양반이니 걱정할 필욘 없겠지.
걱정하면 손해다 손해.
“그나저나 너무 대놓고 근무태만인 거 아니냐..”
한편, 먼저 출전 준비를 마치고 담배를 태우고 있는 우용의 옆은 아직도 소란스럽다.
레이코의 지휘 아래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복귀 후 첫 작전이다. 다들 정신 똑바로 붙들어 매도록”
“옙!”
“알겠습니다!”
한창 전쟁을 대비 중인 연병장의 가양.
레이코와 네 명의 병사는 별도로 새로운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 레이코 만인장!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그…어째서 저희가 작전을 나갑니까?”
갑작스러운 전파이긴 했다.
보통 작전이 내려오면 일주일 전부터 미리 준비하는 게 보통이다.
늘 그래오다 하루아침만에 수정된 계획 때문에 이렇게 바쁘게 준비해야 하다니.
자연스레 의문이 생길 수밖에.
본래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전쟁 준비를 가담하는 거였다.
“1단계 토벌 작전이나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숙련된 자들이 필요했던 거지. 상부에서 내려온 지침이니 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군의 검으로서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면 된다”
본인의 팀원에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레이코였다.
난이도 높은 작전인 건 맞지만, 나머진 사실이 아니었다.
어젯밤 레이코는 만인장의 지위를 이용해 병사와의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작전을 공수해왔다.
“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장”
허나 한낱 병사들이 무얼 알겠는가.
윗사람의 지침이면 의심할 여지 없이 따르면 그만이다.
“…”
그러한 병사들을 지켜보다 뒤돌아서는 레이코의 표정이 복잡하다.
옅은 한숨을 내쉬다 이내 우용과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네요. 잘 부탁드려요 레이코 씨”
“…”
무척이나 사무적인 말투로 우용이 말을 건넸다.
그 뚜렷한 눈빛에는 무언의 압박이 숨어있었다.
“그래. 오늘도 몸 간수 잘하도록”
이에 레이코도 딱딱한 말투로 대응했다.
주변인이 보기엔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으니.
이를 의식한 우용이 애써 웃어 보이며 장난을 걸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레이코 씨. 혹시 생리라도 하시나요?”
“이게 미쳤지?”
평소처럼 웃으며 농을 주고받지만 둘은 그 여느 때보다도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작전 장소로 이동하면서도 둘의 숨 막히는 연출은 계속되었다.
*
쏴아아아
스스스스
폭풍우와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야심한 밤.
레이코와 병사들. 그리고 강우용은 수풀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늘이 돕는 군”
마물 사냥에 있어 비는 언제나 환영이다.
보다 수월한 미끼의 연기가 가능해지니까.
“해가 저물고 몇 시간 지났지?”
“다섯 시간 지났습니다”
“그렇군. 슬슬 보금자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레이코가 속삭이며 우용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우용은 단독으로 수풀을 나와 작전 장소로 이동했다.
오늘 그가 미끼 행세를 부려야 할 장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비가 오는 만큼 특별한 연기가 요구되지 않는다.
급하게 비를 피하는 척 들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이곳이 타겟의 보금자리…’
동굴 입구로부터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색기와 욕정이 뒤섞인 짙은 마기.
마치 유혹의 손길과도 같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색정과 비슷한 정도로 살기가 가득하다.
이전이라면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인식’을 막 깨우친 직후에도 나름 예민해졌다 생각했었는데, 마왕의 힘을 나눠 받은 지금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감각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는 곧 접할 수 있는 세계의 확장과도 같았으니,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허나, 분수에 맞지 않은 힘은 독이 되는 법이다.
동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너무나도 짙어지는 역한 기운이 되레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우훅..”
이윽고 동굴에 들어간 우용이 연신 구역질을 했다.
토악질을 유발하는 짙은 비린내가 평소보다 배는 강렬하게 느껴졌다.
“피…?”
비린내만 가득한 마족의 피와는 좀 다르다.
좀 더 날카로운 피 냄새가 진동했다.
달빛에 비쳐 어렴풋이 색상이 보였다.
붉은 빛깔.
아니나 다를까 인간의 피였다.
‘위험한 작전이라더니.. 상대는 남성을 죽이는 ‘도살자’인 건가?‘
그러던 도중. 동굴 바깥에서 엄청난 기세로 번개가 일었고,
콰과과광
푸르른 역광이 어두컴컴한 동굴 내부를 비췄다.
“웁..우웨엑…”
그 처참한 광경에 결국 속을 게워내야 했다.
사지가 잘린 오필리아의 모습은 귀여운 수준이다.
대략 스무 채 정도되는 것 같다.
삐쩍 곯아있는 인간 남성의 사체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몇 명은 그나마 통통하다.
불구가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식량으로 사용되는 듯했다.
“일 잘하잖아 레이코. 꽤나 그럴싸한 작전을 구해왔어”
우용은 애써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까드득
까드드득
이내 천장으로부터 정신 사나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짓거릴 한지도 5년 차다.
우용은 단번에 상대가 절지동물임을 알아차렸다.
“어랏.. 비를 피해 온 가여운 손님♡”
기다란 몸을 이끌고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기어 오는 모습이 마치 뱀을 연상케 한다.
검고 기다란 머리칼은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흐트러져 있다.
까드득 거리는 거북한 다리 소리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뱀이라 착각할만한 실루엣이었다.
여인은 빠른 속도로 동굴 벽면을 타고 내려와 우용의 앞에 섰다.
까드드드득
수십 개의 체절과 수십 쌍의 다리를 자랑하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는 여인.
지네와 같은 기다란 하반신 덕에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한참은 올려야 했다.
“향랑각시…”
“어서 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