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EP.5 박사 군리
* * *
“끄으응..”
웅웅거리는 낮은 소음에 눈을 떴다.
뻐근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꾸르륵...
거대한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의문의 장소.
게슴츠레 뜬 눈으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갖가지 해양생물이 쏘다니는, 어두운 심해 풍경.
짤그락..
마치 수족관과 같은 풍경에 넋을 잃고 멍때리다, 뒤통수로부터 들려오는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에 우용이 고갤 돌렸다.
“...!!”
소리의 주인을 본 우용은 그 기이한 행색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체동물 특유의 움직임을 구사하는 붉은 색의 다리.
굳이 개수를 셀 필요는 없다.
빽빽이 붙어 있는 끈적한 빨판이 얘기해주고 있었으니까.
“문어…”
그 꿈틀대는 여덟 개의 다리를 보고, 우용은 가까스로 마지막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단숨에 머샤크를 저지했던 그 장면을.
그녀는 즉, 지저로부터 울려퍼진 고고한 목소리의 주인이리라.
사선으로 칼같이 자른, 짙은 보랏빛 단발의 여인은 의사의 것인지 연구원의 것인지 모를 새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하반신까지 길게 늘어진 가운으로 인해 문어다리와 인간 상체의 연결부는 가려져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서도 오필리아와 버금가는 짙은 마기가 느껴졌다.
허나 조금 다르다.
오필리아와 머샤크의 마기가 금방이라도 상대를 집어삼킬 듯한 지독한 색기였다면.
그녀의 것은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잔잔하고 고요한 느낌이랄까.
짤그락...
각각의 문어 다리에 들린 의문의 플라스크들.
일련의 순서가 정해져 있는 듯.
여인은 그것들을 능숙하게 조합하며 알 수 없는 액체를 만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기다란 깃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다.
당연히 칵테일을 조주하는 건 아닐 테고.
그렇게 홀린 듯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주변의 모습을 살펴보는 우용.
수많은 플라스크 병들과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샘플들.
난잡하게 널브러져 있는 양피지와 복잡한 기하학무늬가 그려진 칠판.
자그마한 램프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마찬가지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진득한 액체.
우용은 그제야 이곳이 단순한 수족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과학실. 혹은 연구실로 짐작되는 장소였다.
여인이 걸친 새하얀 가운은 필히 실험복이리라.
“어째서 인간 남성의 정액이 유일한 번식 수단인지 아는가?”
“…!!”
어색한 풍경에 두리번거리는 우용을 향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용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여인은 책상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제 할 일에 집중하며 계속해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소년은 자신의 피를 먹어 본 적이 있는가?”
이어서 무슨 맛이 났냐고 묻는다.
그야 당연하다.
인간의 피는 철분으로 인해 꽤나 씁쓸한 맛이 난다.
“...씁니다”
꽤나 얼떨떨했으나 최대한 태연한 척,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우용의 짤막한 대답에 여인이 고갤 끄덕이고는.
여전히 무언가에 몰두한 채 말꼬리를 이어갔다.
“반면 마족의 피는 비릿한 맛이 우세하지. 드루이드들의 것은 또 다르다. 그래. 명백히 성분이 달라. 그런데 어째서 수정이 가능한 것인지. 어째서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는가?”
“…”
갑작스런 질문세례가 좀 많이 당황스럽지만.
우용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확실히.
말이 안되기는 했다.
개와 고양이가 교미한다고 2세가 생길 리는 없으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유전적인 미스매치가 있다면 수정은 불가능하다.
우용도 한 번쯤은 이런 의문을 품어봤었으나, 딱히 궁금증을 해결하려 들진 않았다.
그도 그럴게 여긴 이세계가 아닌가.
이세계란 곧,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지 않는가.
때문에 과학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 물론 마법은 좀 예상 밖이었다.
“난 일찍이 의문을 가지고 오랜기간 연구에 전념했지. 그리고 마침내 답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대체 이곳이 어딘지.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따위의 자잘한 의문들은 일단 뒷전으로 두고, 우용은 숨을 죽여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관심이 있는가?”
참으로 느닷없는 대화였으나 우용은 그 여느 때보다도 눈을 반짝였다.
아무튼 흥미롭긴 흥미로웠으니까.
여인이 유도하는 대화 주제는 충분히 우용의 호기심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마치 ‘정전기’와 같은 마법처럼.
마물과 인간의 교미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야이지 않을까 기대하며.
“후후후.. 소년. 난 흥미를 가지는 자에게 무한한 호감을 느낀다네”
그제서야 우용을 향해 고갤 돌리는 그녀였다.
이내 여인이 의자를 돌려 우용과 똑바로 마주했다.
“흐음. 그래. 이계인 남성이라..”
잠시간 우용의 모습을 훑어보고는, 방금 전의 흥미로운 주제와는 관련 없는 이야길 꺼낸다.
“이곳은 우물의 바닥이다. 정확히는 우물과 연결된 심해라고 볼 수 있지. 일행은 걱정하지 말거라. 위에서 안전하게 기다리고 있을 게야”
굳이 묻지 않아도 도리어 먼저 우용을 안심시키는 여인.
짙은마기와는 반대로 생각보다 배려깊은 여인이었다.
“…전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진득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까는 오필리아의 이름을 대며 재밌는 얘길 하더군”
그랬던가.
아, 분명.
혼절하기 직전 그 의문의 목소리와 짤막한 대화를 나눴었지.
방문 목적을 물은 그녀에게 마왕 오필리아의 이름을 대며, 로벨하임 최고의 마법사를 찾아왔다고 대답했었다.
“잘 찾아왔다 소년. 이름은?”
나이는 먹을만큼 먹었다고 생각하는데.
“강우용입니다”
곧이어 우용의 이름을 들은 그녀가 짤막한 자기소개로 대답했다.
여인의 정체는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이름은 크사르크사켄 군리. 로벨하임 최고의 마법사이자, ‘탐욕’의 군단장이다”
“...!!”
‘탐욕’의 군단장.
‘나태’의 유리아와 같은 온건파 군단장 되겠다.
그나저나 드루이드령 최고의 마법사라니.
그렇다면 머메이드 여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말인가.
“그럼 어디 이야기를 들어볼까”
여러모로 의문을 품은 채, 우용은 침을 한 번 넘겨내고 이 변방의 작은 오두막까지 도달하게 된 경위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거짓말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녀의 짙은 마기가 군단장임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는 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유리아와의 만남부터 오필리아와의 계약까지 전부 늘어놓는다.
세상을 뒤집겠다는 자신의 포부와 마법을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는 이유도 함께.
“푸하하하! 일이 참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군”
어느새 플라스크를 내려놓은 문어다리가 신이 난 듯 산만하게 꿈틀거렸다.
“즉.. 오필리아가 말했던 지인이란 곧 군리 씨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지”
“그럼 그 인어는…”
“그녀는 ‘질투’의 군단장이다”
이거 참.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을 테고.
우용은 상당히 당황한 표정으로 오필리아에게 전해들은 정보를 되뇌었다.
그러니까.
‘나태’의 유리아와 ‘탐욕’의 군리를 제외한 다섯 명의 강경파 군단장들을 되짚어 본다.
앞으로 찾아야 할 오필리아의 신체 부위는 4개.
‘색욕’이 왼팔.
‘오만’이 오른 다리.
‘식탐’이 왼쪽 다리.
‘분노’가 두 눈.
그렇다면 본래 오른팔을 가지고 있었던 강경파 군단장은 ‘질투’가 된다.
그리고 그 오른팔을 유리아가 가지고 있었으니.
“‘질투’는 오필리아의 오른팔을 가지고 있었지. 유리아와 이 몸이 빼앗기 전까진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머샤크의 정체는 강경파 군단장 중 한 명이맞았다.
“지금은 힘이 봉인된 건가요?”
“그렇다. 그녀는내게 세뇌 당해‘라비앙’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조수이자, 표면적으로는 ‘드루이드령 최고의 마법사’의 별명을 가지고 있지”
“표면적으로?”
의아해하는 우용에게 군리가 짤막한 설명을 덧붙인다.
군리는 모든 논문과 연구 결과를 라비앙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있었다.
그 결과 라비앙은 ‘드루이드령 최고의 마법사’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그 업적으로마족임에도 불구하고드루이드령 영주권을 따낼 수 있었다.
즉, 라비앙은 군리의 꼭두각시였다.
“어째서 군리 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않는 거죠?그만한 명예를 직접 누릴 수 있을 텐데.”
“하하하!어찌됐든 이 몸은 지금 숨어 있는 몸이야”
우용이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듯, 그녀 역시 친절하게 경위를 밝혔다.
오필리아가 반란에 휘말리고 유리아와 군리는 강경파들의 횡포로 마왕성에서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반강제로 쫓겨나게 생긴 둘은 힘을 합쳐 마왕 부활을 계획했다.
허나 결과는 참담했다.
둘이서는 무리였던 것이다.
그녀들이 되찾을 수 있던 오필리아의 신체 부위는 ‘질투’가 가지고 있던 오른팔 하나가 전부였으니.
실패한 그녀들을 기다리는 건타지에서의 외로운 은둔 생활이었다.
결과적으로 유리아는 인간령으로. 군리는 드루이드령으로 숨어 들어갔다.
“어째서 서로 다른 곳으로 갔습니까? 계속 둘이 힘을 합쳤으면..”
“소년. 행동을 같이하는 동료더라도 궁극적인 목적은 제각기 다른 법이다. 이 몸과 유리아는 ‘마왕 부활’이라는 대의 아래 함께 움직였지만,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여인이 문어 다리를 길게 뻗어 플라스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습관처럼 플라스크의 내용물을 살살 흔들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유리아는 이 파국으로 치닿은 전황을 해결하는데 진심이었지. 허나, 이 몸은 그저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왕 부활을 계획했고, 그래서 유리아와 손을 잡았지. 오로지 마족령의 내 연구실을 지키기 위해서”
마왕성에서 쫓겨난 군리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 몸은 인간령이 아닌, 드루이드령을 선택했다. 유리아와의 협력은 거기서 끊어졌다”
“포기한 건가요?”
“그런 셈이지”
군리는 마왕 부활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였고.
그래서 유리아와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연구를 계속할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그녀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린 것이 바로 라비앙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중립국 드루이드령의 영주권을 따내는 것이었다.
그간 모았던 연구 자료들을 라비앙의 이름으로 발표하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라비앙은 어엿한 로벨하임의 마법사로 자리 잡았다.
그녀가 만들어낸 ‘라비앙’이라는 인물은 ‘최고의 마법사’라는 이름과 명예를 내걸고 갖가지 강연과 서적을 발표했으며, 축적한 금전으로 수많은 연구 자재를 구매할 수 있었다.
군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 인물의 그림자 아래서 그토록 원했던 연구를 실컷 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몸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연구와 논문 발표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지”
결국 ‘탐욕’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
“그렇다면.. 군리 씨의 싸움은 이제 끝난 겁니까?”
우용은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어쨌든 군리는 바라던 바를 손에 넣었고, 이 말인즉슨 그녀가 우용에게 협력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소년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것이군. 그러니까 마물과 인간의 공존에 대해서…”
우용이 던진 질문의 함의를 파악한 군리가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의 답을 들려주지 않았군”
“무슨 말씀을… 아..!!”
“어째서 인간 남성의 정액이 유일한 번식 수단이며, 타 종족과의 수정이 가능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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