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무스를 반대로 착정한다-23화 (23/55)

〈 23화 〉 EP.5 박사 군리 (2)

* * *

“소년. 이 몸은 과학자라네”

그녀가 서랍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보였다.

“그와 함께 독실한 신자이기도 하지”

민무늬의 가죽 표지를 넘기며 그녀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느 과학자들이 그렇듯, 이 몸은 종교를 멀리했었다. 본래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는 분야였지. 세계의 원리를 파헤치다보면 종교가 얼마나 덧없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확실히. 종교는 대게 허구의 이야기로 시작되죠”

“잘 알고 있군. 이 몸도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왔었다. 이 곳, 드루이드령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드루이드령은 엄밀한 종교국가였다.

당연히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이세계에서까지 종교라니.

지난 5년을 바쁜 ‘미끼’생활과 마법 연구에 매진했던 우용에겐 너무나도 먼 얘기였다.

물론 이 기구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었고, 그만큼 세계정세에 관해선 빠삭한 편이긴 했지만. 언제나 마족령과 인간령에 한해서였다.

“태고의 존재, 아담이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이세계의 성경책으로 예상되는 책의 한 구절을 훑어보았다.

“그는 세상에 등장한 최초의 지성체이자, 최초의 인간 남성이었다. 아담은 빠르게 적응해 이 넓은 대지에서 홀로 살아갔다. 아늑한 거처를 만들었고, 수많은동물들과 친구가 되었지. 그러나, 생활이 안정될수록 그는 어떠한결핍에극심히시달리게 되었다”

그 결핍이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라는 군리의 눈빛.

잠시간 고민한 우용이 답을 내놓았다.

“외로웠던 겁니까?”

흔히들 의식주만 해결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람에겐 사람이 필요하다.

삶이 아무리 풍족하여도 그 행복을 나눌 누군가가 없다면,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이고 허무함만이 남는다.

삶이 아무리 고되도 그 고통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있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대화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창조한 여신에게 기도했고, 그 결과 세 개의 씨앗을 받을 수 있었다”

“세 개의 씨앗이라니. 설마..”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군리가 말꼬리를 잇는다.

“감이 좋군. 그렇다. 아담은 양지바른 곳에 씨앗을 심었고, 그곳에서 태어난지성체가 바로 현존하는 여성의 선조가 되는 것이지”

지혜의 씨앗에선 인간이.

관용의 씨앗에선 드루이드가.

자유의 씨앗에선 마족이.

“아담은 이들과 사랑에 빠졌다. 인간 여성에게서 지혜를 배울 수 있었고, 마족으로부터 자유의 기쁨을 알 수 있었지. 언제나 관용을 베푸는 드루이드는 어머니와 같은 포근한 존재였다”

아담에겐 자신을 용서해주는 ‘어머니’가 생겼고, 자유를 함께하는 ‘친구’가 생겼으며, 지혜롭게 힘을 합쳐 세상을 나아갈 ‘애인’이 생겼다.

여기까진 아름다운 이야기라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이념과 가치관의차이는 다툼을 만든다.태고의 여인들은 아담을 두고 점차 다투기 시작했지”

다툼은 나날이 격해졌고,

결국 아담은 싸움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의 창조물이 죽자 분개한 여신은 그녀들에게 벌을 내렸다”

그 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우용에게 묻는 군리의 눈빛.

“죽인 건가요?”

그 태고의 존재를 죽였다면 지금 이렇게 지성체와 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무지성으로 대답한 우용은 이내 이를 깨닫고서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하하..역시 아니겠죠”

“죽음도 외로움도 아니다. 바로 영원한 다툼이다“

여신은 그녀들이 영원히 다투도록 이 세계에 어떠한 ‘제약’을 걸었다.

그 제약이란 곧, 오로지 인간 여성만이 남성을 낳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아담이 목숨을 잃었을 당시 여인들은 제각기 아담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남성을 낳은 여성은 인간이 유일했지”

그렇게 싸움은 또 시작되었다.

타종과는 비교 불허할 성욕을 지닌 마족의 특성 역시, 다툼을 촉발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에 불과했다.

“이 이야기대로라면… 지금의 다툼을 마냥 남자 쟁탈전으로 볼 수는 없겠네요”

“영리하다 소년. 보다 근본적인 무언가가 이면에 있던 셈이다. 네놈이 만들어 보이겠다는 ‘공존’은 이 태고로부터 내려온 다툼을 해결하겠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

“하하하…”

허탈한 웃음이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이렇게 접근하니 참으로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은 건가 싶었다.

그러한 우용을 슬쩍 흘겨보던 군리는 이내 희망을 주려는 듯 드루이드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인간과 마족의 다툼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나, 드루이드들의 처세는 좀 달랐다. 그녀들은 속죄하는 길을 선택했다”

속죄란 즉, 여신이 부여했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

그녀들이 그토록 ‘관용’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툼은 심화되고 자연스레 태고의 이야기는 잊혀져갔으나, 오직 드루이드들만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역할을 관철했다.

그녀들이 내세우는 ‘숲과 관용의 나라’라는 명칭부터가 애당초 종교를 토대로 이름 붙인 것이었으니.

엄밀한 종교 국가로서 나름대로 속죄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중립국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결코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다.

누구 편에도 들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방문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영주권 제도를 내세웠다.

이 모든 것은 ‘관용’을 지키기 위해서.

“어찌 보면 방관이지 않습니까? 그녀들은 결국 전쟁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확실히 그건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군. 중립국으로서 싸움을 말리려고 들지도 않으니까. 그녀들은 언제나 기다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모두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날이 올 때까지”

여하튼, 아직 제대로 드루이드령을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우용은 그녀들의 가치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좀 이야기가 길어졌군. 허나 인간과 타종의 수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꼭 한 번 되짚을 필요가 있었지”

그녀는 우용에게 책을 건넸다.

얼마나 많이 읽었으면 너덜너덜해진 가죽 표지가 떨어지기 직전이다.

길었던 설화가 끝나자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난 타종 간 수정에 대해서 연구를 계속하던 중이었고, 그 시기는 곧 이 몸이 드루이드령에 발을 들인 시기였다. 어디까지나 영주권을 따기 위해서였지만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정말이지 천운이었어”

막혔던 연구를 풀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본 것이 로벨하임 성경의 독서였다.

“나도 처음엔 코웃음쳤었다. 이 몸이 그토록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를 이 허구의 이야기는 여신의 존재와 씨앗의 존재로 단 번에 풀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

“대부분의 과학자가 그렇듯 이 몸도 과학에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과학을 그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정도로만 보고 있다”

그녀가 정확히 어떠한 연구를 하고 있는진 알 수 없었다.

우용이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중요한 것은, 우용과는 비교도 알 될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지닌 군리가 직접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머지않아 과학적수단으로도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라 얘기했다.

자신의 손에 의해서.

“여하튼 소년이여. 이 몸이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내겐 과제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세계에 연구 결과를 발표할 과제가”

그 결과를 토대로 설화는 현실이 된다.

이를 받아들인 마물과 인간은 본래 있어야 할 제자리로 돌아간다.

지금의 드루이드들처럼.

그렇게 되면 다툼은 자연스레 종결될 것이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숙명인 게야. 세계에 납득시켜야만 하는 것이지”

즉, 군리는 공존을 추구하고 있다.

“…제게 힘을 빌려주신다는 겁니까?”

“후후후…이걸로 내 생각은 전해졌다고 보면 되겠군”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었던 유리아도.

종교를 관철하며 중립을 지키는 드루이드들도.

설화의 신빙성을 과학적으로 주장하려는 군리 박사도.

제각기 나름대로의 다양한 방법으로 다툼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용이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라비앙에게 말해두도록 하겠다. 그녀 밑에서 배우거라. 전부 배운뒤에, 이 몸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군리가 입맛을 다셨다.

여덟 개의 문어 다리가 요염하게 꿈틀댄다.

그 의미를 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물을 반대로 착정한다 하지 않았느냐.후훗.. 이 몸은 군단장이다. 네놈의 포부를 위해 꼭 넘어서야할 존재인 것이지”

“…!!”

그렇다.

그녀는 우용이앞으로착정해야 할 존재들과 버금가는, 강력한 마물.

만약 그녀를 착정할 수 있다면.

곧 있을 여정의가능성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하하하, 두고 보세요”

“후후후♡ 기대하도록 하겠다”

다시 한번 게걸스럽게 입술을 훑는 군리 박사.

고고한 외모와 딱딱한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다.

“아,마지막으로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그날 이후, 우용에겐 일종의 습관이 생겼다.

“유리아에 대해서..”

그것은 바로 만남이 있는 족족 유리아의 소재를 묻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오필리아에게도 물어봤었다.

오필리아는모른다고 답했다.

애당초 남정네 말곤 관심이 없는 여편네다.

허나 군리라면 다르지 않을까.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녀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좋다 소년. 합격 선물은 그걸로 하면 되겠군”

아니나 다를까.

“…역시! 무언가 알고 계시는 게 있는 거군요!”

허나 바로 가르쳐 주진 않는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지만,이윽고 군리의의도를 알아챈 우용은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용의 각성과 확고한 목적의식을 위한 일종의 장치였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도 그럴게 합격 선물이라니.

“과연, 최고의 동기부여입니다 교수님. 의욕이 아주 팔팔 끓네요”

지금 제아무리 발을 동동구른다고 바뀌는 건 없다.

유리아가 염원했던 세상을 이룩하려면, 그만한 힘을 먼저 갖춰야 한다.

지금은 그녀를 잊고 최고의 스승 아래서 실력 향상에 매진해야할 때다.

실로 현명한 군리의 처세에 불알을 탁 치며 우용이 연구실을 나섰다.

‘문어 교수. 내 어떻게든 혼절시켜 주리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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