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EP.4 지느러미 선생님 (2)
* * *
입국심사를 앞둔 전날 밤.
모닥불 앞에서 우용은 연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아. 음…아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크흠..!! 어때?”
“이제 좀 자연스러운걸요? 역시 주인님♡”
"냄새는?"
"냄새도 이 정도면 모를 거예요. 애초에 남자 냄새에 예민한 건 마물들 뿐이니 그리 신경 안 쓰셔도 될 거예요"
"외모도 뭐..."
조금의 변장만으로 장신의 누님 캐릭터가 완성되었으니.
중성적인 외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면 발가벗겨 골격과 아랫도리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들키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오필리아의 마기다.
목소리는 음절이 튀어나오는 순간 공기의 진동을 건드리면 된다.
냄새 역시 냄새 분자를 걷어내 옅게 만들면 된다.
다만, 마기는 좀 다르다.
그도 그럴게 '기운'이라니.
전기 신호나 입자의 개념이 아니다.
추상적인 무언가를 어떤 수로 건드리겠는가.
'뭐, 문제없으려나'
옆에서 싱글 생글 웃고 있는 라크스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곁에 있다는 점이었다.
일행이 함께 진행하는 드루이드령 입국심사의 특성상, 마기의 주인을 라크스로 몰아가면 될 테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도 그럴게 드루이드령인걸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걱정근심 가득한 우용과 달리 아까부터 자신감 넘치는 라크스였다.
"넌 괜찮은 거야? 심지어 마물인데.."
"괜찮아요. 산란기니까 급하게 방문했다고 하면 되는걸요"
"아니아니, 그렇게 적당한 이유로 되는 거냐고"
"주인님. 드루이드령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시군요? 이런 귀여운 면도 있으시다니♡"
그야 가본 적이 없으니까.
이후 라크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그녀의 경우 두 번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영주권 따는 건 하늘의 별 따기지만, 방문자는 얼마든지 환영~ 이랄까요"
아무튼 안전하고 또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라크스도 잘 몰랐다.
그녀는 딱히 세계정세에 관심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경험은 우용보다 한 수 위였다.
‘뭐, 직접 두 눈으로 봐야겠지’
아무리 얘기를 들어도 드루이드령이 대체 어떤 곳인지 감이 오지 않았으니, 직접 맞닥뜨리는 수밖에.
어찌 됐든 내일은 드루이드령 입국심사를 볼 예정이고, 안절부절 해봤자 계획은 변하지 않는다.
"잠이나 자자"
*
어째서 드루이드령, '로벨하임'을 골랐는가.
우용이 드루이드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딱히 관심도 없었고 로벨하임 자체가 존재감이 없었다.
뭐랄까. 드루이드령은 세간과 동떨어져있는 느낌이었다.
세계의 이슈는 죄다 마물과 인간 중심이었지, 그 사이 드루이드들이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물과 인간의 교전이 남발하는 최전선에서 살아온 만큼 제3자에게 관심 가질 시간은 없었으니.
그냥 존재만 알고 있었다.
마족령, 그리고 인간령과 동시에 경계를 맞대고 있는 작지만 강한 중립국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이코의 충고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녀가 드루이드령을 언급한 건 그저 우연의 일치였다.
촤르륵
우용이 약도를 펼쳤다.
999호를 나오기 직전 오필리아가 그려준 약도였다.
"최고의 마법사라..."
아무리 오필리아에게 힘을 하사받았다 한들 지금의 우용이 마계 군단장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건네받은 힘 또한 불완전하다.
지금 오필리아는 완전체가 아니니까.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마왕의 힘을 받았다고 전세가 뒤바뀌지는 않는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제안했다.
자신의 지인을 알려줄 테니 그녀를 찾아가라고.
‘강요는 아니다. 생각이 있다면 가서 배우거라’
이 한마디가 끝이었다.
‘로벨하임 최고의 마법사’라는 짤막한 언급을 덧붙일 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약도도 애매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여하튼, 이것이 첫 번째 목적지로 드루이드령을 고른 이유였다.
오필리아는 강요하지 않았다.
선택지를 주었을 뿐 전적으로 우용의 선택에 맡겼다.
물론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만약 그 '최고의 마법사'를 스승으로 둘 수 있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도착했어요"
"벌써? 빠르다 빨라 라크스"
"우후훗♡ 지네는 발이 빠르다고 했잖아요"
까드득
우용의 반응이 기쁜 건지 자랑스럽게 앞다리 발톱을 내세우는 라크스.
그녀가 몸을 낮추자 우용이 땅에 발을 디뎠다.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고개를 들자마자 두 명의 엘프가 우용을 반긴다.
아리에타보다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
오필리아의 것보다 살짝 짧은 뾰족한 귀와 뽀샤시한 피부.
지구에서의 흔한 판타지 설정처럼 미모는 두말할 것 없다.
쌍둥이인 걸까.
한 명이 장발, 다른 한 명이 단발인 점을 제외하면 외양이 상당히 비슷했다.
우용은 태연한 척 슬쩍 고갤 끄덕이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국경을 따라 기다랗게 나무가 심어져 있는 꼴.
당연히 그 높이는 아득하다.
나무와 넝쿨만으로 성벽의 구조를 갖춘 셈이었다.
좌우로 주욱 뻗은 나무 성벽은 시야의 한계를 벗어나 지평선 위 하나의 점으로 소실되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봤다면 더 장관이었겠는데’
졸면서 오느라 그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없었던 게 아쉽다.
지네 특유의 움직임 때문인가.
마치 흔들의자에 누운 아기처럼 잠이 솔솔 오는 승차감이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숲과 관용의 나라, 로벨하임입니다. 입국하시려는 거 맞죠?"
엘프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곳은 넝쿨로 만들어진 아치형의 입구였다.
"두 분은 일행인가요?"
"네..."
"네에~"
엘프들이 우용과 라크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야 마물을 타고 온 인간 여성이라니.
게다가 우용의 꼴을 보아라.
검은색 로브로 온몸을 가린 것도 모자라 가면까지 쓰지 않았는가.
‘시팔...무조건 벗긴다’
변장하면 무엇하랴.
땀으로 범벅되어 잔뜩 긴장한 얼굴을 들키게 생겼는데.
라크스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괜히 믿었다고 후회하려던 참이었다.
두 엘프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사무를 진행했다.
"인간령 발렌시아에서 오신 거죠?"
"네"
"목적은요?"
"지오넬 종합대병원의 방문이에요~"
머뭇거리는 우용을 대신해 라크스가 먼저 선수 쳤다.
이내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엘프들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에..음...인간, 클레어 말츠바르젠 씨와 마족, 라크스 무스칸크리트 레드블레어 씨"
이윽고 특이하게 생긴 에르마 감응석으로 신분증을 확인한다.
“두 분 모두 전과는 없군요. 확인되었습니다. 첫 방문 시 체류 기간은 25일이에요. 더 머무르실 계획이라면 이후 수도로 가셔서 연장하시면 됩니다”
짤막하고 친절한 안내 이후 길을 내어준다.
“후우...”
엘프들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지자 우용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봐요. 걱정 안 하셔도 되죠?”
“...아니, 잠깐만”
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데.
“왜 이렇게 허술해? 이래도 되는 거야? 가면도 안 벗기네”
“그야 여긴 숲과 관용의 나라니까요”
“그보다 너, 범죄자 아니야? 전과가 없다니”
“이잉... 드루이드령에선 사고 치지 않았는걸요”
밖에서 아무리 말썽을 부린다 한들 정작 드루이드령에서의 전과만 없다면 입국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전 약과인 편이에요"
전쟁범 또한 허락이 되는 곳이었다.
역시 드루이드령 내에서의 전과만 없다면 말이다.
우용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세간과 이렇게나 동떨어져 있는 곳이라니. 지금도 마물과 인간은 피를 쏟으며 싸우고 있는데 말야“
바로 옆 나라에서 인구가 절멸해도 그녀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악독한 살인자가 본인들의 나라를 방문해도 받아들인다.
정치범과 전쟁범도 예외는 아니다.
드루이드령에서의 전과만 없다면 그녀들은 그 누구나 차별 않고 대해준다.
“이기적인 건가?”
“글쎄요? 그녀들은 ‘관용’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관용과 무관심은 한 끗 차이다.
우용은 헷갈렸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흐음...”
섣부른 판단은 관두자.
드루이드들의 사상과 가치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녀들은 인간 남성이 필요 없는 거야?"
"그럴 리가요. 남성의 정액이 유일한 번식 수단인 건 그녀들도 예외는 아니에요"
"역시 그렇겠지? 나중에 왕도를 한 번 방문해야겠어"
대체 로벨하임은 어떻게 돌아가는 나라인가.
분명 압박도 많았을 것이다.
그야 세계는 이분화되어 한창 전투 중이다.
힘을 지원해달라는 요청 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체제를 유지하고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더욱 의문이 생길 수밖에.
이렇게까지 병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이유가 뭘까.
어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세상을 둘러보는 것 또한 이번 여정의 목표다.
우용은 먼저 해야 할 일을 마친 뒤, 드루이드들에 대해 알아보자고 다짐했다.
'어쩌면 동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희망을 품으며.
*
약도는 드루이드령 남부의 평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나저나 행인이 없어도 너무 없다.
왕도를 중심으로 온갖 상권이 자리 잡고 있는 북부와 다르게 남부는 인적 드문 시골이었으니.
농삿일 중이던 엘프들이 간간이 마주친 행인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만날 수 없었다.
우용 일행을 본 자들은 잠깐 흘겨보는 것이 전부일뿐, 경악을 내지르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물어보면 가르쳐 줄 정도로 배짱 있고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풍경 자체는 기가 막히네”
여기도 풀.
저기도 풀.
길이 없어진 지는 오래다.
그래도 탁 트인 대지에서 달리고 있자니 기분은 좋다.
이동 중에는 잠깐이나마 생각을 비울 수 있어서 좋았다.
피톤치드 가득한 산들바람에 기운이 상기되는 느낌이랄까.
게브 자식이 이런 힐링을 느껴봐야 할 텐데.
까드드득
까드드득
“힘들지? 좀만 쉴까?”
“아뇨♡ 포상만 주신다면 이 라크스. 쉬지 않고 세계 일주도 가능하답니다♡”
“크흠.. 하여간..”
“그보다 주인님. 어디서 바다 냄새가 나는 거 같지 않아요? 우욱..”
확실히.
조금 전부터 비릿한 바다 냄새가 바람에 섞여 날아오고 있었다.
어째선지 라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물어보려던 찰나 갑작스레 그녀가 호들갑 부리며 언성을 높인다.
“어라라? 웬 오두막이?”
그녀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보았다.
바다가 있고, 그와 맞닿은 완만하고 드넓은 언덕이 있고, 그 언덕 꼭대기에 덩그러니 오두막이 놓여있는 모습이었다.
“무조건 저기다. 저기 밖에 없어”
“제 생각도 그렇답니다”
우용은 저 오두막이 목적지임을 확신했다.
모호하게 갈표가 쳐져 있는 부분을 맴돈 끝에 겨우 찾은 주택이었으니까.
그도 그럴게 주변을 수색하며 이동하는 동안 그렇다 할 건축물을 못 본 게 벌써 한 시간째다.
*
쿵쿵쿵
“...”
“...”
쿵쿵쿵
“...”
“...아무도 없는 걸까요?”
기본적인 예의는 갖췄으니 괜찮겠지.
끼이이이
슬며시 문고리를 밀자 그대로 문이 열렸다.
“잠겨 있지도 않네. 거 누구 없습니까?”
평범한 가정집의 구조였다.
주방과 거실이 일체형이며 소파가 있고, 탁상이 있고, 갖가지 화분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가정집.
참 아늑하다 싶었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위치한 거대한 석조 우물만 아니면 말이다.
우물이라기엔 컸다.
뭐랄까. 한국의 목욕탕을 연상케하는 구조다.
은은한 연둣빛 색을 띠는 게 평범한 물은 아닌 것 같다.
“이벤트 탕인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온다.
“으읏..주인님...”
우용의 키에 맞춰 몸을 낮춘 라크스가 그에게 딱 달라붙었다.
파르르 떠는 게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까드드드..
“너.. 물 싫어해?”
이내 라크스가 잔뜩 찌푸린 눈살로 끄덕였다.
아까 바다 냄새도 그렇게 싫어하더니.
뒤늦게 들은 사실인데 지네가 물에 대한 저항력이 그렇게 낮다 하더라.
껍질 쪽에 미세한 숨구멍들이 있는 반면, 반질반질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딱히 방수막이 없어서 이 숨구멍들이 막히면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버린다고 한다.
숨구멍이 있는 만큼 탈수도 쉽게 일어났으니.
변온 동물인 점까지 고려하면 생각보다 환경에 민감한 동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어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부르륵 부르륵
잔뜩 소란 피운 게 먹힌 걸까.
우물의 가운데서 잔잔한 파문과 함께 거품이 일었다.
“학생? 수업은 내일부터예요”
“어엇.. 뭐, 뭐야?”
“실례군요. 제가 물건인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