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EP.7 뜻밖의 재회 (2)
* * *
내심 간절히 빌었다.
저 거구의 늑대 여인이 제발 자신을 기억하지 않기를.
그녀가 기억하지만 않는다면 뻔뻔하게 현지인 행색을 연기할 생각이었다.
허나 어림도 없다.
웨어울프 역시 곧바로 우용을 알아보았다.
흔하지 않은 검은 머리칼과 이계인다운 훈훈한 외모는 그날 설원에서, 늑대의 뇌리에 깊이 박혔었다.
“…!!”
점차 동공이 커지는 그녀의 두 눈.
우용에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네..네 놈은..웁!!:
일순간에 달음박질쳐 그녀의 입을 투박하게 막는다.
“우웁..!!”
그대로 등허리에 손을 감싸 낑낑대며 오두막에서 끌고 나왔다.
근육질의 건장한 체격이 마치 목석과도 같다.
단언컨대. 힘으로 감당할 만한 여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약한 인간의 손에 의해 이렇게 끌려 나왔다는 건.
그만큼 그녀도 이 뜻밖의 재회가 당황스러웠던 것이었다.
하긴, 있어선 안되는 남정네가 마물들 사이서 떡 하니 기다리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
오두막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아래.
“후우…”
우용이 한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방문자가 웨어울프 뿐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달려 나올 필요는 없었다.
우용의 정체를 알고 있는 라비앙, 그리고 라크스와 합심해 어떤 수로든 웨어울프를 지지고 볶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제3자가 있었다.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로 합숙생일 것이다.
이 오두막을 찾는 도중 만났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같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웨어울프 곁에는 드루이드령 현지인으로 보이는 수녀 복장의 엘프가 함께 서 있었다.
아직은 그 수녀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는 이상, 이렇게 강압적으로 오두막을 뛰쳐나오는 게 최선이었다.
웨어울프의 발언으로 섣불리 정체를 들켰다가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애송이.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걸까?”
이내 당혹스러움이 가라앉았는지 우용의 손을 냅다 뿌리치며 늑대가 물어왔다.
“크윽…”
우용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어라 얘기해야 할까.
일단은 무작정 데리고 왔지만 그럴싸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라크스는 우용과 주종 계약이 되어 있는 완벽한 아군이다.
군리 박사는 오필리아의 소개로 인해 처음부터 우용과의 협력 관계가 보장되어 있던 여자였다.
군리의 꼭두각시인 라비앙은 두말할 것도 없다.
허나 웨어울프는 그녀들과 다르다.
그녀가 우용에게 조력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핫! 고민하고 있는 거야?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거구나!”
“그럼 당신은 왜 여기 있지? 한창 전투 중이 아니었던 건가?”
“강해지기 위해서 우두머리 자리를 넘기고 빠져나왔어. 그 만인장 계집의 얼굴이 아직도 꿈에서 나온다고!!”
분한 기색으로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새 재생된 걸까.
붕대는 하고 있지만 완전히 잘려나갔던 당시의 기억과 비교해보면 멀쩡하게 팔이 달려있다.
“자, 내 이유는 단순하지? 그럼 너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웨어울프.
광기 가득히 올라가있는 눈꼬리가 우용의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난…”
입을 열었으나 또다시 목소리가 막힌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터무니없다.
우용은 ‘미끼’로 활동했던 이계인이다.
그 자유롭지 못한 신분으로 드루이드령에 와있는 건 둘째치고,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우는 여인의 오두막에서 함께 마법을 배우기 위한 학생으로 만나다니.
대체 어떻게 둘러대야 넘어갈 수 있겠는가.
누군가에게 들키면 마땅히 변명할 구실이 없다는 사실을 우용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지껏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아예 전부 털어놓고 납득을 시키거나.
아니면 애초에 완벽히 정체를 숨기거나.
전자는 라크스와 라비앙, 군리처럼 조력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을만한 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방식이었다.
후자는 위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 완벽한 타인을 대상으로 취해온 방식이었다.
‘허나 눈앞의 웨어울프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우연’이 초래한 난관이라 볼 수 있겠다.
“흐음…”
끙끙대는 우용을 보다 못한 웨어울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애송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답답하고 복잡한 건 질색이야. 단순한 게 최고지!”
단순한 게 최고라.
그래.
웨어울프들은 전부 이런 녀석들뿐이다.
단순 무뇌.
호탕한 말투.
다소 다혈질이고 호전적인 성격과,
그로 인한 승부사 기질.
무엇보다.
멍청한 만큼 감이 좋다.
“내 감이 말하고 있어. 네놈은 지금 내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우용을 가리키며 그녀가 다시 한번 씨익 송곳니를 드러내 보인다.
‘미끼’ 생활을 하며 얼핏 주워들은 바, 한 달이나 되는 긴 발정기가 그녀들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격월을 주기로 앞뒤 가리지 않고 ‘착정’만을 생각하다 보니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보다 ‘직감’에 의해 행동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렇게 멍청스러운 면모를 지니게 된 반면, 그녀들의 본능적인 감각은 타종보다 월등히 정확도가 높았다.
“하아..”
한 마디로 어설프게 숨겨봤자 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웨어울프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도망쳤어. 어때, 단순하지?”
“하핫! 좋아좋아! 그거다!”
놀랍게도 이 짤막한 대답으로 연신 끄덕이며 납득하는 웨어 울프.
심히 만족스러운 표정, 그 뒷켠에는 악질스러운 함의가 있다.
“즉, 네놈은 을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겠지.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고 말이야. 난 갑이고, 너는 을이다. 알아들었는지?”
협박이 꼭 똑똑한 작자들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알면 안 되는 상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이것은 타인을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협박의 공식이다.
따라서 그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처음부터 예상했었다.
제아무리 무식해도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거지?”
그녀가 마물인 이상 앞으로 무엇을 요구할지는 뻔한 이야기지만.
이 상황을 타파할 시간을 벌기 위해 굳이 물어본다.
“당연한 것을 묻고 있느냐. 첫째, 네놈은 나의 종복이 된다. 둘째, 내가 원할 때마다 교미를 한다. 셋째, 졸업과 동시에 날 따라 마족령으로 이동한다.”
한 마디로 남편이 되라는 소리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우용에겐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제안은 고맙지만…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할 셈이야?
“네놈이 도망친 사실을 전부 퍼뜨려야겠지! 내 말을 듣지 않고 무사할 것 같으냐?”
말을 듣지 않으면 비밀을 발설하겠단다.
참으로 웨어울프스러운 단순한 수법이다.
심히 단순하지만. 너무나도 강력하다.
“네놈에게 선택지는 없다! 얌전히 내 말을 따를 수밖에”
“…”
와중에도 계속해서 국면을 타파할 방법을 모색하는 우용.
그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웨어울프였다면 어떻게 했을지.
‘아마 자세한 이야기부터 들으려 했겠지’
허나, 눈앞의 웨어울프는 우용의 자세한 정황 따위 관심 없었다.
오로지 우용의 곤란한 처지만을 고려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고사하고 그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용은 확신했다.
이 정도로 단순 무뇌라면.
의도가 뻔히 보이는 알량한 꼼수도 어쩌면 먹히지 않을까 하고.
“잠깐…”
처음부터 승자가 정해져있는 뻔한 승부도 가끔가다 뒤집혀질 때가 있다.
우위에 서 있는 자의 안일함 혹은 방심으로 인해 전세가 뒤바뀌곤 한다.
그렇다.
안일함과 방심.
이런 답이 없는 상황을 기적적으로 벗어나려면 잔머리를 굴려 그녀의 방심을 유도하는 수밖에 없다.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고, 그것을 내세워 방심할 틈을 만들면 된다.
제 발로 굴러들어온 먹잇감을 보류할 정도로 달콤한 유혹이 있다면.
어쩌면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멍청한 늑대 여인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
강한 힘, 전투, 그리고 남편.
이외에도 웨어울프들의 대표적인 습성들을 되짚어 본다.
단순 무뇌, 다혈질, 호전적인 성격.
‘찾았다’
마침내 우용이 떠올린 건.
웨어울프의 지독한 ‘승부사 기질’이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지만. 이대로 끝낼 셈이야? 재미없게?”
“재미? 재미가 없다고?”
“그러니까. 가뜩이나 흥미로운 상황인데 그냥 이렇게 끝내면 아깝지 않냐고. 허무하잖아”
“아깝다…아깝다…”
적당한 도발에 마냥 헤죽거렸던 늑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난 뭐, 아무래도 괜찮지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지만.
능숙한 완급 조절은 더욱이 그녈 자극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단순한 사고방식 덕에 가능하다.
이제 결정타를 날릴 때다.
“그래. 승부라도 하면 재밌을 수도”
“승부? 지금 승부라고 말한 건가? 하핫! 확실히 그건 재미있겠군”
승부라는 단어에 일순간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녀.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우용이 밀어붙인다.
“나와 승부하자. 재밌겠지?”
“좋은 제안이다! 네 녀석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재미 보는 법을 잘 알고 있어. 허나 승부를 할지 안 할지는 어디까지나 내 선택에 달려 있지. 먼저 그 승부의 내용부터 들어봐야겠군”
만약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용의 제안은 필히 거절당할 것이다.
“승부의 내용은…”
여기까지 유도한 이상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렇게 도발해놓고 막상 패배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우용 본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승부를 걸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와 동시에 상대가 방심할 만한 분야를 내세워야 한다.
늑대 쪽에서 불리하다고 생각 드는 순간, 아무리 무지성의 그녀라도 질 싸움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거쳐가는 유흥으로 다가가게끔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즉, 기본적으로 늑대의 구미에 맞아야 하고,
방심을 유도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유리하게끔 보여야 하고,
우용에게 절대적으로 승산이 있어야 한다.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착정’
“나와 교미하는 거다. 먼저 실신하는 쪽이 패배. 어때. 단순하지?”
“푸하하핫!!”
귀청 떨어질 정도로 크게 비웃는 웨어울프.
“진심? 그대,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 방금 했던 말 취소. 알고 보니 멍청한 녀석이었군. 특별히 기회를 한 번 더 줄게. 너무 쉽게 이기면 재미없으니까”
“아니, 바꾸지 않는다”
가소롭기 그지없는 표정이다.
그녀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다.
도리어 인간 쪽에서 먼저 착정으로 승부를 걸다니.
그 어떤 마물이더라도 우용을 미친놈 취급하리라.
“호오…결과가 뻔할 텐데…”
“걱정 마. 재밌게 해줄게”
적당한 도발로 마무리한다.
승리를 확신하는 그녀를 보며 우용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방심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계약은 주종 마법으로, 어때?”
“좋지. 그보다 네놈. 마법을 쓸 줄 아는 것이냐?”
“그건 걱정하지 말고. 중요한 건 승부야”
“하핫! 좋다! 그 기세! 어차피 내가 이기겠지만!”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겠지.
그저 일종의 유흥거리라고 생각하겠지.
실제로 웨어울프는 이미 신혼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니.
우용과의 승부는 그 과정에서 재미를 좀 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재밌는 오락거리 하나 건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두고 보자’
우용이 주먹을 쥐었다.
그 안일함이 웨어울프를 패배로 이끌 것이다.
방심을 이끌었으면 이제 상황을 뒤집을 일만 남았다.
“장소는 오늘 밤. 숲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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