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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녀가 된 마왕님-31화 (31/35)

〈 31화 〉 시커먼 감정의 덩어리

* * *

수 없이 많은 자아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하는 기분을 아는가?

내가 내 의지대로 행한 일들이, 그저 다른 자아로써의 관점이여서.

또 다른 자아가 같은 일을 겪으면, 다르게 행동할 것을 알기에. 똑같은 몸을 사용하지만, 서로 하는 행동에 너무나도 괴리감이 느껴져서.

만약 하나의 존재에 수 많은 자아가 존재한다면, 방금 행했던 일을 한 존재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한 행동들 이지만, 또 다른 '나'는 내가 한 행동을 이해 하지 못한다.

어떤 자아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 일이, 또 다른 '나'에겐 너무나도 잔혹해서.

사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자아도.

수 많은 복제품중에 하나일 뿐일까 봐, 그저 진짜를 모방한 가짜일 뿐일까 봐,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솓아 오른다.

사실 나는 만들어진 존재가 아닐까

수 없이 많은 자아가 부딪혀 오면서, 어느덧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도 점차 침화된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생각들도, 점차 깎여 나가고 잊혀질까 봐, 너무나도 두려워서 몸서리를 친다.

잊고싶지않아지금내가하고있는생각은분명히,내가하고있는생각들일텐데,어째서나는의문을가지는걸까,잠깐.나는의문을가지고있었나?방금까지내가했던생각들과지금내가하는생각들이너무나도달라서괴리감이느껴진다.무서워,잊고싶지않아,무서워,너무나도두려워,아무리내가만들어진,자아라고해도내가똑바로생각하고행동한다면그건나잖아,분명하나의인격인거잖아,그런데왜나는또묻혀야하는걸까,어떻게보면이것도살인이아닐까,무서워.무서워.잊고싶지않아살려줘,나는계속행동하고싶,어가라앉고싶지않아,날파묻지마.싫어.

허나, 그 생각은 또 다른 자아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깊게

저 심연 속으로

이내 머릿속을 괴롭히던 상념은, 흔적도 없이 가라 앉아 있었다.

***

"끄으응—"

덜 여민 커튼 사이에서, 따스한 아침 햇살이 내 방안을 밝게 비춘다. 어느덧 아침 햇살은 저 하늘 높이 떠올라, 주변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며, 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창가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침대 위에서, 햇빛으로 말린 뽀송뽀송한 이불을 꽉 쥐며 품에 쥐고 있다가, 이내 아쉬움을 거둬 들이고는, 쥐고 있던 이불을 살며시 풀어 준다.

내 몸위를 덮고 있던, 따스한 이불을 살며시 밀어 내고는 상체를 일으키며 기지개를 쭉 편다. 양 손을 깍지 끼고는 높게 뻗어, 위로 쭉쭉 올려준다. 어꺠에서 뚜둑 소리가 나면서 시원한 느낌과 함께 나는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를 털고 일어 났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루미의 아침 인사에 나도 마주 인사해주고는 거실로 나아가서, 푹신한 소파에 살포시 앉는다. 푹신한 소파는 무엇을 가죽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매우 푹신푹신해서 기분이 노곤노곤 해진다. 하지만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아까 떠올랐던 생각을 다시 떠올려 본다.

"분명, 무언가 생각하고 있던 것 같던데 말이죠…."

분명 그때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 공포, 혼란스러움. 질척질척하고 끈적거리던 부정적인 감정이였다.

"안좋은 꿈이라도 꾼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려 했으나, 어느덧 그 기억은, 파편으로 잘게 쪼개져,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뭐…, 딱히 상관은 없겠죠."

'별 생각 아니였을 테니까요.'라고 합리화 하며,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질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차피 꿈이라고 해봐야 제게 별 상관은 없었을테니 말이죠.

과거의 기억이라도 떠오른 걸까요? 하지만 이제는 기억 조차 나지 않으니 괜찮겠죠. 굳이 트라우마를 자극할 필요는 없을테니 말이죠.

어느덧 몽롱하게 가라 앉아 있던 정신도 또렷하게 돌아와서, 나는 소파에 파묻고 있던 몸을 일으킨다.

오늘도 밖으로 나가야 하기에, 나는 입고 있던 펭귄 잠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간다. 샤워실로 들어가서, 칫솔에 치약을 묻힌 다음, 이를 꼼꼼히 닦으며 거울을 바라 보았다.

거울에 얼룩이라도 있는 것일까? 거울 한쪽 구석에 있는 검은색 얼룩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손에 물을 묻히고는 거울을 열심히 닦아 보지만, 그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 것과 동시에, 그 얼룩을 자세히 살펴 본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것은 얼룩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진 글자 였다. 무슨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며 글자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싫어.

싫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잘못 본 것일까?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는 다시 한 번 살펴보니, 그 검은색 글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잘 못 본걸까요…?"

아침부터 헛것을 본다는 생각에 내 몸이 쇠약해지기도 하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대수롭게 넘겼다. 솔직히 글자가 진짜로 적혀 있었다고 한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을 까.

그저 장난이겠지.

칫솔질을 마치고는 세면대 위에 있는 컵을 손으로 가져와서, 수도를 연다음 물을 채워서, 입에 가볍게 머금는다. 우물우물. 잠시 물을 입안에서 열심히 굴리다가 다시 세면대 위에 뱉는다. 그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하고, 마침내 입안에 남아 있는 거품이 모두 사라 졌을 때, 그 행위를 마쳤다.

이어서 다시 한 번 수도를 연다음, 간단하게 세수를 한다. 작고 보드라운 손에 물을 한아름 퍼 올리고는, 얼굴에 곱게 펴바르며 가볍게 세안을 한다. 그 다음 폼 클렌징을 적당하게 짜서 손에 문지른 다음, 손에 있는 거품을 얼굴에 가볍게 문지르며 세안을 한다. 꼼꼼히. 구석구석 거품으로 세안을 마치고는, 잠궈두었던 수도를 열어서, 물을 퍼올린 다음 가볍게 세안을 한다. 어푸어푸.

얼굴에 남아 있던 거품을 모두 헹구어 내고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 본다. 그리고 나는 거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까지 멀쩡했던 거울이, 시커멓게 변색 되어 있었기에.

[살려줘.싫어.풀어줘.그만.나를 버리지 마.무서워.추워.어두워.캄캄해.날 무시하지 마.분명 나를 봤잖아.나를 내버려둬.고통스러워.끔찍해.왜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 걸까.혐오해.증오해.나를 이렇게 만든 너를.왜 나를 버린거야.나도 너란 말이야.나도 또 하나의 자아라고.나는 분명히 또하나의 너란 말이야.무시하지 마.나를 내버려 두지 마.날 못본척 하지마.그만.멈춰.고개를 돌리지 마.외면하지 마.싫어.제발.풀어줘.그만해.나한테 왜그래.멈춰.안돼.그만.싫어.무서워.몸이 떨려.너무 추워.]

커다란 거울에 빼곡히 들어찬 검은색 얼룩이 너무 나도 짜증이 나서, 나는 그만 거울을 부서트려 버렸다.

쨍그랑—

완전히 박살나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여러 갈래로 깨어진 거울의 파편은, 아까 전에 봤던, 검은색 얼룩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자신의 앞을 자신의 몸에 투영하고 있었다.

괜히 그 거울을 바라 보고 있으니, 너무 나도 불쾌해져서, 나는 바닥에 깔린 거울의 파편을 무시하고는 샤워실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신경질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샤워기 앞으로 몸을 돌린 나는, 떨리는 손놀림으로 샤워기를 틀었다.

울컥울컥.

세차게 틀어진 샤워기 호스에서는, 탁한 검은색의 물이, 어쩌면 다른 무언가가 토해지듯이 뿜어져 나왔다.

탁한 검은색의 물은 내 머리를 적시며, 그 검은색은 서서히 나를 물들여서, 내 몸은 그 끈적한 검은색 덩어리로 질척질척하게 되었다.

칠흑같이 새카맣고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윤기가 나는 칠흑의 머리칼은, 탁한 구정물에 그 빛을 잃고 그저 시커멓게 물들었다. 칠흑과 같던 머리칼과 비교가 되게 새하얀 내 피부도, 탁한 구정물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내 눈에서는 루비처럼 아름다운 빨간 색이 아닌, 그저 피처럼 붉은 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그 구정물들은 새하얀 내 몸을 검게 물들이며, 내 몸에 새차게 쏟아져 내렸다.

그에 나는 속이 울렁거려서. 몸에 끈적하게 들러 붙은 그 구정물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워서 고개를 숙이고는 입에서 검은색의 구정물을 토해 냈다.

"욱… 우우욱… 우웨엑…윽, 우우우욱… 우웨엑, 켁…켁, 우욱…."

울컥울컥.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숙이고는, 몸에서 올라오는 구정물 덩어리를 토해 냈다. 얼마나 토해 냈을까? 더 이상 나올게 없을 정도로 몸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을 한 가득 토해내고는 고개를 들었다.

뿌옇게 수증기가 낀 거울을, 물에 적신 손으로 대충 닦아 내고서 살핀 거울 속 소녀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표정 했다. 그 무표정은 지루해서 그런게 아니라 마치 감정이 사라진 것과 같아서, 방금전 소녀가 토해낸 검은 구정물과 함께 감정 조차 쓸려나간 것 같았다.

싸늘한 거울 속, 탁한 붉은 빛을 내고 있는, 초첨없는 소녀의 붉은 눈과 마주친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입에서는 차마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탄이 새어 나온다.

이미 몇 번이나 겪었으면서, 또 다시 발작처럼 튀어 나온 걸까. 이미 각오는 충분히 했을 텐데, 그 짐은 아직 내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나.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충분히 각오 했으면서. 의문은 가지지 않는다고 나 자신과 약속 했으면서. 내가 벌인 일들은 모두 내가 책임 진다고 했으면서, 주변인들과 섞이면서, 기연을 얻으며, 깨달음을 얻은 척을 했으나. 그것은 그저 한줌의 거짓 이였나.

해맑게 행동했던 것도.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도. 밝게 미소 짓던 것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것도. 희망찬 표정을 지은 것도.

모두 거짓 이였나

어쩌면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저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는, 어설픈 생각을 길게 끌고 가면서. 그로 인해 깨달음을 얻은 척 하면서. 진짜 문제는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저 진실을 마주 보는게 두려워서. 애써 진실을 외면하려 했으나.

저들과 내가 깊게 엮이면 엮일 수록. 더 깊게 그들의 삶에 내가 파고들 수록. 그 밝고 희망차고 아름다운 모습은, 동경해 마지 않는 그 모습은. 나의 또래인 그들이 미소 짓던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너무나도 밝고 깨끗해서.

시커멓고 어둡기만 한 나와 비교 된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내가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태연하게 해내는 그 모습을 보며, 동경을 느꼈나?

나는 하지 못하는 일들을 당연하게, 일상처럼 하는 그들을 바라 보며, 질투를 느꼈나?

나와 비교 되게 너무나도 밝고 희망찬 그들을 보며, 그 순수한 미소와 그들의 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마음을 바라 보며, 평화라는 축복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 평화를 모두 부서트리고 싶었나

하…!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괜찮다고 생각 했는데.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다고 생각 했는데.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은 너무나도 썩어 문드러 졌나.

어디까지 추락하는 것일까. 내 자신이 너무나도 추해서 한숨이 입을 비집고는 새어 나온다.

이러면 안되지. 나는 그들과 다른 걸. 어째서 그들을 나 처럼 불행하게 만드려는 걸까. 내가 그들처럼 행복해지면 될일이다.

나는 애써 생각을 털어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면…,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정신차려요. 그렇게 중얼 거리며, 나는 떠오른 감정을 억눌렀다. 터져나오려는 그 감정을, 그들을 망가트리고 싶다는, 그들이 원망스럽다는, 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너네는 너무나도 행복해서, 질투가 나서, 모두 무너트리고 싶다는, 그 추악한 마음을, 그 부정적인 감정을, 또 다시 나는 억누른다.

그 마음은 언제 터져나올지 모르는 화산과도 같았으나, 그 방법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터져 나오는 그 감정을 폭발 시키면, 이미 너무나도 늦었기에.

언젠가 터질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억눌렀다.

차츰차츰 추악한 감정도 가라 앉고, 방금까지 떠올랐던 부정적인 감정은 쇠사슬에 묶여, 저 심연 깊은 곳으로 가라 앉았다.

이윽고 모든 생각과 감정이 가라 앉은 나는 거울을 바라 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 별일 아니겠죠! 나는 그렇게 중얼 거리고는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실을 빠져 나왔다.

모두가 빠져나가고 인기척 하나 없는, 방금 전 샤워의 열기를 싸늘하게 식히는 그 샤워실 속에서, 깨어진 거울 파편 속에는 검은색 얼룩이 남아 있었다.

[모두 부서트리고 싶어]

한 소녀의 자그마한 비틀림은, 그 마음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천천히.

조금씩…

알지 못할 정도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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