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EP.11 졸업 시험 (下) (1)
* * *
외부의 빛과 소리가 차단된 심연.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으로 집어 삼켜질까 겁먹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익숙한 귀갓길과 다름없다.
꾸르륵…
이윽고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둥그런 돔 형태의 유리 건물.
군리의 부름이 없어도 곧잘 연구실을 방문했던 우용이었다.
딱히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저 세간과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좋았다.
비밀 아지트 같은 아늑함이랄까.
이 조용한 곳에 있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식는다.
때문에 가끔 힐링이 필요할 때면, 카페를 방문하듯이 공부할 것을 들고 제 발로 연구실에 드나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관계가 가까워질 수밖에.
꾸르륵…
유리판 너머로 내비치는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는 사뭇 다르다.
붉은 문어 다리가 창백하다 못해 옅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
수많은 빨판들이 간헐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고, 눈꺼풀 아래로 가로로 기다란 동공이 보이지만 어째 초점이 없다.
“…주무시네”
활동성 수면.
일명 렘수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이런저런 모습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잠이 없는 그녀에게 있어 수면이란 행위는 특별하다.
생체 리듬에 따른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행위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도 같다.
제대로 된 깊은 수면이 연구 성과에 대한 포상이라면.
저런 짤막한 렘수면은 연구 시작 전 집중을 위한 준비다.
그러니까.
앞으로 있을 무언가에 대한 준비라는 것이다.
연구실에 가까이 다가가자 우용의 마기를 감지했는지 재빠르게 붉은색을 띠며 신체의 활기를 되찾는 문어 여인.
꾸르륵..
입구의 수속성 마법 장막을 뚫고 익숙하게 착지하며, 우용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박사님 저예요”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살짝 잠긴 목소리로 우용의 인사를 받는 그녀.
렘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는 건, 호락호락하게 합격증을 주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와도 같다.
이윽고 잠결에 부스스 떠오른 잔머리를 정리하던 그녀가 우용에게 어제의 소감을 물어왔다.
“그래서 어떠한가. 강경파를 상대해본 후기는”
“뭐랄까. 확신이 섰습니다”
“호오…확신이라.”
대답을 갈구하듯,
군리의 눈썹 한 쪽이 치켜올라갔다.
“어긋난 길로 새는 자들은 많아도.. 결국 나쁜 마물은 없었어요. 적어도 제가 지금껏 만나온 마물들은 전부 그랬습니다. 어제의 머샤크도 예외는 아니었고”
“……”
어젯밤, 머샤크와의 폭풍 교미 직후 곧바로 뻗어버렸던지라 군리와 대화할 시간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어떡하실 겁니까?”
성급하게 굴고 싶진 않았으나, 막상 군리의 얼굴을 보니 질문이 절로 튀어나온다.
“안타깝지만 ‘질투’는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어.”
“……”
어떻게 안되냐는 듯한 우용의 눈빛.
군리는 알고 있었다.
우용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분명 ‘질투’에 대해 좀 더 나은 취급을 바라고 있는 거겠지.
둘의 교미를 관전했던 만큼 이미 우용과 머샤크의 관계는 잘 알고 있는 상태.
제자의 요구를 매정하게 내칠 정도로 군리는 꽉 막힌 스승이 아니다.
“그래도 뭐, 적절한 합의점은 볼 수 있겠군. 소년에게 굴복했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라면 말이야.”
“그녀는 분명 약속을 지킬 겁니다.”
“후후후…그래. 네 녀석의 말대로 ‘여자’가 되었으니까.”
“앗..그건…”
특히나 ‘여자’ 부분을 강조하며 놀림투로 말하는 군리.
쥐구멍이 있다면 곧바로 숨고 싶은 심정이다.
자기도 참,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뭐, 알코올을 들이부은 듯한 화끈하고 몽롱한 상태였으니 별 수 없다.
군단장의 최음효과를 각성으로 받아들일 만큼 내성이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영향이 제로인건 아니니까.
“아무튼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군. 내가 나설 자리는 없었어. 정말로 재울 줄은 몰랐다”
독단적으로 말썽 부릴 땐 걱정 좀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문제없었으니 그걸로 된 거다.
오히려 군리는 우용의 성장한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시간 참 빠르구나. 소년도 참 많이 성장했어. 내 연구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곧 발표할 때가 다가오겠지.”
“전부 노력의 결과죠. 박사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진 제가 옆에서 지켜봤으니까요”
“우후훗…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움직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는군”
순식간에 지나간 지난 세월들을 짧게 되짚다가,
이내 대가 되었다는 듯 군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이 몸도 ‘여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게냐?”
“아이 참…그 얘기는 이제…하하하..”
오늘 우용의 방문 목적은 평소와 다르다.
졸업 시험.
마족령에 진출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
앞으로의 일을 서로 알고 있는 만큼 마음의 준비는 필요 없다.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할 이유 역시 어디에도 없다.
꾸르르륵…
연기가 피어오르듯 스멀스멀 공중으로 피어오르는 군리의 다리들.
그렇게 독립적으로 꿈틀대다 이윽고 동시에 쫘악 펼쳐지며 기지개를 편다.
그 꼴이 마치 바닥을 뒤덮은 거대한 불가사리를 연상케한다.
이내 제각기 다른 속도로 여인의 몸 쪽으로 말려들어가며, 평소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문어 다리들.
다소 신비스러운 광경에 벙쪄있는 우용을 향해 군리가 장난기 서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후훗..♡ 소년. 겁먹었는가?”
“아, 아뇨? 이제 와서 뭘…하하..”
우용이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박사님 그…”
자기도 모르게 턱 막히는 목소리.
자신도 모질이처럼 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막상 때가 다가오니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눈앞의 여인을 혼절시키면 합격일 뿐인 단순한 내용의 졸업 시험.
자연스럽게 상대를 리드하는 건 우용의 전매특허지만, 어째 군리를 상대로는 패시브가 발휘되지 않는다.
“…”
그 능글맞은 우용이 교미를 앞두고 유난히 쭈뼛거리는덴 다 이유가 있었다.
간단하다.
그 지고한 은혜와 존경심 때문이다.
단언컨대 군리는 친근하고 대하기 편한 오두막의 여인들과는 다르다.
무례하게 굴거나 편하게 장난 걸만한 상대가 아니다.
가끔 게걸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먼저 장난을 쳐오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근 2년간 우용에게 손을 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매력적인 이계인 남성을 충분히 따먹을 기회가 많았는데도 손끝 하나 건들지 않았다는 말 되겠다.
마음만 먹으면 가르침과 보호의 대가를 내세우며 충분히 우용을 성 노리개로 삼아도 됐을 텐데도.
눈앞의 문어 여인은 그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구에 몰두할 뿐이었다.
이러한 이레귤러는 우용에게 곧 신비스러움으로 다가왔고, 알게 모르게 ‘그녀는 무언가 다르다’는 인식이 깊이 심어졌다.
말이 장황해서 그렇지.
한 마디로 특정 부류의 대화를 선뜻 꺼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오래전부터 궁금해왔던 것을 섣불리 물어보지 못하겠다던가.
참 야속하게도.
그 질문은 곧 예정된 군리와의 교미에 앞서 꼭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흐음…”
머뭇거리는 우용을 골똘히 바라보던 군리.
모든 분야를 섭렵한 머리 좋은 지식인 앞에서 감정을 숨기는 건 불가능하다.
우용이 어떠한 사념에 잠겨있는지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군리가 시원스럽게 정답을 알려주었다.
“소년. 유감스럽게도 이 몸은 불감증이 아니다. 딱히 교미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
“어엇…?! 저, 정말입니까?”
“푸하하하!!”
무례하지 않게 물어보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노력이 허무할 만큼.
아무렇지 않게 답을 내던지고는 군리가 호탕하게 웃는다.
“하아…그야 교수님. 자기 얘길 많이 안 하시니까요”
사실 우용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혀 모른다.
물론 함께 있는 시간은 많았지만. 그렇다할 특별한 일도, 별다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각자 할 일에 몰두할 뿐. 연구실은 떠들썩한 수다 대신 플라스크가 짤랑이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래서 섭섭한가? 이 몸을 다소 불편하게 여기는 것도 그와 관련 있는 모양이군”
“아뇨. 불편한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박사님과 개인적인 얘기를 나눴던 적이 없던 거 같아서요. 가깝지만 정작 알고 있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노골적으로 아쉬움이 드러나 있는 우용의 말투.
그러한 그를 달래듯, 군리가 다소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오히려 대화를 하지 않았기에 생길 수 있는 특별한 애틋함이 있지.”
“…”
“소년과 내 관계가 그렇지 않을까 싶군. 헷갈려 할 필요는 없네. 우린 이미 절친한 친구 사이니까”
과연 수많은 논문의 저자라는 건가.
학문 분야의 최고 권위자답게 어려우면서도 깔끔한 대답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한 가지. 단 한 가지 얘기해 주도록 하지”
“무슨 심보인가요 박사님. 한 가지라니…”
“마음이 바뀌기 전에 물어보는 게 좋을 게야”
“크흠..!! 궁금한 거야 뭐, 2년간 절 내버려 둔 이유죠. 박사님은 위 오두막 여편네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니까요”
우용은 그녀의 가치관이 궁금했다.
단순히 교미 따위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학문에 미친 과학자인 건지.
아니면 먼저 남자를 건드리지 않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지.
“…”
우용의 질문에 잠깐 동안 허공을 바라보던 군리.
“…독립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윽고 우용이 이해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이 돌아온다.
그 짤막한 대답 이후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고, 우용도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최대한 군리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었으니까.
꾸르르륵..
거대한 문어 다리를 꾸물거리며 우용에게 다가오는 군리.
실험복의 단추에 손을 가져가며 우용의 컨디션을 묻는다.
“그래. 준비는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박사님이 주셨던 정보집.. 치사하게 자기 정보만 쏙 빼놓았던데요”
“후후후… 소년. 결국 이 몸도 여자다.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약점을 발설해놓을 정도로 무덤덤하진 않아”
“무엇보다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도 시험 평가에 포함되지. 으음, 그래. 이 몸에 대해 공부는 좀 해왔는가?”
“물론이죠”
비록 ‘크사르크사켄 군리’라는 인물에 대해선 아는 게 없더라도 그녀의 종족, ‘사령 문어’에 대해선 꽤 빠삭하게 공부했다.
“기대하세요 박사님”
“우후훗…♡”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