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무스를 반대로 착정한다-38화 (38/55)

〈 38화 〉 EP.9 거짓된 세계

* * *

이른 아침 체력 단련.

하루 종일 마법 수련.

저녁 식사 이후 주술 연구.

취침 전교미 훈련.

이러다 진짜 과로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그동안 이렇게 열심히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수능을 앞둔 대한민국 고3, N수생의 심정이 이러할까.

이제는 잠을 잘 시간도 없다.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자유 시간마저 주술의 연구를 위해 반납했다.

세 번의 식사 시간과 하루 5시간의 숙면이 우용의 유일한 쉬는 시간이었다.

즉, 밥만 먹고 자기개발 중이라는 말이다.

­파르륵

­탁탁

우용이 책상 위에 어질러져 있는 종잇장들을 한 데 모아 정리했다.

자물쇠의 설계도가 빼곡히 적혀있는 종잇장들.

마법을 독학하거나 자지 족쇄를 분석할 땐 재미라도 있었지.

이건 그냥 노가다다.

읽고, 보고, 수용하는 것보다 공급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힘든 법.

유사 창작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니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가 더욱 땡긴다.

그래도 이 꾸준한 노력은 언젠가 분명 ‘첫 삽입의 법칙’을 깨뜨릴 우용만의 주술이 될 것이다.

“끄허어...”

아슬아슬하게 하루 목표치를 달성한 우용이 앓는 소리와 함께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취침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간.

우용에게는 교미 훈련이 예정된 시간이다.

허나 오늘은 지하에 위치한 라비앙의 개인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따로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우용의 발걸음은 좁은 계단을 내려가 오두막의 거실로 향했다.

“오셨군요”

“와악. 깜짝이야”

우물 옆에서 라비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소등된 상태인 만큼 꽤 어두웠기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조용히 하세요”

“뭐 그리 기척을 죽이고 계셔요?”

“그럼 신나게 떠들까요? 이 아래 거대한 문어가 있다고”

­스스스스

라비앙이 검지를 내밀어 허공에다 원을 그린다.

그녀가 그린 원의 크기만 한 물방울이 생성되었고, 자그마한 물방울이 점차 부풀더니 우용의 몸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꾸르륵..

비눗방울처럼 내부가 비어있는 구조이기에 질식할 걱정은 없다.

“그럼 다녀오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라비앙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흩어졌다.

외부 소음이 차단된 유리관에 갇혀있는 느낌이다.

이내 우용을 실은 물방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꾸르르륵

­풍덩

재빠르게 우물의 깊은 곳으로 하강했다.

*

우물 물의 연둣빛이 점차 진해지며 짙은 푸른빛으로 변한다.

에르마가 옅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 영롱한 빛깔을 전부 잃을 때쯤이면 우물 바닥에 도착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심해와 연결된 통로를 빠져나와 또 한참을 이동해야 한다.

깊이 내려갈수록 빛이 들지 않아 주변은 더욱 어두워진다.

물방울 안이라 기압은 변함없을 테지만.

괜스레 귀가 먹먹한 느낌.

“시팔.,, 자칫하다 터지면 진짜 끝이겠는데?”

우용을 둥그렇게 감싼 야트막한 물방울 벽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무섭지 않을 수 없다.

우주 미아가 되면 비슷한 기분일까.

그나마 이곳이 드루이드령이라 다행이다.

인간령이었다면 바다에서 서식하는 마물들에게 발견되어 진작 끌려갔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심해의 경우 은둔하는 마물들의 외양이 특히나 기괴하다.

지구의 심해어들이 외계인과 같은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문득 심해 마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살을 찌푸리던 게브의 표정이 떠올랐으니.

구멍만 있으면 종을 가리지 않고 환장하던 그 게브가 꺼려 할 정도면 말 다 했다.

­꾸르르륵..

여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려가다 보면, 이윽고 심해 바닥에 위치한 둥그런 돔 형태의 유리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군리의 은신처이자 연구소다.

이렇게 위에서 제대로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다.

애당초 이곳에 온 게 이번으로 겨우 두 번째긴 하지만.

그마저도 첫 방문 때는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 제대로 눈에 담지 못했다.

건물의 대부분이 유리로 이루어져 있기에, 생뚱맞은 위치에 덩그러니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망치지 않는다.

“이 늦은 시간에 연구하고 계신 건가?”

유리판 너머로 군리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여덟 개의 다리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꾸륵..꾸르르...

자석에 이끌리듯 연구소의 정문으로 이동하는 물방울.

당연히 지상과 같은 평범하게 여닫는 문이 아니다.

마치 물로 만들어진 장막 같다.

­꾸륵..

­퍼엉

얇은 물 벽을 통과함과 동시에 물방울이 터지며 우용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크헉.. 박사님. 이거 구조가 잘못된 거 같은데요? 방문자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데..”

“하하하!! 내게 농을 던지는 건가? 소년. 새로운 생활에 적응은 잘한 모양이군”

군리가 호탕하게 웃으며 우용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각각의 문어 다리에 들린 형형색색의 샘플들.

처음 보았던 그녀의 모습 그대로다.

“이른 늦은 밤까지 고생이 많네요, 연구는 잘 되고 계신 겁니까?”

“언제나 똑같지.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마주하는 건 이걸로 두 번째에 불과하지만 군리에게는 여러모로 고마운 점이 많다.

뒤에서 조용히 밀어주는 어머니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런 다정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고요하게 뿜어내는 짙은 마기가 또 반전이기에.

여러모로 이끌리는 여자다.

거대하고 징그러운 문어 하체가 꺼림칙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수족관과 같은 연구실의 풍경을 잠시 둘러보던 우용의 시선은 다시금 군리를 향했다.

우용이 이곳을 방문한 건 군리의 개인적인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궁금했다.

정보건 물건이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라비앙을 통해서 전달하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직접 부른 이유가 뭘까.

“먹음직스러운 소년과 만나고 싶어서 그랬지”

“먹음직이라뇨. 하하.. 그보다 라비앙 선생님의 시야로 충분히 보시잖아요”

“우매하다 소년. 그림으로 음식을 본다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별 의미 없는 농을 주고받다가, 군리가 서랍에서 책자 하나를 꺼냈다.

“군단장들에 대한 정보다.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꽤 도움이 될 게야. 그래도 한때 업무를 같이했던 작자들이었으니까”

“아아, 감사합니다 박사님!”

“한데 소년. 무언가 잊고 있는 건 없는가?”

이런 부류의 질문은 대게 불안하게 만든다.

싱글벙글했던 우용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차 가셨다.

“예? 잊고 있는 거라...”

모르겠다.

표정이 굳어 머리를 쥐어싸매는 우용을 보며, 군리가 별일 아니라는 듯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라네. 소년이 이곳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을 뿐이지”

“시간 빠르네요. 벌써 한 달... 어?”

첫 방문자에겐 25일의 체류가 허락된다.

더 머무르고 싶다면 로벨하임의 수도를 방문해 연장해야 한다.

“벌써 5일이나 지나버렸는데...”

한 마디로 현재 우용은 불법 체류자다.

“미치겠네. 이거 범죄 아닌가요? 이런 어이없는 사유로 로벨하임에서 쫓겨나는 겁니까?”

“그건 상관없다. 그 정도는 시원스레 넘어가 줄 것이다. 여긴 ‘관용’의 나라니까”

“그런가요? 거참 적당하네요. 최고다 로벨하임!”

“오늘 소년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다”

며칠 늦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어지는 군리의 말이었다.

“아리아와 함께 가거라”

“예..?”

여러모로 의미를 모르겠다.

말 거는 족족 무시하는 그 불편한 엘프랑 함께?

대체 어떠한 이유 때문에?

그 이유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아리아 역시 체류 기한을 늘려야 하지”

“무슨 소리입니까? 분명 그녀는 드루이드령 현지인일 텐데”

“드루이드령 현지인이었다”

이었다니.

과거에는 현지인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이는 라비앙도 모르는 사실이라고 했다.

섣불리 발설해서도 안는 정보였다.

때문에 이렇게 직접 불러서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아리아의 비밀을 어째서 우용에게 귀띔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무언가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나도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아는 건 아니다. 확실한 건, 아마 네놈과 잘 맞을 것이다”

“그래도 같이 가라니.. 제 표면적인 신분은 여성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그 정도는 알아서 하라는 군리의 일침에 멋쩍은 듯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합숙해야 할 사이니 가까워지면 더욱 좋을 테고”

아니, 그러니까 가까워지기는 이미 글러 먹었다니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제3자가 눈치 없게 행동했을 때.

마치 그러한 경우의 피해자가 된 느낌이다.

우용도 이 나이 먹고 유치하게 투덜거리기는 싫었지만 어쩌겠는가.

말 수 적은 수녀 엘프의 차가움을 잘 알고 있는데.

나름대로 용기를 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전부 허무하게 무시당했었다.

함께 있으면 숨 막히는 상황이 연출될 건 안 봐도 비디오다.

“드루이드령이 어떠한 곳인지도 좀 둘러보거라. 필히 좋은 경험이 될 게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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