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EP.9 거짓된 세계 (8)
* * *
밤은 춥다.
금가 있는 벽면.
뚫려있는 창.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니라서 더 춥다.
정녕 그 생기발랄했던 카포티아가 맞는 건가.
퀴퀴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뒷골목의 풍경은 흔히들 알고 있는 카포티아의 이미지와 정반대다.
“하하하...이게 뭐 하는 짓이야...”
사지를 대자로 뻗고 드러누운 채 우용이 실소를 터뜨렸다.
차가운 세멘 바닥의 냉기에 뒤통수가 시리다.
오늘 밤, 아리아와 우용은 이 다 무너져가는 허름한 폐건물에서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용차를 보낼 테니 그걸 타고 오세요. 그것도 놓치면 알아서들 하세요? 걸어오든, 기어 오든…
문득 마법진 너머로 씩씩거리던 라비앙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일종의 벌이었다.
몸 상태는 반병신.
당연히 거역은 불가능하다.
그저 욕구가 이성을 앞섰을 뿐이지. 최음에 걸렸다고 잔인하게 따먹혔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공장처럼 정액을 찍어대던 고통은 아직도 생생하다.
“끄흐응...”
눈에 띌 정도로 핼쑥해진 몰골.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
아리아는 우용의 반대편을 향해 새우처럼 쭈그리고 누워 있었다.
“심정이 어때 아리아”
“...전부 끝났어요 전부”
이 모든 게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석하게도, 엉덩이의 허전한 감각이 자꾸만 현실을 상기시킨다.
아리아는 오늘 꼬리를 잃었고 결과는 참담했다.
목숨은 건졌을지언정, 정작 우용을 처리하지 못했다.
어디 그뿐이랴.
라비앙 선생과 의문의 문어 여성에게까지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흐윽...”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하는 아리아.
그 가녀린 등이 애처롭게 들썩인다.
"아리아..."
밤은 길지만 지루할 것 같진 않다.
얘기할 게 산더미였으니까.
*
드루이드령, 로벨하임.
최고의 치안을 자랑하는 만큼 범죄자에 대한 취급도 남다르다.
어딜 가든 붙어있는 현상수배 포스터.
애당초 죄인들의 수가 많지 않아 주민들의 기억에 박제되기도 쉽다.
한 마디로 로벨하임의 범죄자는 화제 인물이다.
개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포스터가 하나 있었으니.
‘케서린 라이드’
여타 범죄자들의 상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작자였다.
몽타주 자체가 눈에 띄었다.
도롱뇽 같기도 하고 공룡 같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지만 파충류 계열 마물임이 분명했다.
드루이드령을 돌아다니는 동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몽타주를 봤었으니.
로벨하임 최고의 정치범은 이미 우용의 기억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캐서린 라이드…”
아리아의 진짜 이름이었다.
변방 시골에서 마법 수련을 받고 있는, 수녀 엘프 ‘아리아 로엔그린’은 거짓 신분이다.
드루이드령 현지인이었던 ‘캐서린 라이드’는 주민 자격을 박탈당하고 입국을 금지당한 사형수였다.
“능력 한번 대단하네.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
그녀의 위조 신분증을 보며 우용이 허탈하게 웃었다.
“대체 뭘 저질렀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이 붙어 있는 거야?”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죠?”
“아리아. 난 너에 대해 진짜로 아무것도 몰랐어. 주막에서 만난 건 우연이었다니까”
도저히 못 믿겠다는 눈초리.
“그럼 저는 뭐가 되는 걸까요. 이렇게 꼬리까지 잘라가면서...”
“그러니까 이 멍청아. 내가 대화하자고 했잖아”
“가면을 쓰고 여자 흉내 내는 사람 말을 어떻게 믿어요? 아무리 봐도 고의적으로 접근했다고 밖에 볼 수 없어요. 그런데도 계속 이렇게 시치미를 떼는 건가요?”
“그건…”
확실히 이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우용의 행동거지는 수상하기 그지없다.
아리아의 오해가 마냥 그녀의 실책만은 아니었다.
“아무튼, 축하해요. 원하는 대로 제 정체를 밝혀 냈잖아요. 어마어마한 상금을 얻게 돼서 좋겠군요”
“…틀렸어... 너의 얘기를 들려줘 아리아. 무슨 말을 해도 믿을 테니까”
대체 이 남성은 무엇을 더 원하는 걸까.
우용이 계속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자, 한참을 뜸 들이던 아리아가 끝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
"말 그대로에요.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저…"
알면 안 되는 사실을 알았다.
그뿐이었다.
그래서 대체 무얼 알았길래 저런 어마어마한 액수를 짊어지게 된 걸까 하고 질문하려던 찰나, 도리어 아리아 쪽에서 먼저 질문해왔다.
"이계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어지는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은,
결코 우용이 편하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여간 찔리는 게 아니다.
표정 관리가 안 된다.
갑자기 이계인이 무슨 상관인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뭐가?”
“이계의 지성체를 떡하니 소환하는 게 말이 되냐고 묻는 거예요”
대뜸 논리의 영역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아리아.
말이 되냐 안 되냐니.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야 마법이 있으니까 가능한 게 아니었던 건가?
“틀렸어요. 마법은 만능이 아니에요. 제아무리 마법이어도 세계의 섭리를 어길 수는 없죠”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것.
이것이 문제였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도 언급하려는 걸까.
여하튼 이계인 소환은 세계의 섭리를 어기는, 한 마디로 균형을 망가뜨리는 행위였고 마법만으로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제물이 필요했다.
“자, 잠깐만...이해가 잘 안되는데 생성 마법들은 많잖아? 그 외 이것저것…”
“물을 만들어내는 수속성 마법도 결국엔 공기 중의 수증기를 이용하는 것이죠.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제물이 필요했다.
지성체 한 명을 떡하니 소환하는 만큼. 그만큼의 질량을 차지하는 누군가를 지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질서를 위해서.
균형을 위해서.
“시팔 무슨…”
금시초문이었다.
이런 얘기 듣도 보도 못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기분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우용 또한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곳에 불려온 것일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나 제물로 바치는 게 아니에요”
우용이 당황해하든 말든 아리아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성체면 되는 거 아니야?”
“이계인은 ‘아무나’가 아니니까요”
문제는 인간의 욕심이었다.
인간령의 '이계인 소환 계획'은 그저 남성 개체수의 충당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이왕 인위적으로 남성을 소환할 거라면, 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개체를 소환하고자 하였다.
마물을 매혹할 ‘미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보다 우월한 2세를 잉태시킬 수 있도록.
좋은 물건일수록 들어가는 비용이 비싸지는 건 당연하다.
즉 이계의 우월한 남성을 소환하기 위해서, 세 종족 중에서 가장 우월한 신체를 지닌 마물의 희생이 필요했다.
허나, 인간령에서 제물이 될 마물들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가능했던 수단은 전쟁 포로를 이용하는 거였으나 그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마물과의 전투에서 생포는 하늘에 별 따기와 같았으니까.
‘미끼’로서 전장에서 활동했던지라 이는 우용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간혹 생포에 성공해도, 당장 필요한 자재를 생산해내는 마물일 경우 제물로서 적합하지 않다.
아드리옴 요새 지하 수용소에 갇혀있는 마물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인간령은 드루이드령에 협력을 부탁했어요”
"제물에 바칠 마물을 위해서?"
"네"
인간령엔 인간들만 거주한다.
마족령엔 마물들만 거주한다.
허나 중립국 드루이드령은 다르다.
세 종족이 한 데 모여 다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다.
그래서 인간령, 발렌시아는 드루이드령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물의 수급을 도와달라고.
“맙소사…”
더 이상 듣지 않아도 결과는 알 수 있었다.
여기 떡하니 존재하는 이계인 강우용, 자기 자신이 곧 그 해답이었으니까.
“아니, 드루이드령은 중립국이잖아...?”
“표면적으로는 그렇죠.”
아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분통함이 드루이드령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지레 짐작 가능했다.
“드루이드령은 신자들을 이용했어요. 예로부터 교회는 고아들을 거두었고, 그중에는 마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요”
“고아…?”
“마물 고아들은 넘쳐나거든요. 현지 인간 남성들은 엘프와 가정을 꾸리지. 마물과의 가정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게 널리 통용되는 사실이에요”
“어째서지?”
“그걸 묻는 건가요?”
하긴, 왠지 모르게 알 거 같다.
똘끼있는 아내에게 잡혀사느니 순하고 헌신적인 와이프를 곁에 두고 싶어 하겠지.
여느 남정네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뒷받침도 포함하여, 인간령의 이계인 소환 계획은 드루이드령의 도움으로 이렇게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진짜 미쳐 돌아가는구나”
“…”
무고한 고아들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제물이 된 셈이다.
“원래는 저도 제물이 될 몸이었어요. 언니가 아니었다면 분명 지금쯤..."
그러고 보니 그 ‘언니’라는 여편네를 입에 달고 있었지.
주막에서 나눴던 담소의 절반도 그 언니에 관해서였다.
"그분은 친언니인가?"
"아니요"
인간령과 드루이드령의 비밀스런 협력이 결탁될 때 이를 거절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게 지위를 박탈당하고, 정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암암리에 살해당했다.
그중에서도 당연 살아남은 자는 있었다.
그들은 교회에 스파이를 심었다.
증거 입수와 함께 실상을 밝히기 위해서.
"언니는 저희 고아들과 달랐어요. 첩보로서 교회에 들어온 여자였죠“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여인은 무고한 소녀들의 앞날을 못 본 채 할 수 없었다.
결국 첩보 임무를 마친 날, 홀로 빠져나와야 했을 그녀는 소녀들과 함께 탈출을 계획했다.
“결국 살아남은 건 언니와 저뿐이었어요”
여인을 고용했던 정치인은 훗날 살해되었고, 그렇게 둘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거짓 중립국, 드루이드령의 기밀을 알고 있는 아리아와 여인은 1순위, 아니 0순위 제거 대상이었으니.
억 소리 나는 현상금과 사형이라는 형벌을 짊어진 채, 거주지 없는 떠돌이 생활이 강요되었다.
그래도 언니와 함께여서 행복했다.
고아원과 교회에서의 나날들이 전부 잊혀질 정도로.
여인과 함께하며 아리아는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사냥하는 법을 배웠고. 여인의 싸우는 방식을 배웠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의 개념에 대해 배웠다.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술맛이 2% 부족했던 이유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중요하다 했었나요?”
“…”
“그 맛은… 이제 영영 맛볼 일이 없어요…”
딱 한 번, 살의가 두 의자매에게 도달했던 적이 있었다.
언니의 도움으로 아리아는 또 한 번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여인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아리아..."
“…”
로벨하임은 ‘관용의 나라’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 몰래 움직이고 있었다.
“…시팔. 인간령에 몰래 협조하고 있었다니. 중립국이 아니었어. 그보다 무고한 소녀들을…”
“쓰레기에요 여긴. 당신네들은 아무것도 모르죠.”
“이 기밀을 알고 있는 건 누구지?”
“인간령 마도협회와 드루이드령 교회의 수뇌부, 그리고 제물의 생존자인 저, …마지막으로 당신 되겠네요”
예상치 못한 사실에 두통이 몰려온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세간에 알려야 하지만, 그게 또 함부로 알릴 수도 없다.
아리아가 알고 있는 건 드루이드령의 존속이 달려 있는 극비 사항.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전쟁의 심화는 불 보듯 뻔해진다.
"진상은 거짓되었다 하더라도 중립국의 존재는 필요해…이건 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데..."
“알아요. 그래서 저는…”
아리아는 역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가녀린 소녀가 끼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국가 간의 문제였다.
그녀의 최선은, 고아원 친구들의 원한을 짊어지고 언니의 사상을 잇는 것이었다.
“이계인 소환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에요. 로벨하임 교회의 수뇌부와 인간령 마도 협회를 막아야 해요.”
원초적 갈등과 전쟁을 해결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불화를 심화시킬 씨앗 하나를 잠재우는 것.
그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힘과 지식이 필요했다.
단기적으로 빠르게 실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변방 시골에서의 폐관 수련은 매력 있는 얘기였으니.
거짓 신분을 이용해 반신반의로 지원했었다.
그렇게 이제 막 여정이 시작되었는데.
모든 것이 꼬여 버렸다.
눈앞의 남자 때문에.
“...전 수업을 그만두겠어요. 소용없어졌으니까”
“…”
*
짧은 시간,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아리아와는 잘 맞을 거라던 군리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거참, 감 하나는 끝내주네..’
확실히, 아리아와는 여러모로 우용과 닮은 구석이 있다.
"아리아. 이미 우린 공범이야"
“..무슨 소리죠?”
“난 말하지 않을 거거든. 네가 평화를 원한다면, 우린 이미 동료라는 거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리아가 어벙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요? 저 어마어마한 금액을 포기하겠다고요? …진심이라고 한들, 라비앙 선생과 그 문어 여인이…“
“날 믿어. 그녀들은 절대 얘기하지 않아"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건데요. 아무도 얘기하지 않을 거라고”
군리의 존재에 대해서 얘기할 순 없다.
다만,
강우용 자신을 희생할 수는 있다.
아리아는 전부 털어놓아 주었다.
그리고 이번엔 우용의 차례였다.
“아리아. 나도 너와 같아. 내가 변장을 한 이유는 너에게 몰래 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 역시..."
카포티아 뒷골목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거짓된 세계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