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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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제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시간의 흐름에 기억은 뭉개지고 부서져 간다. 망각이라는 것은 과거의 고통을 무디게 만들고 미래를 살아가게 해주지만, 마왕인 나는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때의 그 느낌, 그 때의 생각, 그 때의 절망, 그 때의 고통, 그때의 감각까지도.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나의 머리는 그 때의 고통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한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가라앉혔다.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다시는 그 고통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때의 기억, 생각, 감각, 감정을 모두 잘게 부숴 파편으로 만들어 버린 다음 내 마음 속에 자물쇠를 채워 버린다. 그렇게 하면 나는 망각의 축복을 받은 것 처럼, 그때의 그 기억에서 해방될 수 있다.
허나 그 기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나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 속에서, 그 기억들은 생생하게 살아 가고 있다.
그래서 일까?
그 기억과 관련된 내용이나 생각을 떠올린다면 그 기억은 내가 채워둔 자물쇠를 부수고 나와 떠오른다. 그렇게 떠오른 기억들은 내게 크나큰 상처를 주고는 다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봉인된다.
허나 그 기억들이 내게 준 상처들은 어찌 치료할 방법이 없어서, 차곡차곡 내 가슴 속에서 쌓여 가면 갈수록 상처는 벌어진다.
상념을 마치고 나는 내게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 여신을 노려 보았다. 증오스러웠다. 내게 기억을 떠올리게 한것을, 그저 동정에 찬 눈빛으로 날 바라 보는 것을.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 내가 느낀 상처를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저 눈빛이 날 더 아프게 만든다.
내가 여신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니, 여신, 아니. 테르시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받은 상처를 제가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겠죠."
"그 상처는 오직 당신이 겪은 것, 제가 당신이 되어서 상처를 겪어도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제가 느낀 고통이 당신과 같다고도 할 수 없을거에요."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은 매우 고통스러워 하고 있어요."
"그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되고 싶어 하죠."
맞다.
테르시아는 여신이기 때문에 그 때의 일을 되살려 직접 내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허나. 테르시아와 나의 생각,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을 겪더라도 받는 상처는 다르다. 그렇기에 테르시아가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집중했다.
고통에서 해방 되는 것.
그것은 내게 그 어떤 것 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나의 과거의 그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해방 될 수 만 있다면, 나는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그녀는 그 부분을 파고 들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녀는 내 고통을 알고 있으니까, 내 과거를 알고 있으니까, 내 생각을 알고 있으니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아까보다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행한 고통에 책임 지세요."
그녀는 내게 그리 말했다. 무엇을 책임 지라는 걸까?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거늘. 내가 아무리 책임 지려 해도 그들은 이미 없을텐데.
그녀는 내가 어떻게 생각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재차 입을 열었다.
"당신이 성검을 쥐고, 용사가 되어, 과거에 지키지 못했던 것을 지키세요. 지금의 인연, 인류, 상처 받는 이들까지. 과거에 지키지 못했던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지키세요. 당신의 고통을 누군가 되풀이 하지 않도록."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나는 과거에 지키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지키라는 것인가? 하지만 그 말은 내게 너무 잔혹했다. 나는 여태까지 무엇하나 지키지도 못했다. 그들이 고통을 받아도, 나는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그들을 지키려 내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내 인연을 지키기 위해, 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그 누구보다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내 곁에 있던 인연은 운명이라도 되는 듯이 모두 상처 입었다.
이미 사라진 그들을 내가 다시 한 번 지킬 기회는 없었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기에, 현실이라서, 다시 한번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잃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운명에서 발버둥 치려고 해도, 그 운명의 사슬은 날 옳아 매어서 날 괴롭혔다.
내 마음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커져 더이상 자신이 없었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내 인연 하나 지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지킬 수 없구나. 남에게 상처만 입히는구나.
남에게 상처를 주는 내가 싫어서. 그들이 다칠 것을 알고 있어도. 그 온기에 무심코 다가가는 내가 싫어서. 나는 괴물이 되었다.
남에게 상처만 주는 괴물이지만, 나는 행복했다. 더 이상 내게 소중한 사람은 없었다. 세상이 나를 원망하고 나를 증오하고 나를 죽이려 하지만. 그 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아무리 세상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내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 보다는, 그 고통의 차이는 너무나도 심했기에.
그저 작은 고통만 받아도 되는 괴물이 나는 좋았다.
더 이상 나는 온기를 추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괴물이기에. 그들은 내게 더 이상 온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온기에 다가가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나는 괴물이 된것에 행복했다.
거짓말
아니야 나는 행복해. 그들이 상처를 입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상처를 입어도 상관없어.
거짓말
아니야. 내게 행복은 필요 없어. 나는 그저 원망, 질시, 질투, 혐오, 부정 등등. 이런 부정적인 감정만 받아도 돼.
사실 고통스럽잖아?
아니야. 나는 이게 편해.
사실 그들이 주는 온기를 갈구했잖아. 그래서 지금 아카데미에서의 삶을 즐기고 있잖아.
아니야. 거짓말이야. 나는 그저 연기하는 것 뿐이야. 내게 온기는 필요 없어.
널 속이지마. 너는 누구보다 사랑을 원해. 내 말이 틀렸어?
...아니. 사실 너의 말이 맞아. 나는 누구보다 온기를 원해. 사랑 받고 싶어, 원망 대신 동경을 받고 싶어, 증오 대신 호의를 받고 싶어, 상처 대신 행복을 느끼고 싶어.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사랑을 원하는 걸. 그저 세상에 버려저 온기만 바라는, 사랑을 갈구하는 생물이라는 걸. 하지만 그 사랑을 받기보다, 내가 느끼는 고통이 더 커서. 부정하고 싶었어. 내가 사랑을 추구하면, 그건 내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니까.
하지만.
하지만...
나는 다가가고 싶어. 설령 그게 함정이라고 해도. 상처입는다고 해도. 후회 한다고 해도. 나는 사랑을 향해 다가가고 싶어. 그들의 온기를 느낄 수 만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으니까. 고통이 두렵다고 해도, 무섭다고 해도. 그것보다 더 큰 애정을 갈구해.
부모에게 버려진 새끼처럼.
또 상처 받을까 두렵지만, 그래도 애정을 받고 싶어서.
상처를 입을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애정을 갈구하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숨겼어. 나도 모르게 애정을 갈구해서 상처 입을까봐. 하지만 이제는 싫어.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아. 이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 수면위로 떠오른 내가 꼭꼭 감춰두었던 감정들은. 내가 행복을 느낄수록 트리거가 되어 그 크기를 키워.
너무나도 커진 애정을 갈구하는 내 마음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었어.
아니 숨기고 싶지 않아.
미친듯이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나는 애정을 추구하니까.
아무리 고통받고 세상이 날 미워해도. 나는 아주 작은 애정. 그것 하나만 이라도 있으면 괜찮으니까.
나는 내 손에 놓여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검신에 금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성검은 매우 아름다워서, 성스러워서. 내게 질척이며 다가오는 지독한 운명마저 베어 낼 수 있을 거 같아서.
나는 성검을 꽉 쥐었다. 마음 속에서 터져나오려는 감정을 더 이상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
인정 받고 싶어서, 동경 받고 싶어서, 호의를 받고 싶어서, 존경을 받고 싶어서, 친절을 받고 싶어서, 호의를 받고 싶어서.
사랑을 받고 싶어서.
만약 내가 여신의 말대로,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고 모두가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내가 고통 받지 않고, 애정을 받을 수 있다면, 긍정적인 감정을 받을 수 있다면.
상처 입을까 두렵고, 여신의 말이 거짓일 것 같아서 두렵고, 더 큰 상처를 입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까 두렵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도전할래.
나는 아무리 상처 입어도, 애정을 갈구하니까. 상처를 입으면 입을 수록 더 사랑을 원하니까.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성검을 꽉 쥐며 다시 한번 다짐했어.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겠다고,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이번에는 후회 하지 않겠다고.
원망 대신 칭찬을, 증오 대신 호의를, 혐오 대신 존경을, 질투 대신 공감을, 상처 대신 행복을, 모든 부정적인 감정 보다는 사랑을.
있을지도 모를 사랑을 위해 피아나는 다짐했다.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겠다고, 모두를 지키겠다고. 그 누구도 내 곁에서 고통 받지 않게 하겠다고.
성검을 잡은 그날.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을 담아.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진심을 담아.
피아나는 온전히 용사로서 각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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