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EP.9 거짓된 세계 (2)
* * *
아침 체력 훈련이 예정된 시간보다 반 시간 이르게 일어났다.
잠들기 직전 미리 짐을 챙겨서여유롭다.
짐이라고 해봐야 위조 신분증과 갖가지 변장품들이 전부다.
라크스는 데려가지 않는다.
일행으로 묶인 경우 둘 중 한명만 가서 신고해도 된단다.
이 어찌 적당한 취급인지.
물론, 그녀에게 얘기하진 않았다.
얘기할 시간이 없었을뿐더러, 엘프와 단둘이 간다고 말하면 오열할 것이 분명하기에.
“하아…”
기분이 썩 개운치 않다.
강제로 등이 떠밀려 소개팅 자리에 나가는 심정이랄까.
심지어 상대의 붙임성 없는 성격을 알기에 더더욱 답답하다.
가슴을 달래고자 담배를 한 대 태울 겸 오두막 밖으로 나섰다.
“어…”
그곳엔 물방울을 타고 공중에 떠있는 라비앙과,
화가난 듯 먼 곳을 응시하는 아리아가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담배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는 우용.
조심스레 라비앙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물어보았다.
“그…알고는 있는 거죠? 저랑 같이 가는 거”
“방금 붙잡아서 얘기했어요. 혼자 가려고 하길래”
“방금이요? 하아…”
라비앙의 적당한 일처리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하아..대체 일을..”
한바탕 한소리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
우용을 향해 고개를 돌린 엘프의 눈초리가 따가웠으니까.
“크흠.. 지, 짐들고 오자마자 출발하겠습니다 선생님”
*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애당초 영토 자체가 작다.
작지만 강한 중립국, 로벨하임은 인간령 발렌시아의 오분의 일 정도밖에 안되는 크기다.
현재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마족령 그란디스과 비교하면 무려 열배의 차이가 난다.
게다가 지룡은 빠르다.
드루이드령의 자연친화적인 환경에서 서식하는 지룡은 전력으로 질주했을 시 라크스에 준하는 속도를 자랑한다.
물론 승차감을 위해 전력질주를 시키진 않더라.
여하튼, 라비앙이 제공한 용차덕에 생각보다 편한 여행길이 되었다.
“…”
“…”
정정.
몸만 편하다.
공기는 무겁다.
대체 저 수녀 엘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반나절 가까이 이동하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무시당한 이후로 건들지 않기로 마음을 내려놓았기에 별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오래간 함께 있어보니 정신적으로 무리였다.
딱히 잠을 자는 것도 아니다.
사념에 잠겨 창가를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무슨 도를 닦는 것도 아니고,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좀 심술궂게 행동해봤다.
일부러 노골적으로 쳐다보기도 하고,
관심을 끌어보고자 대놓고 흡연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니까.좁은 용차안에서 자욱한 연기를 뿜어봤다.
좀 너무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 무시할지 궁금했기에 우용은 일부러 망나니처럼 행동해 보았다.
갈때까지 가보자는 마인드로.
작게 기침을 하긴 하더라.
허나 기대했던 욕지거리는 날아오지 않았다.
자그마한 계획이 실패하고 남는 건 죄책감 뿐이었으니.
그 이후론 우용도 그냥 죽 닥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혼자 병신된 셈이었다.
그래도 줄곧 손님을 상대하는 일을 해오며 나름 인간관계에 있어 자신있는 편이었는데.
실로 예상밖의 난관이었다.
“자자,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그렇게 별다른 사건없이 허무하게 도착했다.
아, 소득이라면 하나 있었다.
중간중간 흘겨본 결과, 그녀는 귀여운 습관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손목에 걸린 팔찌를 몇 번이고 수시로 만지작거리는 걸로 보아 꽤나 소중히 여기는 모양이었다.
*
드루이드령, 로벨하임의 지역명은 전부 교회에서 따온다.
해당 지역구에서 제일 역사가 깊고 영향력이 큰 교회명이 곧 지역명이 된다.
우용과 아리아의 목적지인 ‘카포티아’ 역시 예외는 아니다.
로벨하임의 수도, 카포티아에는 당연히 카포티아 성당이 있다.
참으로 종교 국가다운 방식이었다.
지구 현대인의 사상에 따르면 종교와 정치는 엄연히 독립되어 있어야 하는 게 옳다고 보지만.
이곳은 완전히 그 정반대다.
종교와 정치의 완벽한 일치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드루이드령, 로벨하임이다.
그렇다고 마냥 어색하기만 하지는 않다.
먼 옛날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
종교와 정치가 겹치는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물론, 그 경우 정치판이 심히 더러웠었지만.
그래도 이세계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실제로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라니.
새하얀 건물들이 많은, 그리스와 같은 지중해 국가의 마을을 보는 듯하다.
‘숲의 나라’라는 별칭과는 어울리지 않게, 시골에서의 초록초록한 느낌은 확실히 덜하지만.
로벨하임의 수도는 또 도시만의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야…이거지”
이 기구한 세계에 떨어진지 벌써 5년 차지만일반적으로 상상해오던, 제대로 된 이세계의 풍경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가지각색의 가게를 연 상인들이 있고, 행상인과 행인들의 수는 압도적이다.
상권이 발달한 이유는 간단하다.
유일무이한 중립국인만큼 갖가지 무역품들이 몰려드니까.
인간령에서 구할 수 없는 마족령의 물품을 여기선 살 수 있다.
그 반대로, 마족령에선 살 수 없는 인간령의 물품을 여기선 살 수 있다.
때문에 외래 방문자가 많다.
상권이 집중되어 있는 만큼, 로벨하임의 수도 카포티아에는 외부인이 특히나 많다.
현지인과 인간 여성, 마물의 비율이 동일할 정도.
실로 난잡하기 그지없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깨끗하다.
시끌벅적할 법도 한데 생각보다 조용하다.
대부분 무식하게 언성을 높이기보다 조곤조곤 대화하는 편이었다.
뭐랄까. 선진국 느낌이 물씬 풍긴다고 해야하나.
그만큼 시민 의식이 뛰어나고관리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겠지.
제일 눈에 띄는 녀석들은 역시 인간 남성이었다.
놀랍게도 길거리 행인의 열의 아홉은 인간 남성이었다.
인간계처럼 비인간적인 제도와 어처구니없는 관리는하지 않는듯하다.
듣던 대로 자유롭게 거리를 다닐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전부 현지인이다.
지구로부터 소환된 ‘이계인’은 어디까지나 인간령 고유의 제도로 인한 산물이었으니까.
여하튼 이곳, 드루이드령에 한해서 아주 기괴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인간 남성들이 마물 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도덮쳐지지 않는다.
착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치안 끝내주네’
섣불리 사고를 일으키다 입국을 제한당하면 확실히, 인생에 있어서 큰 손해일 것이다.
그래도역시 마물은 마물이다.
작게나마소란을 일으키는건역시, 상대적으로 천박하고 교양없는 마물들이렸다.
남성이 지나갈 때마다 너도나도 눈치를 보는 동안, 녀석들은 상대가 들을 수 있도록 시원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머. 저기 봐. 딸들의 남편일까?”
“처음보는데.. 이 근방 사람이 아닌가봐”
“우후훗. 저 정도 외모면 ‘미끼’일수도?”
“에잉~ 이계인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무렴 어때. 추릅…”
시선이 따갑다.
그렇다고 우용을 향한 시선이 꼭 마물뿐인것만은 아니다.
현지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마물들과는 달리 섣불리입을 열진 않는다.
참는다고 해야하나.
격식을 지킨다고 해야하나.
천박한 마물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말을 걸고 싶어 죽겠다는 눈초리지만, 그게 또 속내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게 귀엽다.
여하튼,그렇게 부담스러운 관심 속에서 멍청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드루이드령 현지인. 아니, 현지인이었던 아리아를 따라 졸졸 따라가던 중 건물에 가려져있던 성당의 모습이멀찌감치 들어왔고, 동시에 그녀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해가 저물 때 여기서.”
어찌 이리 감격스러울 수가!
최근들어 처음 들은 그녀의 목소리다.
그나저나 너무 차가운 거 아니냐.
오랜만에 입을 열었으면 적어도 말은 끝까지 하라고.
이 짤막한 한 마디를 끝으로,
아리아는 수녀복의 베일을 눌러 쓰고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과연. 따로다니자는 거구나.
그래도 돌아갈때다시만나자는 걸 보니라비앙 선생의 말은 꽤나 잘 듣는 모양이다.
이거 원.
사실은 따로 다녔다고 일러바치면 꽤나 곤란해할거 같은데.
그래도 그렇게 유치한 짓은 하지 않는다.
안그래도 바닥을 치는 호감이 더욱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
오히려 좋다.
아무런 방해 없이 변장이 가능하다.
남성의 신분을 숨기면 좀 더 자유로이 드루이드령을 쏘다닐 수 있을 것이다.
*
일은 수월했다.
입국 심사 때와 같이 별다른 문제 없이 시원스럽게 진행되었다.
되레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난 게 탈이다.
아리아와 합류하기까지 반나절 가까이 남았다. .
변장한 꼴로 정처 없이 서성이다 익숙한 알코올 냄새에 이끌려 주막으로 들어갔다.
굳이 아리아를 찾으러 돌아다니진 않는다.
어차피 수녀 엘프와의 관계 진전은 글러먹었으니.
주막이라도 들러 술한잔 하다가 시간이나 뻐길 생각이었다.
주막.
여느 게임이나 영화에서처럼모든 이야기가 몰려드는 곳.
자유로이 이렇게 술집을 올 수 있다니.
이건 또 신선하다.
손님으로 술집을 들어온 지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인간계에서는 부자유스러운 생활로 인해 불가능했다.
뭐, 아이러니하게도 복지는 최고여서 온갖 이계의 술을전부 접해볼 순있었지만.
여하튼,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되고서도 바삐 훈련하느라 숨을 돌릴 틈이 없었으니.
한 마디로 달콤한 휴가다 휴가.
문득, 드루이드령을 둘러보라는 군리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전부 그 넓은 아량 덕입니다.
여기서 제자는 술이나 쳐마시고 있겠습니다.
딸랑
나무판자를 이어붙인 허름한 문을 열어젖히자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엎어진 신발 주막에 어서 오세요~”
제대로 된 손님 취급이라니.
홀로 감격에 젖어 카운터 앞, 일자로 길게 늘어선 탁자에 앉았다.
조용히 주변을 둘러본다.
지구의 칵테일 바와 언뜻 비슷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엉성하다.
우용의 방을 들렸던 손님들이 신선하다며 극찬했던 것이 괜한 이유가 아니었다.
꼴에 바텐더 생활 좀 했었다고 구조적 문제점들이 속속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전반적으로 낡고 허름한 분위기인 게 역사가 좀 있는, 어엿한 지역 술집인 듯하다.
“수제 맥주 한 잔 주세요”
술집의 역량을 평가하는 덴 역시 가게에서 직접 조주하는 맥주 되겠다.
미끼 생활을 하며 수집한 술병만 백여 개.
상표가 붙어 있는 보급형 술들의 맛은 익히 잘 알고 있었으니.
때문에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지역 술집 고유의 ‘수제’라는 수식어는 우용에게 있어 의미가 남달랐다.
당연히 안주는 보류한다.
술의 향에 집중하기 위해서 첫 잔은 그냥 마신다.
우용 나름의 철칙이었다.
술을 구했으면 남은 건 대화 상대다.
물론 고독하게 즐기는 것도 좋지만..
‘낮술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때마침 우용의 바로 옆자리서 술을 마시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우용처럼 로브를 둘러입고 있는, 수상쩍기 그지없는 분위기다.
대게 그런 녀석들이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들고 있는 법.
말을 걸려던 찰나.
술잔을 받아드는 그녀의 손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용’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어였다.
붉은색 비늘로 뒤덮어져 있는 손은 독수리의 것을 연상케한다.
거추장스러운 날개가 달렸고, 날카로운 발톱이 없었다면 분명 하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막 술잔을 받아든 것으로 보아 자리에 앉은지 얼마 안 된 모양.
높은 확률로 이방인이겠지.
아니면 영주권을 딴 마물이던가.
둘 중 하나일 터.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어차피 여긴 드루이드령이다.
다짜고짜 착정당하는 일은 없을 터.
배짱 좀 부려볼까.
“꽤 독한 건데. 술을 즐기시나요?”
태연자약하게 말을 건다.
“…”
천천히 우용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여인.
당황한 낌새는 일절 없었으나, 어째 잠시간 침묵한다.
로브에 가려져 눈은 보이지 않는다.
그 기묘한 느낌에,
허탕 친 걸까 하며 체념하려던 때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